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8. 회픈-데티포스-셀포스-뮈바튼
요쿨살롱 빙하를 본 후 회픈 캠핑장으로 이동했다. 아이슬란드의 캠핑장은 밤 늦게 도착해서 아침 일찍 출발하면 돈을 안 낸다는 얘기를 들어서 한번 시도해볼까 했지만 리셉션이 밤 열 시가 넘어야 퇴근하기 때문에 이론처럼 쉽지는 않은 얘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슬란드 날씨가 한여름에도 워낙 추워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해야만 잠을 잘 수 있었기 때문에 샤워는 필수이다. 대부분 샤워장은 유료인데 이곳은 50 크로나 동전을 넣으면 2분 동안 샤워를 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보통 샤워장은 5분 정도 시간이 주어졌는데 2분이면 아무리 빨라도 도저히 샤워를 끝낼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그런데 동전을 찾아 보니 딱 50크로나 짜리 하나 밖에 없었다.
리솁션이 닫았기 때문에 잔돈을 교환할 수도 없었는데 권셰프는 지폐를 들고 돈 바꾼다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나와 정차장은 고민하다가 50크로나 짜리 하나로 둘이서 같이 샤워하기로 했다. 정차장과 남자끼리 둘이 벌거벗고 샤워하려니까 어색한 것도 문제였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2분이란 시간은 딱 비누칠 하고 씻기 직전까지만 가능한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둘 다 온몸에 비누칠을 하고 막 씻으려는 데 물이 멈춰버려서 망연자실하고 있는 찰라 어디선가 권셰프가 동전을 구해와서 마저 씻을 수 있었다. 그 때만큼 권셰프가 멋져 보인 적이 없었다.
오늘은 데티포스를 향해 이동하는 날이다. 데티포스는 아이슬란드의 많은 폭포 중에서도 가장 기대가 되는 곳이다. 거칠고 남성적인 이미지의 폭포로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나온 곳이다.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열심히 돌아가며 운전했다. 중간에 왠지 고기가 있을 거 같은 멋진 해변을 발견해서 낚시대를 던져봤지만 역시 소득은 없었다. 세 나라를 거쳐 왔지만 잡은 거라곤 멸치 몇 마리 밖에 없었다.
한참을 가다 보니 검은 자갈로 이루어진 해변이 나타났는데 한국 어디에도 이런 곳이 있다고 들은 거 같다. 자갈은 바다로 갈수록 점점 작아졌다.
아이슬란드의 동쪽은 사람들이 별로 안 다니는 곳인지 1번 국도마저도 비포장인 구간이 꽤 길게 펼쳐졌다. 좀 더 깊이 내륙으로 가니 경치가 급변했다. 검은 모래 사막이 끝없이 펼쳐져 있는데 마치 영화 오블리블리언에 나오는 외계행성 같은 모습이었다.
데티포스는 1번 국도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한참을 더 들어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는데 중간중간 낚시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탓에 데티포스로 향하는 갈림길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저녁 6시가 되어있었다.
갈림길에서 데티포스까지는 40km 남짓 남아 있었기 때문에 한 30분 정도면 여유 있게 도착하겠다 싶었는데 도로 상태가 점점 나빠지더니 급기야는 시속 20km 이상 낼 수 없는 지경에 도달했다.
느린 것도 문제지만 도로의 요철이 하도 심해서 우리가 탄 i10이 여기서 버텨줄 수 있을 지가 의심스러웠다. 애초에 4륜 구동이 아니면 들어오면 안 되는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입장료가 무료라지만 나라 전체의 최고 볼거리로 찾아가는 길도 제대로 포장이 안되어 있다는 것은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우리로 치면 불국사로 찾아가는 길이 온통 자갈투성이 비포장도로인 것이다.
반대편에서 흙먼지를 달리고 와서 쌩 하고 지나가는 4륜 구동 SUV 운전자들의 비웃음 섞인 눈길을 받아가며 엉금엉금 기어가다시피 해서 한 시간 반 만에 겨우 데티포스에 도착했다.
비록 가는 길은 짜증 났지만 도착해서 본 데티포스는 듣던 대로 압도적인 장관이었는데 특히 엄청난 수량의 흙탕물이 주는 남성적인 위압감은 대단했다. 이곳 폭포에는 안전 난간 같은 게 없어서 구경하다가 한발만 잘못 디뎌도 절벽 아래로 떨어질 수 있어서 조심해야 했다.
자연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좋지만 절벽 위에 사진 찍으며 ‘한 발만 뒤로 더..’를 두어 번 하다가는 만화처럼 절벽에서 떨어지기 딱 좋은 곳이었다.
날씨도 춥고 몸 컨디션도 안 좋았지만 데티포스 위쪽에 있다는 셀포스를 향해 30분간 더 걸어서 가 보았다. 셀포스는 데티포스에 비해 낙차는 좀 작지만 커튼처럼 길게 폭포가 펼쳐진 특이한 모습이다. 이곳의 경치 또한 남성적인 포스를 내뿜는 멋진 모습이었지만 너무 추워서 오래 있지는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미 너무 늦은 밤시간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잘 곳을 찾아야 했다. 너무 추웠기 때문에 데티포스 주변에서는 도저히 텐트를 칠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근처에 있는 미바튼 호수 지대로 이동하기로 했다. 온천이 있는 곳이라 아무래도 여기보다는 따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미바튼 호수지대로 가는 중간에 땅에서 올라오는 흰 연기로 가득 찬 곳이 나타났다. 몇 일 전 본 게이시르처럼 땅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는 곳이었는데 그 규모가 훨씬 큰 곳이었다.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에 좀 따뜻해질까 하고 격렬한 소리로 수증기를 뿜어내고 있는 곳에 손을 대 보았지만 그냥 미지근하고 계란 썩는 유황냄새만 코를 찔렀다. 낮이면 시간을 두고 봤겠지만 너무 어두워서 서둘러 미바튼 호수를 향해 갔다.
한참을 가다 보니 호숫가에 지열발전소인 것처럼 보이는 곳이 나타났는데 물 색깔이 게토레이 색깔과 비슷한 형광빛이었다. 아이슬란드의 유명한 온천인 블루라군도 지열발전에 이용하고 남은 물로 만든 노천온천이라고 하니까 아마도 비슷한 색깔일 것이다.
다만 차이라면 형광빛 호수에 펜스가 처져있고 해골 바가지가 그려진 표지판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기는 들어가면 안 되는 곳 같다. 추운 날씨에 호수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어서 어지간하면 들어가서 몸이라도 녹여 볼까도 생각해봤지만 왠지 해골 바가지 표지판에 진심이 담겨 있는 것 같아서 그냥 계속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밤 열 시가 넘어서야 겨우 미바튼에 있는 캠핑장에 도착해서 급하게 텐트를 쳤다. 어제 캠핑장에서 동전이 없어서 고생했는데 여기는 공짜라서 좋았다.
늦은 저녁을 준비하려고 일회용 바비큐그릴을 꺼내서 고기를 구우려고 하는데 관리인인듯한 아저씨가 와서는 잔디가 상한다고 옮겨달라고 부탁한다. 게다가 마침 비어있던 옆 텐트의 주인이 들어왔는데 자기 텐트로 연기가 온다고 짜증을 내서 다른 곳으로 옮겨서 고기를 구워야 했다.
혼자 큰 텐트를 치고 자는 할아버지인데 보기에도 괴팍하고 성깔 있어 보였다. 우리가 늦게 와서 연기 피우는 것이 일차적으로 잘못한 일이기 때문에 최대한 공손하게 죄송하다고 얘기하고 조심해서 식사 준비를 했는데 내가 또 지나가다가 할아버지 텐트의 고정 줄을 건드려서 텐트가 흔들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가 또 뛰쳐나오더니
“왜 남의 공간을 침범하는 거야?”
라며 난리다. 맞는 말이긴 한데 저렇게 늙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미찌한테 물린 자리는 점점 더 악화되고 있는 거 같다. 힘든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