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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자 Jul 11. 2021

지도를 그리며 방황 중 03

묵주기도 도전기

 나는 지금 천주교 새신자 교리를 배우고 있다. 장장 4개월의 대장정이다. 그중 2개월째 되었을 때, 유방암 판정을 받았다. 받은 직후에는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내가 새신자 교리가 끝날 때까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유방암이 내 삶은 멈출 수는 없습니다'라는 책 제목처럼, 삶은 그렇게 금방 끝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나는 그 후에도 예약된 병원 검사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출석률 100%를 유지하고 있다. 다다음주에 수술이 있어서, 아마 그 주 교리반에는 못 갈 것 같다. 그 전에는 예비자 교리반 분들과 성지 순례를 간다. 못 갈까 봐 걱정했는데 갈 수 있는 데다가, 수술 전 성지 순례에 가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감사하다. 성지 순례 방문 9일 전을 기념하여 성당에서는 9일 묵주기도를 하기로 했다.


묵주의 한 알은 장미를 뜻하며, 예전에 마리아 님께 장미꽃을 바친 것에서 유래한 기도이다. 성모송을 10단을 외우면, 그게 1단으로 그렇게 5단을 하는 것이 묵주기도의 기본이다.


# 첫째 날.(목요일)


 자기 전, 묵주기도를 하기로 하고 아직 못 외운 기도문들을 슬쩍슬쩍 커닝하며 기도를 시작했다. 외웠다고 생각했는데, 틀렸기도 하고 조용히 기도를 하는 거라기보다는 숙제에 가깝게 도전하 듯이 기도했다. 5단을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남편이 말하길 불도 안 끄고 잤다는 것이다. 오 마이 갓.


# 둘째 날.(금요일)


자기 전, 도전 2일 차. 이번에는 스탠드를 켜고 도전했다. 전등을 켜고 자는 건 같이 자는 사람에게 좀 민폐니까. 3단까지는 잘했는데, 4단부터는 순간순간, 잠에 빠져 들었다. 5단을 완료했는지 기억이 없이 잠들었다.


# 셋째 날.(주말 토요일)


자기 전에 하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 날은 오전에 병원에 가서 대상포진 예방주사를 맞았다. 항암치료를 하려면 그전에 몇 가지 예방 주사를 맞는 게 좋다고 하여 저번 주에는 폐렴을 이번 주에는 대상포진을 맞았다. 폐렴을 맞고 나서는 이일 정도 두통이 짧게 있었고, 대상 포진 예방 주사도 살짝 두통이 있었지만 낮잠을 자고 충분히 쉬니 다음 날은 괜찮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병원에 다녀와서 산책 후 묵주기도에 도전했다. 크지 않게 찬송을 틀어 놓고 묵주기도를 시작했다. 1,2단은 좀 헤맸지만 3단에서는 집중이 되기 시작했지만, 4,5단부터는 다시 잡생각이 중간에 들기 시작했다. 주로, 전이나 재발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 기도문이 틀렸다.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기도를 완료했다. 그날 밤 어제 다 완료하지 못한 묵주기도를 야심 차게 시작했으나 3단을 못하고 잠들었다.


# 넷째 날.(주말 일요일)


아침에 일어나 남편과 배드민턴을 치고 아침밥을 먹고 나서 묵주기도 도전. 남편은 오늘도 출근을 하고 아무도 없는 집에서 찬양을 들으며 묵주기도를 했다. 어제보다는 훨씬 잘되는 느낌이었다. 재발과 전이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 평안을 주시고, 치유의 과정에 함께하여 주시길, 모든 과정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리고 밤에도 묵주기도를 도전했으나, 1단에서 잠이 들었다.


#다섯 째날.(월요일)


다음 주 수업 교환으로 오늘은 수업이 1,2,3,4교시였다. 서둘러 끝내고 조용한 틈을 타 묵주기도에 도전! 교무실에 있으니 선생님들이 자꾸 이야기를 하셔서 휴대폰과 에어 팟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공용 교실에서도 수업 중이라 마침 운동장이 비어 찬양을 귀에 꼽고 천천히 걸으며 기도를 시작했다. 집에서는 적은 내용을 보고 하지만, 밖이라 그것이 용이하지 않아 아마 하다가 주님의 기도를 빼먹기도 하고, 환희의 신비 내용을 다소 틀리기도 했지만 조용한 가운데 기도를 했다. 낮게 구름이 깔린 묽은 회색 빛 하늘은 시원함과 후텁지근함이 공존했다. 더운 공기의 기운이 간간히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희석되었다. 교정에 낮게 잘린 정원수 사이로 새 두 마리가 같이 붙어 날아다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새 한쌍을 보니 남편 생각이 났다. 수술이 잘 끝나기를, 재발과 전이의 공포에서 평화를 주시기를, 나를 위해 걱정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시기를 기도하였다.


#여섯 째날.(화요일)


 어젯밤에 아랫지방에는 큰 비가 왔다. 휴대폰에 산사태 경보가 왔지만, 여기는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개비 정도가 내리고 있었다. 남편과 배드민턴을 치러 나왔다가 비가 오고 있어 우산을 챙겨 나왔다. 새벽에는 비가 꽤 내렸는 듯, 비에 맞은 풀들이 꺾여있었다. 기간 한정 배드민턴. 이제 다음 주면 못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우리는 절박했다. 비가 와서 아파트에 있는 헬스장에 가려다가 마음을 바꾸어 원래 치는 농구장 옆에 있는 게이트볼 장에서 기어이 배드민턴을 쳤다. 탕- 탕- 공의 릴레이가 잘 될 때는 그 리듬이 안정적이다. 빠르든, 느리든 말이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다. 이 상태로 비가 계속 온다면 출근해 운동장에서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어려울 것 것이다. 오후에는 특별 강사 강의가 있어 수업이 여유롭다. 배드민턴을 치고 돌아오면서 비가 그쳐서 묵주기도를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짧게 기도했다.

 어제는 크고 작은 일들이 많아서 유방암 카페도, 검색도 잘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어 날씨를 체크하는 데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황은 변하지 않는데 마음은 어찌 이리 유동적일까. 행복한 마음을 그대로 붙잡아 두고 싶은데, 이 놈도 어느 센가 속절없이 숨어버리겠지.

 묵주를 챙긴다는 게 깜빡해서, 손으로 수를 세면서 천천히 걸으며 기도를 했다. 비가 왔는데도 공기는 뜨거웠다. 바람이 불지 않아서 마스크가 답답했다. 여전히 완벽한 묵주기도는 어려웠다. 하지만 조금씩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 거 보니 적응한 것 같다.


#일곱 째날.(수요일)


 어제는 아랫지방에 큰 비가 내렸다는데, 오늘은 여기도 호우주의보가 내렸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에는 약하게 비가 내리는 듯 했으나 굳이 창문을 열어 비를 확인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배드민턴을 못 칠 것 같아서이다. 어제는 잠을 설쳤다. 남편은 부서 이동으로 회식에 갔는데 11시가 넘도록 연락이 없었다. 기다릴까, 잘까 하다가 그 사이쯤. 불을 켜놓고 묵주를 든채로 잠이 들었다. (묵주기도 완성 못함, 거의 주님의 기도할 때 잠 듦.) 12시가 좀 넘어서 전화기가 울려서 이제 돌아온다는 연락인 줄 알았는데, 전화를 받으니 남편 동료의 목소리가 들렸다. 남편이 너무 취해서 데리러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귀찮다는 마음과 동시에 지금 저렇게 술이 먹고 싶을까, 싶었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아내의 마음과는 달리 이 남자는 너무 태평한 거 아닌가. 남편이 나 때문에 힘든 것이 싫다가도, 무심한 것 같으면 서운해지는 모순적인 감정이 들었다. 비가 오는 줄 몰랐다가 우산을 가지러 한번도 16층까지 올라와 다시 내려왔다. 초조한 마음과는 달리 몸은 굼띠고 할 수 있는 일은 적었다. 인적이 뜸한 곳이라 잘 오지 않는 택시를 기다리면서 짜증은 점점 커졌다. 이곳 지리가 익숙하지 않은 나는 '종로맥가'라는 상호명을 '종로내과'로 잘 못 알아듣고 아무리 검색을 해도 알 수 없는 곳으로 오라는 동료의 호통 소리에 기분이 더 상했다. 아니 종로와 상관도 없는 시골 촌구석에 무선 '종로'라는 상호명을 쓰는지. 행선지를 아무리 검색해도 안나오니 카카오 택시도 못부르고 마냥 기다리고 있는데 기적처럼 택시가 왔다. 다행히 택시기사님은 상호명을 알고 계셔서 잘 도착했다. 기사님에게 넉넉히 요즘을 건네고 기다려달라고 말씀 드린 뒤, 호프집으로 들어가니 남편과 동료 2명이 있었다. 나보고 맥주나 마시고 가라는 말에 "저 암환자예요. 다음 주가 수술이라고요." 라고 쏘아 붙이고 싶었지만 "택시가 기다려서요."하고 남편이 술값을 내는 것을 기다렸다가 데리고 나왔다. 몸도 못 가누고 순한 아이처럼 끌려오는 이 남자에게 속이 터졌다가, 넘어져서 생긴 등의 상처를 보고는 기가 찼다가, 결국에는 옷도 못 갈아 입고 팬티만 입고 잠든 남편에게 짠한 감정을 느꼈다. 내가 항암 치료에 들어가면 데리러 가지도 못하겠지. 특히나 이런 비가 오는 밤이면. 덕분에 오늘은 아침 운동은 패스다. 오랜만에 7시까지 잠을 자고 아침도 차리지 않고 삶은 계란과 야채로 해결했다. (남편은 패스-)

 어제의 행복한 마음에 비례하듯 오늘은 기분이 좀 다운되었다. 이유는 남편도 있겠지만 몇 가지 더 걸리는 것이 있었다. 어제 학교에서 나를 대신할 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너는 이제 끝이야, 라는 선고를 받는 것 같았다. 인수인계를 하는 기분이 생경했다. 서러운 건지, 싫은 건지, 쓸쓸한 건지, 알 수 없는 감정에 이름을 붙이기 싫었다. 그렇다면 더욱 그 감정에 매몰될 것 같아서이다. 선생님은 좋은 사람 같았다. 호감형이고 서글서글한 남자 선생님이라 아이들도 좋아할 것 같았다. 그래서 더 싫었다. 내 자리가 빨리 지워질 것 같아서 일 것이다. (이런 못난 마음도 하나님이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다.) 또 도서대출증을 만드려다가 실패했다. 월요일은 휴관일이어서 못해 화요일에 다시 갔다. 담당하시는 분에게 인터넷으로 미리 가입하고 왔다고 했는데 그건 다른 도서관이었다. 당당하게 가입하고 왔어요-했는데 다시 도서관 컴퓨터로 가입을 했다. (조금 머슥했다.) 그리고 만드려고 했더니 주민등록증에 주소가 미기입되어 있어 등본이 필요하단다. 되는 일이 없구만. 사실은 그런 일은 일부인데도 그런 생각이 들어버리면 곤란하다.

 아침에 출근을 해서 학교에 왔더니 오늘 수업교환한 것을 잊고 있었다. 공료롭게도 이 반은 2, 3교시를 연달아 국어 수업을 하게 되었다. 1시간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게 하려고 했는데, 바꾸기로 한 시간에는 학기말이라 영화를 보여주는 모양이었다. "왜요?", "왜 또 국어해요?"라고 하는 학생의 말에 "선생님이 다음 주에 병원게 가거든"하고 답했다. "또요? 아-." 아이들이 내 사정을 알리도 없건만, 야속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 이 놈아. 이제 수업 바꿀일 없을 거다. 국어 선생님이 바뀌니까- 하고 속으로 내지르고 만다. 헛헛한 가슴은 어쩔 수가 없지만.
 1-4교시까지 내리 수업을 하고, 점심 지도를 하고 남은 공강시간. 묵주를 챙겨 들고 운동장으로 나왔다. 흐렸지만 비가 내리지는 않았다. 어제보다는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천천히 운동장을 돌면서 기도문을 외웠다. 하는 중간 갑자기 울음이 나왔다.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그랬다.

 집에 돌아오면서 결국 도서대출증을 만들었다. 어제보다는 선선한 날씨에 걸어가기가 편했다. 혼자 돌아가는 시간, 기분은 차차 좋아져 원상태로 돌아가고 있었다. 교사라는 자리와 멀어져서 그런가. 뚜벅뚜벅 혼자 걷다보면 내가 집착하는 것들이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일까. 마음은 발걸음처럼 가벼워졌다.

 부산에는 비가 많이와 야구가 우천 취소되었다. 남편의 여름 옷들의 택배가 도착했다. 흡족해 하는 남편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야구가 취소된 것은 아쉽지만, 그것을 기회로 남편은 야간 배드민턴을 제안했다. 아침에 운동도 못했으니 서둘러 저녁을 먹고 라켓을 챙겼다. 가느다란 비가 내리고 있는데다가 어둑어둑해 공이 잘 보이지도 않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땀인지 비인지 모를 액체로 몸이 촉촉히 젖었다. 악조건일 수록, 서툴수록 실수가 잦았기에 더 많이 웃을 수 있었다.


"배드민턴에 대한 재미를 너무 늦게 알았네요."


내가 말했다. 솔직한 마음이었다. 하지만 유방암이 아니었다면 배드민턴도 없었을 것이다. 늦었을 때가 가장 빠르다고들 한다. 하지만 박명수는 늦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고 말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늦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적어도 시도는 했다는 것이리라.


샤워를 하고 조금 이른 잠자리에 들었을 때 남편이 같이 묵주 기도를 하자고 해서 같이 한 구절씩 한 구절씩 돌아가면서 말하다가 3단 정도에서 잠이 들었다.


#여덟 째날.(목요일)


 내일은 코로나 검사를 위해 조퇴를 하기도 하고, 수업도 많아 오늘 여러가지 업무를 처리했다. 41조 연수도 먼저 달고, 수업 교환도 다 조정하고, 방학 전까지 맡아 주실 부담임 선생님께 알릴 사항을 정리해서 메시지를 보내고, 자리와 사물함을 정돈하고, 2학기에 오시는 선생님께 전달 사항도 정리하고, 학급비도 정산하고 영수증을 행정실에 제출했다. 내일은 학교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반납해야 겠다.

 내일은 마지막 출근 일이다. 학생들에게 내가 아픈 사실을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교무실 선생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말해야 한다는 사람이 1명, 안해야 한다는 사람이 1명, 애매하네-가 3명이어서 한 하기로 했다. 나중에 학생들이 개인적으로 물어온다면 말해도 되겠다 정도로 정리하였다. 모두가 찬성하지 않는다면 안하는 것이 안전하다.

 부담임 선생님께 메시지를 드렸는데,


'아이들이 제가 조회 시간에 들어가면 한숨을 쉬어요.'


라고 메시지가 와서 눈물이 불쑥 나버렸다. 오늘 묵주기도를 할 때는 우리 반 아이들을 위해 기도해야 겠다.이제는 습관처럼 운동장에 나와 걸으며 묵주기도를 했다. 30분 남짓 기도를 하고, 교무실로 돌아와 일을 마무리하고 마주한 7교시. 7교시는 동아리 시간인데 어디로 가야하는 지 모르는 아이들이 있어 가라고 안내를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말했다.


"선생님 아까 운동장 걸으셨죠?"

"어. 맞아. 할 일 없어 보였어?"

"아니요, 시 같은 거 떠올리시는 것처럼 보였는데요."


빈 운동장을 걸을 때마다, (더워서 그런지 장마기간이어서 그런지 늘 운동장이 비어 있었다. 이 또한 감사한 일이 아닌가.) 학생들이 내 모습을 보는게 아닌가 싶었는데 (꼭 공부하기 싫은 학생들은 운동장을 보고 있지 않은가!) 그런 학생이 있었구나. 시를 떠올리는 것 같다는 표현이 싫지 않았다. '기도'라는 것도 어쩌먼 주님을 향한 '시'가 아니겠는가.


오늘은 성당 새신자 교육이 있는 날이어서 평일 미사를 드리고 이어서 있는 교리반 수업을 들었다. 오늘 강의 내용은 '성사'에 관한 부분으로 세례와 견진 성사에 대한 부분을 자세하게 배웠다. '세례'란 '씻는 예식'으로 그동안의 죄를 씻고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개신교에서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그것은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뿐 기억에 없으니 별일이 없다면 나는 8월에 세례를 받게 된다. '새 사람으로-' 새 사람이 되고 싶다. 유방암을 떨쳐내고 싶다. 좀 더 강해지고 싶다. 마음에 희망을 품고 살고 싶다. 내 작은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면서 살고 싶다. 나의 안위나 게으름으로 적당히 타협하며 살아왔는데 더 '진심'을 발휘하며 살고 싶다.


'학생'은 꽤 오랜 기간 나의 '일'이었다. 늘 학생과 함께 있었지만 학생을 위해 기도한 적은 손에 꼽았다. 그때 그때 학생들을 걱정하고 정성을 기울였지만, 그건 어쩌면 나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였을 지도 모른다. 일을 잘 하는 사람, 성실한 사람이 되고 싶은 욕망으로 학생 한 명, 한 명을 '생명'으로,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자로 생각하지 않고 쉽게만 바라보지 않았나 반성했다. 그런 일은 내 자신의 한계를 내 스스로 정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는 여기까지밖에 못 해, 이게 한계야. 더이상은 힘들고 번거로워. 이만하면 할만큼 했어. 그런 말로 아이들과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그런 거리감에 학생들은 나를 편하고 친절한 교사라고 생각했지만, 과연 절실한 아이들을 지나쳐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마음에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린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성경교리 공부를 하면서 견진성사까지 살 수 있을까- 같은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임박한 이별, 그리고 수술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 잡혔기 때문일 것이다. 간간히 눈물을 흘리며 강의를 듣고, 집에 돌아와 근력 운동을 하였다. 남편과 같이 묵주기도를 했는데 남편은 1단 시작하는 주님의 기도에서 넉다운 되었고 나도 1단을 하다 잠이 들어버렸다.


#아홉 째날.(금요일)


9번째의 묵주기도. 앞으로도 묵주기도는 꾸준히 하려고하지만 이 글은 마지막으로 하려고 한다. 처음 묵주기로를 시작하면서 신부님이 그랬다. '9일의 기도'를 하면 은총을 받는다고.


특별한 은총을 위한 가톨릭 9일기도

"세번의9일기도를 바쳐라 그러면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으리라"

성모님께서 1884년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끊임없이 기도한 이탈리아 나폴리의 소녀 앞에 발현하여하신 말씀입니다.

오래전 한소녀가 비신자였을때 옆집 가톨릭 신자 가정에 같은 신자 여럿이 매일 모여 기도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 집에 안좋은 일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그 일 때문에 이웃에 사는 신자들이 매일 시간을 내서 54일간 그 가정을 위해 기도를 같이 드립니다.

놀라운것은 정말 54일간 기도가 끝날즈음 그 집의 불화가 끝이 났는데 참 신기한 생각도 들었고 이웃을 위해 긴 기도를 같이 해준다는 사실에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그때 그 소녀는 가톨릭신자가 아니었는데 그 소녀의 눈에는 기도하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답고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그때의 그 기도가 9일기도였던 것이었습니다.

[새신자 교육 카톡방에서 발췌]


그래서 시작하게 된 묵주기도. 이제 9번 째 날을 맞았다. 오늘은 5교시만 하고 코로나 검사를 위해 보건소에 가야해서 조퇴를 했다. 아침에는 수업교환에 도움을 주시고, 방학전까지 수고해 주시는 부담임 선생님과 우리 교무실 식구들에게 간식을 선물했다. 3교시 중에 4교시는 수업이었고, 나머지 한 시간동안 짐도 싸고 못버린 물건들도 버렸다. 교감, 교장 선생님께 인사도 드렸다. 시간이 너무나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교무실 분 중 한 분이 그래도 아이들한테 인사를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점심시간에 말씀을 하셔서, 결국 부장님과 상의를 해 결정하기로 했다. 부장님께서는 아이들도 납득을 하기 위해서는 인사를 하는 것이 맞다고 하셔서 5교시 마치고 수업시간에 살짝 양해를 구하고 들어가 인사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아이들은 소란스러웠다. 특히 영어듣기 연습을 한다고 해서 학생들이 이거 성적에 들어가는 거냐고, 결과가 나오냐고, 어떻게 하는 거냐고 계속 물어왔다. 진정시킨 후 첫 문자을 말하는데, 단단히 먹은 마음이 무색하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제가 요즘 병원에 가는 일이 많았잖아요."


아이들 중 몇이 고개를 끄덕했다.


"제가 이제 치료를 해야해서 여러분들 담임교사를 더이상 못할 거 같아요. 2학기에는 새로운 선생님이 담임을 하실 거에요. 제가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정말 좋은 분으로 해달라고 했으니, 남은 기간 새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늘 건강하고 행복하기를 바래요."


아이들이 당황하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서둘러 교실을 나왔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밖에 기다리시던 영어 선생님이 사정을 아시니 잘 해결해 줄 거라고 믿고 교무실에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쫒겨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탈락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환자였지만, 그동안은 환자 같지 않았지만 이제야 시작이었다. 당연했던 것들이 당연해지지 않는 그 시작.


 내가 짐을 한가득 들고, 울면서 차에 타자 남편은 당황한 눈치였다. 알고 보니 오늘이 마지막 출근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것이다. 내가 말 안하면 당연히 모르겠지. 나는 왜 말했다고 생각을 했는지. 장마철이라지만, 비는 오락가락 했다. 보건소로 가는 하늘은 쨍하게 맑았다. 혹시, 코로나여서 수술이 밀리는 것은 아니겠지. 그런 새로운 걱정을 하며 울다 말다 하며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벌써 4번째 검사이다. 결혼 전 2번, 결혼 후 학교에서 확진자가 나와서 한 번, 입원을 위해 또 한 번. 검사라는 건 할 때마다 떨린다. 대기 줄도 없이 5분만에 검사를 끝내고, 세탁소에도 갔다가, 남편 모낭염 때문에 피부과도 갔다가, 보양식으로 장어를 먹으러 갔다. 맛있게 장어를 먹고 집으로 돌아와 저녁 배드민턴 경기를 했다. 이번 주 초반은 비가 와서, 야구단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나와서 야구는 계속 취소상태였다. 화요일부터 경기를 안하니 저녁시간이 여유로웠다. 하지만 슬슬, 야구 금단 현상이 일어난다.


덥기도 하고, 습하기도 해서 땀이 뚝뚝 떨어졌다. 경기는 처음으로 스코어제로 했는데, 내가 이겼다. 야호. 이런 저런 일들이 많아서 기도는 자기 전에야 할 수 있었다. 남편은 눕자마자 잠이 들고 나는 오늘의 기도를 올렸다.


기도를 하면  수록 기도의 대상이 늘어났다. 기도의 첫 번째는 나의 회복이었으나, 그 다음이 자꾸 늘었다. 원래 나의 지인이었거나 카페나 블러그, 브런치를 통해 알게  다른 아픈 사람들의 회복, 그들을 간호하면서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기도,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에 대한 위로, 교단에서 퇴출당할 위기에 있는 목사님과 신학생의 복권, 아픈 부모님을 봉양하고 있는 교우들, 실명의 위기 속에서도 신학을 공부하는 교우, 우리반 학생들, 같은 교무실 사람들의 평안. 하나하나 기도해야하는 목록들이 늘어났다. 어떤 날은 생각나지 않는 사람도 있었지만 나의 하나님은  아실 거라고 믿는다. 매일 묵주기로를 한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마음이 안정된다거나 깨달음이 오는 것은 아니었다. 습관처럼 기도시간을 만들고 나와 타인, 하나님을 생각하는 시간이 생겼을 . 한가지 효능이 있다면, 자면서 묵주기도를 하면 기가 막히게 잠이  온다는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언제 이렇게 주님께 기도를 했나 싶다. 나의 능력 밖에 일은 그저 기도하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것. 나로는 못 이룰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 앞에 나는 그저 겸손하고 나약한 인간일 뿐. 그저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비는 마음'이 생겼음에 감사한다. 그동안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신을 과신하며 살았는 것 같다. 내가 노력하면, 내가 어떻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고 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자만이고 오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도는 낮아짐이었다. 약한 자의 절규였다. 그리고 그 속에도 나에게 주어진 것에 대한 감사와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이 함께 했다.


이제 다음 주 화요일이면 나는 수술대에 눕는다.

마취하기 전에도 나는 묵주기도를 하고 있겠지. 누워서 하는 묵주기도가 늘 그렇듯, 나는 금방 잠이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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