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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나 Nov 29. 2021

식물화가의 사진첩

식물을 해치지 않고 기록하는 법

 사진첩에 꽃 사진이 늘어간다는 건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라던데, 내 휴대폰 사진첩은 이미 90%가 식물 사진이다. 사진첩의 식물 사진 점유율로 나이를 정한다면 아마 중년을 훌쩍 넘기지 않을까 싶다.

 길을 걷다가도 식물이 보이면 자연스럽게 눈앞에 사각형의 프레임이 잡힌다. 마음에 와닿은 식물의 순간을 포착하면 주저 없이 휴대폰을 꺼내 든다. 한 두 장 찍고 마는 것이 아니라 적게는 5장에서 많게는 20장 이상 찍는다. 나중에 사진만 보고도 식물을 파악할 수 있으려면 최대한 많이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둬야 한다. 산책하면서는 아예 자리를 잡고 붙어서 세월아 네월아 끊임없이 셔터를 누른다.


 실물을 관찰하며 그리는 게 가장 좋지만 내가 원하는 식물을 매번 구할 수 없을뿐더러 멀쩡한 식물을 가져다 그리는 건 내 몫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식물을 채취해서 그리는 건 정말로 필요한 곳에서 전문적인 손길에 따라 식물의 보존과 보호를 위해 행해져야 하기 때문이다. 식물의 아름다움을 그림을 통해 많은 사람과 나누고픈 마음으로 그리지만, 어쨌든 나의 개인적인 바람과 욕심에서 시작된 것이기에 살아있는 생명을 꺾으면서까지 그 마음을 채우고 싶지 않다. 식물을 취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식물을 있는 그대로 담으려 노력한다.


 안 그래도 이미 휴대폰이 식물 사진으로 포화상태인데 숲으로 출근하면서 사진첩 용량이 매일 간당간당한다. 사진첩을 제외하고 다른 부분에서 최대한 용량을 줄이면서 사진을 채워 넣고 있다. 사진을 채우는 만큼 그림을 그리는 손의 속도도 빨라지면 얼마나 좋을까!


곰솔누리숲의 들깨풀

 숲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있어서 무턱대고 소재 사진을 찍으면 스케치할 때 눈 빠진다. 이 줄기가 이 녀석 건지, 저 이파리가 저 녀석 건지 헷갈린다. 그래서 미색의 종이를 배경으로 두고 찍으면 좋다. 흰색 종이는 빛 반사가 심해 식물 본래의 색을 흐릴 수 있어 미색 종이를 사용한다. 보통 작품용 종이로 쓰는 제도 패드 북 표지를 재활용하는 편이다. A4 사이즈의 두꺼운 종이라 간편하고 튼튼해서 가지고 다니기에 좋다.


 주말을 보내고 출근하는 월요일, 숲에는 그사이 보랏빛 물이 들었다. 못 보던 작은 꽃들이 곳곳에 피어있다. 꽃 앞에 쭈그려 앉아 이리 보고 저리 보고 꽃과 눈 맞춤 하는 시간을 갖는다. 카메라를 꽃 가까이에 쭉 들이밀고 초점을 맞추어 찰칵! 워낙에 작은 꽃이라 카메라가 초점을 잘 잡지 못한다. 이럴 때 배경지가 필요하다. 식물의 뒤쪽으로 배경지를 두고 휴대폰 화면을 터치하면 그제야 또렷하게 꽃을 잡아낸다.

 미처 배경지를 챙기지 못할 때는 손을 활용한다. 손으로 꽃을 감싸듯 배경을 잡아주면 된다. 손톱보다도 작은 꽃송이지만 꽃이 갖추어야 할 모든 걸 가지고 있다. 꽃잎, 꽃받침, 암술, 수술까지. 아가의 눈, 코, 입 손가락, 발가락을 살펴볼 때 느끼는 경이로움을 작은 꽃에서도 느낄 수 있다.


 ‘예쁘고 소중하다, 너.’


곰솔누리숲의 이질풀

 식물을 해치지 않고 조심조심, 하지만 꼼꼼하게 촬영한다. 최대한 지면과 일직선이 되는 각도로 찍는다. 사진도 빛과 각도에 따라 왜곡이 생기기 때문에 그 오차를 줄이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분명하게 초점을 잡고 있는 지를 꼭 확인한다. 초점을 놓친 채로 찍으면 확대했을 때 깨져버려서 나중에 디테일을 확인하기가 어렵다.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전체적인 모습, 꽃, 꽃받침, 줄기, 잎 등 전체와 부분을 놓치지 않고 여러 번 촬영하는 것이다. 위에서 본 모습, 양쪽에서 본 보습 등 사방에서 바라보는 모습도 찍는다.  


 간혹 지인들이 왜 이렇게 똑같은 사진을 여러 장 찍느냐고 묻지만 내게는 전부 다른 사진이다. 구도는 같지만, 초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피사체를 잡을 때 모든 부분을 내가 원하는 만큼 디테일하게 잡을 수 없기 때문에 식물의 부분을 나누어서 각각 초점을 잡아서 찍는다. 꽃을 찍더라도 중앙의 암술과 수술, 꽃잎, 꽃받침, 줄기, 잎사귀, 잎자루 등으로 구역을 나누어서 하나하나 초점을 잡아서 찍는다. 번거롭지만 수시로 식물 사진을 찍기 때문에 눈앞의 식물이 어떤 형태로 자라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를 기록해두기 위해서다. 지금은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막상 나중에 스케치하고 채색할 때는 처음 보는 것처럼 까맣게 잊어버리니까.


이름마저 귀여운 쥐꼬리망초

 한껏 쭈그린 상태로 오른손엔 휴대폰을 쥐고, 왼손으로는 배경지를 잡는다. 왼팔을 쭉 뻗어 배경지를 갖다 대고 오른팔은 지면과 수직을 이루고 식물과 수평을 이루는 각도를 찾는다. 상체는 비비 꼬이고 하체는 스멀스멀 쥐가 날 것 같다. 그 와중에 엄지손가락을 뻗어 초점을 잡고 셔터를 누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어깨와 목이 끊어질 것 같을 때쯤 너덜너덜한 몸으로 일어난다.

 다행히 다 잘 찍혔다. 찍은 사진을 확인하면서 부족한 컷이 없는지 점검을 한 후에야 자리를 떠난다. 들풀과 들꽃은 이름을 모르는 경우가 많아 사진을 찍고 바로 식물 이름 찾아주는 앱에 올린다. 30초도 안 되어서 팝업 알람이 띠링 쥐꼬리망초. 이름도 꽃을 닮아 귀엽네. 가을 숲에서 만난 보랏빛 꽃. 언제 그릴지 장담할 수는 없지만, 꼭 그려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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