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 베르겐
오늘은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노르웨이로 이동하는 날이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밥을 대충 먹고 짐을 싸서 나오니 주인 아저씨가 공항에 데려다 준다. 아저씨와 작별 인사를 하고 공항의 노르웨지안항공 체크인 기계로 체크인을 하려는데 뭔가 이상한 메시지가 뜨면서 체크인이 안 된다.
옆에 있는 직원에게 물어보니 항공편이 취소됐다며 고객상담실로 가 보란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어서 한참을 기다린 후에 상담을 했다. 제일 먼저 항공편이 취소된 이유를 물으니,
“아, 미국에서 노르웨지안 항공 비행기가 고장이 났는데 여유 비행기가 없어서 이 항공편이 취소됐어요.”
미국에서 비행기가 고장 났는데 왜 아이슬란드에서 노르웨이로 가는 비행편이 취소되는 건지 이해가 안 간다. 취소된 비행편의 손님들을 나누어서 다른 비행편으로 베르겐에 갈 수 있도록 재조정을 해주었는데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나는 코펜하겐 경유, 나머지 둘은 오슬로 경유로 베르겐에 가능 비행편으로 재조정해 주었다..
“베르겐에 예약된 렌터카 시간을 못 맞춰서 생기는 피해는 누가 보상하죠?”라고 내가 묻자,
“그건 본인이 알아서 하셔야죠”라고 말한다.
선진국의 항공사이니 뭔가 차원이 다른 고객 서비스가 있겠지 기대한 내가 바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 시간이 많이 지연될 예정이므로 일단 베르겐에 예약해 둔 렌터카 회사로 전화해서 사정을 얘기하니 차 찾는 시간 변경은 가능하지만 오늘이 토요일이라서 초과 비용(overtime charge)를 물어야 한다고 한다.
비용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일단 예약 시간을 변경했다.
재조정된 두 항공편 도착 시간이 3시 반정도로 비슷해서 나머지 두 명과 살아서 만나기로 하고 허겁지겁 수속을 접수했다. 코펜하겐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위성 와이파이사용이 가능하다고 붙어 있길래 신기해서 한번 써 보기로 했는데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지만 비행시간 내내 유용하게 정보를 찾을 수 있어서 좋았다. 덕분에 노르웨이에서의 여행 루트를 대충 확정할 수 있었다.
코펜하겐에 도착했지만 대기 시간이 그렇게 길지 않아서 공항 안에서 대충 점심을 먹고 좀 기다렸다가 다시 베르겐행 비행기를 탔다.
베르겐 공항에 도착해서 짐을 찾으러 가보니 아무리 기다려도 내 짐이 나오지 않는다. 언젠가 나에게 한번은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그 일이 지금 일어난 듯 했다. 짐이 분실된 것이다. 고객 오피스에 가서 확인해보니,
“흠, 어디에선가 짐이 분실된 거 같네요.”
“지금 어디 있는지 확인은 가능한가요?”
“그건 우리도 몰라요. 내일 비행기가 다시 들어오니까 그때쯤 연락해보세요.”
나는 화가 나고 황당하기도 해서 언성을 높이려 했지만, 옆에서 짐을 잃어버린 다른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조용조용 물어보고는 자리를 뜬다. 늘상 있는 일이라서 그런 건지 그냥 시민의식이 높아서 그런지 모르겠다.
내 배낭 안에 텐트와 침낭 등 캠핑에 필요한 장비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짐이 없으면 캠핑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나가서 좀 전에 도착한 일행들을 다시 만나서 사정을 얘기하고 의논했다.
애초 계획은 오늘 베르겐을 떠나는 것이었지만 어쩔 수 없이 베르겐 부근에서 하루를 묵어야 했다. 짐은 내일 전화해서 확인해보기로 하고 일단 예약한 렌터카를 찾으러 갔다. 노르웨이도 렌트비가 비싸기 때문에 최대한 싸게 예약하다 보니 유럽카라는 처음 들어본 브랜드의 가장 싼 차로 예약을 했다.
허츠는 그 시간에도 영업을 하고 있어서 허츠로 예약했으면 추가비용도 안 물었을 텐데 듣도 보도 못한 브랜드로 하니까 5만원 정도 추가 비용이 들어가게 되어서 기분이 별로 안 좋았다. 토요일 오후에 차를 찾는다고 추가비용을 내야 하다니.. 차를 내주는 청년이 추가 비용 때문에 자기도 미안했는지,
“차는 A1D5로 배정해 드렸어요.”
라고 선심 쓰는 투로 얘기한다. A1D5라는 모델도 있나? 직원이 나름 괜찮은 차로 준 것 같은 뉘앙스로 얘기하는데 못 들어본 차 모델이라 그냥 시큰둥하게 키를 받아서 차를 찾으러 갔다. 주차장에 가서 보니 우리가 탈 차는 아우디의 A1 모델이었다.
원래 아우디 모델은 잘 몰라서 내가 아는 아우디라고는 A4, A6, A8 등 짝수 모델들이었는데 A1이라는 모델도 있는 모양이다. 아마도 1에서 8까지 순서대로 좋은 차인가 보다.
해치백 스타일로 차 크기는 좀 작아 보였지만 애초에 우리가 예약한 제일 싼 차보다는 훨씬 좋은 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차가 부드럽고 힘있게 잘 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노르웨이는 과속 단속에 걸리면 엄청난 벌금을 문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그냥 최대한 살살 몰기로 했다.
짐을 잃어버리고 스케줄이 엉망이 되어서 기분은 안 좋았지만 베르겐 시내 구경을 하기로 했다. 베르겐은 그리 크지 않은 곳이라서 어시장을 중심으로 오래된 목조건물들을 보는 것이 거의 여행의 전부인 곳이다. 3년 전쯤 왔을 때 시간이 없어서 한 30분쯤 후다닥 보고 떠났던 기억이 있어서 오늘은 좀 찬찬히 보기로 했다.
베르겐 어시장을 구경하다가 간단히 식사를 하기로 하고 적당한 곳을 찾는데 한국말로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소리 나는 곳을 봤더니 한국인 직원이 호객행위를 하고 있다. 각 나라별로 담당이 한 명씩은 있는 거 같은데 이 먼 곳까지 와서 한국말을 들으니 거기서 안 먹을 수가 없다.
노르웨이 물가가 워낙 비싸니 싸게 주지는 못하겠지만 같은 동포이니 양이라도 많이 달라고 했다. 어쩌다 여기서 일하고 있냐고 물으니 베르겐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인데 아르바이트로 하는 일이라고 한다. 푸짐하게 해산물을 차려 줬는데 이것 저것 신선한 먹을게 많다.
특이하게 고래고기 스테이크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어디서 고래고기를 가져오는지 알 수 없었다. 고래고기는 일본만 먹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1986년부터 상업적 포경이 금지되었지만 노르웨이와 아이슬란드는 포경금지를 거부하고 상업적 포경을 계속 하고 있고, 일본은 연구목적을 내세운 ‘과학적 포경’을 계속하고 있다고 한다.
노르웨이는 1993년부터, 아이슬란드는 2009년부터 포경을 하고 있는데 국제포경위원회가 두 나라를 제명하지 않는 이유는 포경 현황을 보고 받으며 관리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거기도 아마 잘사는 나라 눈치를 보는 모양이다. 일본은 과학적인 목적이라면서 두 나라보다 훨씬 대규모로 포경을 하고 있어서 국제사회의 반발을 사고 있는 것 같다.
내 짐이 없어서 캠핑을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수소문한 끝에 베르겐 주변 캠핑장의 히테에서 하루 자기로 했다. 노르웨이는 물가가 워낙 비싼 나라라서 호텔에서 자는 것은 꿈도 못 꿀 일이고 날씨가 워낙 추워서 캠핑하기도 곤란한 경우가 많은데 다행이 히테, 혹은 히터라고 불리는 오두막집을 이용하면 그나마 저렴한 가격에 숙박을 해결할 수 있다.
히테는 유럽 다른 나라의 방갈로나 샬레와 비슷한데 수도시설이나 화장실이 없다. 그래도 추위를 막을 수 있고 간단한 건 요리할 수 있는 전열기구가 있어서 캠핑하는 것 보다는 훨씬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전화로 예약한 히테를 찾아 가니 호숫가에 조용한 괜찮은 시설이다. 호수에 붙어 있어서 고기가 많을 거 같았지만 낚시도구가 잃어버린 짐 안에 있어서 아쉬웠다.
마트에서 장을 봤는데 맞는 타입의 가스를 구할 수 없어서 좀 난감했다. 맥주를 사려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죄다 모르는 브랜드 밖에 없었다. 좀 이상하긴 했지만 그 중 괜찮아 보이는 놈으로 골라서 한 박스를 사 왔다.
나중에 마셔보니 맛이 괜찮긴 했는데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마셔도 안 취하는 것 같아서 검색해보니 무알콜 맥주였다. 알고 보니 무알콜 맥주 판매대에서 맥주를 골라 온 것이다. 노르웨이 말로만 쓰여 있으니 도저히 알 방법이 없다. 그래도 맛은 그냥 맥주랑 똑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