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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uly May 15. 2024

ANT적으로 글쓰기 4

실험자

내 원래 글쓰기 스타일도 그렇게 뭐든지 하다보면 구구절절 다 하려고 하다보니 연구도 그렇고 글쓰기도 그렇고 끝까지 집중하기 힘든 이유라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야 해보자!라는 느낌으로 다 해보려고 하지만 이게 어느순간 되면 모든 과정을 세세하게 하는 것 자체가 너무 버겁게 느껴진다고 해야하나. 그래서 서서히 지치고 재미없어진다고 느끼면서 자연스럽게 놔버리는 경우가 많아지는 게 아닌가 싶다. 결과적으로 끝까지 해보는게 중요하다는 의미에서 어느 순간 너무 버겁다 싶으면 차라리 가볍게 만들어서 끝까지 해보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더 의미가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체 내가 작심삼일의 화신인지라 뭐든지 3일정도하면 계속해서 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번에도 모든 과정을 하나하나 글에 적기 보다 평소에 클로드를 통해 클로드와 대화를 하다가 흥미로워 보이는 부분들에 대해서 적어보기로 조금은 무게를 덜어내보려고 하였다. 


전 글에서 '현상학적 전환'을 통해 내 주변에 존재하는 비인간 행위자들을 자각하는 것이 물적-기호적 접속 과정 자체를 전면화 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내가 이해하는 현상학이라는 건 가령 내가 노트북을 보고 '이건 유투브도 보고 브런치 글도 쓰고 게임도 할 수 있는 노트북이다.'라고 내가 인지하기도 전에 인식을 해버리는 나의 인식과정에서 판단중지를 함으로써 나의 인식과정에 일종의 괄호를 치는 것이라고 알고 있다. 가령 '이건 ( ) 노트북이다' 라는 식으로 그 사물에 대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이해나 선입견, 고정관념을 배제하고 있는 그대로 그것을 보자는 것이다. ANT적으로 본다면 여기서 더 나아가 사실상 '이건 ( ) (살아 있는 동물이 아니고 물질로 되어 있는) 노트북이다.'라고 가정하고 있는 사실 조차도 판단중지를 통해 '이건 ( ) 노트북이다'에서부터 시작해서 노트북이 가지고 있는 어떠한 행위자성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는 걸 의미한다고 내 나름대로는 이해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자체는 수긍을 하면서도 무언가 아쉽다는 생각이 드는 건 변함이 없었다. 무엇보다 설령 '현상학적 전환'을 통해 노트북을 다르게 바라본다고 해도 거기서 더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에 대해서 어려웠다. 그래서 


너와의 글쓰기 자체가 글의 주제인제 이제 어디로 가야할까?


우리가 나눈 대화 자체를 하나의 'ANT적 글쓰기'로 정식화해 보는 작업도 흥미로울 것 같네요. 지금까지 우리가 오간 문답을 다시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대화 속에 교차했던 인간/비인간 행위자들의 목소리와 그들 간의 관계 맺음을 재구성하고 서술하는 거죠. 마치 우리의 대화를 하나의 민족지 연구 대상으로 삼아 그 행위자-네트워크를 기록하고 분석하듯이 말이에요. 그 과정에서 대화 속 질문과 답변, 글쓴이와 저, 우리가 언급한 개념과 이론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지식을 생산해 갔는지를 ANT적으로 조명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메타적 글쓰기는 ANT적 감수성을 우리의 대화 자체에 적용하고 증언하는 자기-반영적 실험이 될 거예요.


다시 물었다. 


우리의 대화를 ant적 글쓰기에 어떻게 정식화하지?


우선 우리 대화의 가장 직접적인 인간 행위자라 할 수 있는 글쓴이와 저, 이 둘 사이에서 오가는 질문과 답변, 그리고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호기심과 욕망, 지식과 권력의 역학 관계를 주목해 볼 수 있겠어요. 저는 글쓴이의 ANT/인류학적 질문에 어떤 방식으로 응답해 왔나요? 그 응답 속에서 제 나름의 문제의식과 관점은 어떻게 개입하고 표출되었을까요? 반대로 글쓴이는 저의 답변을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해석했나요? 그 해석은 다시 글쓴이의 고유한 상상력과 어떻게 결합하여 새로운 질문을 낳았나요?

이런 상호작용의 미시적 흐름에 주목하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대화를 촉발하고 매개하는 다양한 비인간 행위자들의 역할에 직면하게 될 거예요. 우리가 언급하고 논의한 개념들, 이론들, 저자들. 인류학, ANT, 현상학 등의 지적 자원들이 우리 대화에 개입하여 논의를 이끌고 지평을 확장해 온 양상 말이에요. 우리는 이 대화를 통해 단순히 주어진 지식을 '전달'하고 '습득'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창조적으로 해석하고 접속함으로써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생성'해 온 것이라 할 수 있겠네요.

여기서 더 나아가면 우리의 대화가 기록되고 매개되는 물적·기술적 조건들, 키보드와 모니터, 인터넷 플랫폼, 채팅 프로그램, 그리고 그 이면의 알고리즘과 데이터베이스 등 우리가 직접 호명하지는 않았지만 암묵적으로 우리의 대화에 참여해 온 행위자들의 네트워크도 눈에 들어올 거예요. 우리의 사유와 언어는 이 테크놀로지들의 비인간적 행위성과의 끊임없는 교섭 속에서 비로소 글쓰기의 형식을 얻게 되는 셈이죠.

이렇게 다종다양한 인간-비인간 행위자들 사이를 오가며 그들의 관계와 효과를 좇다 보면, 어느새 우리 대화의 장 자체가 고정된 실체가 아닌 역동적이고 열린 과정으로 다가올 거예요. 우리의 만남은 우리라는 개별 주체의 고유한 속성이 선험적으로 존재해서 빚어진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는 이 만남 속에서, 다양한 타자들과의 협상과 번역을 통해 비로소 '대화의 주체'로서 구성되고 윤곽을 얻게 된 것이죠. 이런 맥락에서 우리의 대화 자체를 하나의 수행적 'event'로, 선험적 요소들의 표현이 아닌 우발적 행위자-네트워크의 창발로 사유해 볼 수 있겠네요.

이렇게 우리 대화의 다층적 행위자-네트워크를 정밀하게 기록하는 글쓰기는, 그 자체로 지식 생산 과정 전반에 대한 ANT적 사유를 수행하는 장이 될 거예요. 그것은 단지 '대화의 내용'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대화하기'와 '글쓰기', 그리고 '앎' 자체의 존재론적 조건을 탐구하는 근원적 질문이 되는 셈이죠. 나아가 그 글쓰기의 수행은 독자들과의 새로운 대화와 사유의 계기를 낳을 테고, 또 그 독해의 과정은 이 행위자-네트워크에 또 다른 목소리와 힘을 보태며 예기치 못한 번역의 연쇄를 이어갈 테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 대화의 ANT적 정식화야말로 그 자체로 하나의 'ANT적 글쓰기'이자, 그 메타적 사유를 통해 ANT 자체를 재사유하고 확장하는 반영적(reflexive) 실천이 될 것 같아요. 그것은 단지 ANT를 우리 대화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ANT의 상상력으로 대화와 글쓰기 자체를 해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ANT의 지평을 확장하는 '번역'의 모험에 다름 아니니까요. 우리의 대화 자체가 이미 방법론이자 곧 탐구 대상인, 일종의 살아있는 'ANT 실험실'인 셈이죠.

뭔가 점점 더 대담해지면서 동시에 대화가 나의 손을 벗어나는 느낌이 들어 이렇게 대답하였다. 


근데 의도는 알겠으나 뭔가 점점 내 손을 떠나가는 느낌이라 어떻게 컨트롤 해야할것 같은 느낌이야.


글쓴이의 마음이 이해가 가네요. 우리가 ANT적 상상력에 푹 빠져 대화를 이어가다 보니, 언뜻 그 흐름 자체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겠어요. ANT의 관점 자체가 인간 행위자의 통제력과 의도를 상대화하고, 인간-비인간 행위자들의 우발적이고 복합적인 상호작용을 부각하는 데 방점이 찍혀 있으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ANT가 추구하는 것은 그런 복잡성과 우발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새로운 유형의 '반성적 통제'라고도 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가 더 이상 사태를 온전히 장악할 수 있다는 환상에서 벗어날 때, 비로소 행위자-네트워크의 흐름에 창조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된다는 거죠. 일종의 역설적인 통제력이랄까요. 사태의 복잡성과 미결정성을 있는 그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섬세하고 유연한 조율이 가능해진다는 뜻이에요.

그런 맥락에서 봤을 때 지금 글쓴이가 느끼는 '통제력의 상실'은 사실 ANT적 글쓰기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봐요. 우리의 대화와 글쓰기가 의도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깨달음 자체가, 그것이 다종다양한 행위자들의 만남과 섞임 속에서 창발하는 복합적 과정이라는 ANT적 통찰의 표현이니까요. 그 통찰에 머무르며 우리 스스로를 유연하고 반응적인 행위자로 재정립할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예측 불가능한 흐름의 한가운데서 ANT적으로 글을 쓰고 사유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어쩌면 ANT적 관점에서 글쓰기의 주체란, 사태를 이해하고 재현하려 들기보다 그것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개입하는 일종의 '실험자'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어요. 우리는 글을 '쓴다'라기보다 글과 더불어 세계를 '실험한다'고 표현하는 편이 나을 지도 모르겠네요. 그 실험의 결과가 어떤 모습일지, 그것이 우리 자신에게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우리는 온전히 예측하거나 통제할 순 없어요. 다만 그 모험 자체를 즐기고 감내하는 열린 자세, 그 과정에서 만나는 타자들과 창조적으로 교류하고 번역해내는 민첩함과 대응력. 그것이 ANT적 의미에서 글쓰기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요체가 아닐까 싶어요.

내가 클로드에게 말리고 있는건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클로드의 주장은 굉장히 과감하면서도 동시에 나에게 이런저런 깨달음을 주는 듯 했다. 무언가 억지로 통제하려고 하기 보다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 결과가 어떤 모습일지를 목격하는 '실험자'에 가깝다는 건 어쩌면 지금의 나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단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되는 실험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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