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eah Aug 02. 2018

4월 23일, 중국에서
누군가가 쏘아올린 작은 트랜잭션

안내: 이 글은 4월 24일 해시드포스트(http://www.hashedpost.com/2018/04/hashed-report-4-23.html)에 업로드한 글을 브런치에 아카이빙한 것입니다.

우리나라 시간으로 2018년 4월 23일 오후 1시 2분 경,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한 트랜잭션이 기록되었습니다. 한 계정이 자신의 계정으로 0 이더를 보낸 트랜잭션에 불과할 뿐 금융 거래로서의 의미는 없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는 굉장히 특별합니다.

이더스캔에서 본 해당 트랜잭션

퍼블릭 블록체인의 모든 트랜잭션은 블록 익스플로러(block explorer)를 통해 누구나 쉽게 열람할 수 있습니다. 이더리움 블록 익스플로러의 일종인 이더스캔(etherscan.io)에서는 어떤 계정이 얼마를 보냈는지, 가스비(트랜잭션을 처리하는 대가로 지불하는 수수료)는 얼마나 지불했는지, 트랜잭션을 언제 실행했는지 모두 볼 수 있습니다.

자주 사용되지는 않지만 이더리움을 전송할 때 트랜잭션 데이터를 선택적으로 입력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이더리움 지갑인 메타마스크의 send 창을 보면, 이더리움을 보낼 주소와 전송량을 입력하는 칸 외에도 'TRANSACTION DATA (OPTIONAL)' 칸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에 16진법으로 데이터를 입력하면 트랜잭션과 함께 영원히 이더리움 블록체인에 기록됩니다.

이더리움 지갑의 일종인 메타마스크의 전송 화면.

이 트랜잭션 '0x2d6a7b0f6adeff38423d4c62cd8b6ccb708ddad85da5d3d06756ad4d8a04a6a2'가 가지는 진정한 의미는 바로 인풋 데이터에 있습니다. 16진법으로 표기된 이 데이터를 UTF-8로 변환하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나타납니다.

인풋 데이터에 기록되어 있는 글을 우리말로 짧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문은 여기에서 직접 변환하여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북경대에 재학 중인 위에신(岳昕)입니다. 지난 9일, 다른 7명의 학생들과 함께 대학 측에 성폭행 사건에 관한 정보공개청구서를 제출했습니다. 그러나 정보공개청구서의 제출 이후 학교 측으로부터 "네가 졸업할 수 있을 것 같냐", "엄마와 할머니가 네가 이러고 있는 것 아느냐" 등 협박에 가까운 지속적인 압박과, 정보를 공개할 수 없다는 실망스러운 답변을 받았습니다. 23일 새벽 1시, 한 교직원 분이 저의 어머니와 함께 갑자기 기숙사에 찾아와 저의 핸드폰과 컴퓨터에 있는 정보공개청구서와 관련된 정보를 모두 삭제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어머니는 큰 충격을 받으신 상태고, 저는 이러한 학교의 대응에 화가 나, 다음의 다섯 가지 내용을 요구합니다. (후략)

(주: 과거 북경대학교에 재직했던 남성 교수 선양(沈阳)은 여학생을 성폭행하여 끝내 자살에 이르게 했다는 혐의를 받아 소속된 대학에서 사임했던 사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대학 측은 학생들의 정보공개청구에도 불구하고 해당 교수의 사임 사실을 제외한 나머지 정보를 일절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특히 웨이보·위챗 등의 대형 SNS 서비스와 북경대 게시판 등지에 공유되던 관련 글들이 빠르게 삭제되고 있던 상황입니다.)

관련 게시물을 검색해 접속하면 404 에러 메시지가 뜬다. 왼쪽부터 중국 사이트 Zhihu, Baidu, Baidu.

비록 포털 사이트에서는 관련 글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지만, 누군가가 이 글을 영어와 중국어로 이더리움 트랜잭션 인풋 데이터에 고스란히 담으면서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이제 전세계 사람들이 누구나 이 글을 읽어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포스팅을 작성할 당시 이미 해당 트랜잭션은 10,000번 이상의 블록 컨펌을 받았으며, 이제 그 누구도 내용을 변경하거나 삭제할 수 없습니다. 이더스캔에는 "블록체인에는 404가 없다(区块链没有404). 당신을 지지한다" 등 수많은 코멘트가 달렸고, 해당 계정으로 이더리움을 보내며 응원과 연대의 말을 남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해당 이더리움 계정 소유자는 이튿날 다른 셀프 트랜잭션 하나를 만들어 "나는 위에신이나 그녀의 친구가 아니며, 그저 블록체인이 할 수 있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녀의 글을 저장한 것이다. 기부할 필요는 없다."는 인풋 데이터를 남겼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잊혀져가던 성폭행 사건은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언론과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블룸버그 테크놀로지에 따르면, 특히 북경대학교가 수 십 년간 중국 고위 간부를 배출한 점을 고려해볼 때 중국에서 권위에 대항하는 움직임이 표면으로 드러난 것은 굉장히 드문 사례라고 합니다. 중앙화된 주체가 엄격하게 검열하는 게시물을 전세계 누구나 볼 수 있게 한 이 트랜잭션은 단돈 54센트(약 600원)을 가스비로 지불했습니다.

만약, 누군가 이 일을 작정하고 덮고자 한다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우선 중국 정부에서 이더스캔 사이트에 접속할 수 없도록 규제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이더리움 클라이언트를 통해 직접 모든 트랜잭션을 조회할 수 있기 때문에 그다지 효과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혹은 중국에서 이더리움 네트워크 전체에 대한 접근을 불법으로 규정해 확산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트랜잭션 조회를 막기 위한 비용으로는 너무 막대한 비용이며, 사람들은 이더리움 외에도 다른 많은 퍼블릭 블록체인들을 알고 있습니다. 블록체인의 tamper-proof 속성 때문에 한번 기록된 트랜잭션은 변경되지 않습니다. 이와 관련해 이더리움의 창시자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 또한 지난 4일 서울에서 열린 분산경제포럼 2018에서 "지금 블록체인은 아마존이 사용하는 중앙화된 클라우드 시스템보다 효율성이 100만 배 정도 떨어질 것이지만, 블록체인을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검열에 저항하기 위해서"라고 언급한 바 있습니다.

에필로그: 블록체인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며

2009년, 비트코인의 등장 이후 블록체인 기술은 탈중앙화된 미래를 가져올 기술로 각광받아왔습니다. 특정 기업이나 조직이 거대한 공룡처럼 성장하는 구조가 아니라, 가치에 기여한 사람들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기여한 만큼 수혜받을 수 있는 새로운 경제∙사회 모델을 가져올 기술로 기대되고 있습니다.

비트코인의 제네시스 블록(genesis block)은 다른 여느 블록과 마찬가지로, 언제 어디에서나 조회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네시스 블록의 코인베이스에서 비트코인 창시자인 사토시 나카모토의 철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남용된 중앙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 구제금융을 비판하며, 중앙화된 기관의 개입 없이 자체적인 통화를 발행해 모두가 평등하게 거래를 조회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트코인의 제네시스 블록. "더 타임즈 2009년 1월 3일. 총리가 두 번째 은행 금융 구제에 직면하다"

트랜잭션 '0x2d6a7b0f6adeff38423d4c62cd8b6ccb708ddad85da5d3d06756ad4d8a04a6a2'는 중국에게, 나아가 전세계에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요? 단순히 중앙에 의한 검열에 저항하고 한 사람의 표현의 자유를 되찾는 것을 넘어서, 한층 더 발전된 인권과 평등의 시대가 개막되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4월 23일에 기록된 한 이더리움 트랜잭션이, 우리가 의도하지 않았던 분야에서 꼭 필요한 사람에게 사용된 또 다른 블록체인 역사의 한 페이지로 기록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