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오스크에 가로막힌 사람들
오후 근무 중 쏟아지는 졸음에 못이겨 커피라도 한 잔 마시기 위해 회사 앞 카페에 잠시 들렀다.
대용량 커피를 파는 프랜차이즈 카페 중 한 곳이었는데, 어느 날부터 매장에 들어가니 주문을 받는 직원분 대신 키오스크가 덩그러니 들어서있었다.
처음 기계를 봤을 때는 눈썹을 잔뜩 구기며 긴장한 상태로 기계 앞에 섰다. 개인적으로 키오스크 주문 경험이 한 번도 즐거움으로 다가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불쾌한 경험은 이 카페에서도 이어졌다.
메뉴 선택이나 주문은 차치하고서라도 포인트 적립은, 결제는 얼마를 어떤 수단으로 어떻게 할건지를 끈질기게 물어보는 몇개의 창을 물리쳐야만 겨우 주문을 완료할 수 있는 구조였는데, 겨우 메뉴를 주문하자 뜨는 통신사 할인 창 하단에는 두 가지 버튼이 생겼다.
‘적립만 하기’, ‘포인트 할인받기’
난 적립도 없고 할인도 안받는데?
이 화면을 보기까지 나는 이미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고, 뒤에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어 미적거리면 안된다는 생각이 들자 더 마음이 급해졌다. 나의 작은 패닉을 느꼈는지, 이 카페에 자주 오는 동기가 잽싸게 버튼을 눌러주어 주문을 완료했지만, 이런 상황이 몇 번 반복되자 이 키오스크 때문에라도 이 카페에 오고싶지 않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회사에서 가장 가까운 카페중에 하나라는 이유로 자의든 타의든 잊을만 하면 오게되는 곳이니 내가 적응할 수밖에...
카페 가운데 덩그러니 서있는 키오스크가 여전히 달갑지는 않았지만, 비가 오는데도 귀찮다는 이유로 우산 없이 아무 가까운 카페로 뛰어온 참이었다. 적당히 메뉴를 골라 결제를 한 뒤에 근처 의자에 앉아서 업무 메일을 보고 있었는데, 한 할아버지 분께서 지팡이를 짚고 느릿한 걸음으로 카페에 들어오셨다. 그 순간부터 나는 심장이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비도 오고 바람도 부는 을씨년스러운 날이라 할아버지는 이미 지쳐보이셨고, 키오스크를 가만 응시하며 허공에서 움직이는 검지 손가락은 쉬이 화면을 누르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화면에 떠다니는 글씨들은 너무나도 작았고, 상단에서 돌아가는 타이머는 할아버지의 머뭇거림을 기다려줄 생각이 없는지, 제한시간을 넘기자 주문을 취소하겠느냐는 팝업을 띄워댔다.
소심한 나는 무례하게 직접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으려 무던히 노력하며 속으로 갈등하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가서 도움을 드릴까?'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신데 내가 무턱대고 도와드리는 것이라면?'
그 때, 할아버지의 옆에 서있던 남자가 말을 걸었다.
"할아버지, 뭐 드시고 싶으세요?"
동시에 직원들은 무얼 하고 있느냐고 소리를 높였다.
메뉴를 만들다가 그 소리를 듣고 나온 직원은 시간이 걸려도 할아버지께서 혼자서 하실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고, 남자는 지금 당장 도움을 드려야한다는 입장이었다.
두 사람의 입장 모두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내게는 비오는 날 잠시 카페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싶은 할아버지의 뒷모습만 보였다.
"주문하신 카페라떼 나왔습니다."
결국 작은 소란은 내 커피를 부르는 소리에 일단락 되었고, 나는 주문한 커피를 받아들고 도망치듯 회사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도움을 받으셨을까? 혼자의 힘으로 주문을 마치셨을까?
나는 결말을 알 수 없었지만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키오스크는 카페에 등장한 후 아직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다.
키오스크의 등장으로 우리는 사람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도 음식을 주문할 수 있게 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편리함이라고 말하나, 그 편리함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일까?
브랜드는 고객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창을 사람의 얼굴이 아닌 커다란 스크린으로 막아두었고, 주문외에 도움이 필요한 고객들이나, 메뉴에 대해 설명이 필요한 사람들은 직원들과 소통하기 힘들어졌다. 비단 나의 경험 뿐 아니라 키오스크에 관한 애로사항은 여러 기사를 통해서도 접할 수 있는데, 키가 작은 어린 아이들이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스크린 상단에 떠있는 메뉴를 터치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었다. 시력이 많이 떨어지는 사람들의 경험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나에게 키오스크는 약간의 불편함이나 짜증을 유발하는 정도에 그쳤지만, 누군가에게 키오스크의 등장은 주문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부끄러운 마음마저 들었다.
기술의 발전이 사람을 돕는다고 하나, 도움을 받는 사람의 범주에 포함된 사람은 어디까지일까?
며칠동안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각종 서비스, 안내방송, 여러 기계들이 과연 모두에게 '편리'한 경험을 제공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신호등의 불은 너무 빨리 꺼지고, 지하철 문은 너무 빠르게 닫히며, 버스는 안내방송과 달리 정차하기 전에 문 앞에 서있지 않으면 정류장을 놓치지 일쑤다. 스마트폰의 글씨는 아무리 크게 설정해도 한계가 있으며, 그 설정을 바꾸는 일조차 까다로워 스스로 변경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한정된 재화 내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기에, 한 사람도 소외받지 않는 기술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도 지금보다는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걸까?
글을 쓰는 내내 최근에 읽은 이슬아 작가님의 <부지런한 사랑> 중 한 구절이 떠올랐다.
수업에서 아이들과 나는 이따금씩 주어를 바꿔가며 글을 썼다. ... 그러자 우리의 마음이 바빠졌다. 주어를 늘려나갔을 뿐인데. 나에게서 남으로 시선을 옮겼을 뿐인데. 그가 있던 자리에 가봤을 뿐인데. 안 들리던 말들이 들리고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슬프지 않았던 것들이 슬퍼지고 기쁘지 않았던 것이 기뻐졌다.
기술은 프로그래밍에 불과하기 때문에 따뜻함이나 상냥함을 가지기 힘들겠지만, 그 기술을 만드는 사람들은 조금 더 상냥함을 가질 수 있기를, 그들이 사용하는 대상의 주어를 여러번 바꿔볼 수 있기를 하고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