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이 유독 잦았던 이번 주 리뷰
올해 4월이었나. 그때부터 인스타그램에 “러프 매거진”의 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식이라곤 일절 없으면서도 솔직한 글들이었다. 나는 작위적으로 있어 보이려고 노력하는 글과 음악과 영화가 싫다. 지들도 뭔 말하는지 모르면서 흐뜨려 놓은 미사여구를 싫어한다. 마치 비비크림을 떡칠한 강남역 12번 출구의 키 180cm의 자아도취 남성을 보는 기분이랄까. 향수는 페이스북에서 광고하는 페로몬 향수 쓰는 아무튼 그런 남성을 보는 느낌이다. 사실 나도 비비크림 바르긴 함.
아무튼 솔직함을 유지하면서도 무례하지 않은 그들의 글은 <201>과 스트록스, 마광수 교수를 처음 접할 때 만큼 헛헛한 사나이 가슴을 울리게 했다. 그래서 매번 그 마음을 표현하고자 댓글을 달거나 주위에 글 좀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마구 소개하고 다녔다.
그러다 힙스터와 관련된 글인 <난 저 병신들과는 달라> 글에 달린 내 댓글이 고정되었던 적이 있다.
이 글을 계기로 러프 매거진의 정호님과 서로 팔로우를 하게 되었다. 이후로 러프 매거진 계정 주인이 내 스토리에 좋아요를 누르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때까진 정호님이 베일에 가려진 ‘최금수’인 줄 알았다. (금수님 혹시라도 보고 있다면 님 자는 조금만 있다 붙일게요)
하지만 오래 다져진 관음 실력으로 살펴 본 결과 금수님과 정호님이 다른 인물임을 깨닫고, <후 아 유>와 <접속>처럼 그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그로 추정되는 인물의 사진은 그의 글처럼 분노에 차 보이는 내 또래의 청년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따뜻한 사람임을 알 수 있는 단서들이 많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금수님께 연락이 왔다.
내가 예전에 카뮈나 사르트르 등 실존주의에 빠져있을 때 내 나름대로 ‘부조리’를 대하는 법에 대해서 쓴 글이다. PC방 점장님의 말씀을 듣고 떠오른 일련의 생각들을 정리해둔 글이었다. 사실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한 글이지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한 마음과, 그가 내가 바라본 대로 따뜻한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아무튼 그와의 식사 약속을 잡고 합정옥에서 만났다. 사실 맘 같아선 국밥집에서 만나자고 하고 싶었는데 근본있는 척하고 싶어서 굳이 미쉐린 선정 식당으로 골랐다. 최근에 원우형과 갔을 때 맛있게 먹었던 기억도 있고..
사실 지금의 나는 최금수에 대한 맹목적인 지지가 있다. 그에게는 웹툰 <이끼>의 류목형 같은 귀신같은 매력이 있다. 내가 그와의 대화에서 매력을 느낀 부분은 그는 회피하지 않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최근에 개 좆같다고 생각하는 단어는 ‘알파메일’과 ‘베타메일’이다. 어느 순간부터 지가 잘못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다’라고 하는 사람은 알파메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베타메일’로 치부하는 사회 풍조가 생겼다.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치부와 잘못을 회피하지 않고 그것을 직시해야한다.
그런 면에서 금수씨는 멋있었다. 내가 느낀 그는 굉장한 자기 반성이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아무튼 그와 대안 우파와 관련된 콘텐츠들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는데, 그가 했던 말 중에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누군가를 비판해야 재밌어지는 건 사실인데, 그러면 자신도 비판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하지만 요즘 성행하는 콘텐츠들(특정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씁니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은 회피하고 있는 것 같다.
맞는 말이다. 그리고 그의 말을 통해 나 또한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한 근거를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나는 90년대 코미디를 좋아한다. 특히 두 명이서 짝을 이뤄 극을 이끄는 코미디를 좋아한다. 점원들, 레보스키, 델마와 루이스 등등..
90년대 극들은 지금의 극들과 유사한 결로 허무주의적인 메세지를 많이 담고 있다. 지금은 자본주의에 대한 무력감에서 오는 허무감이지만, 당시엔 이거 한
스푼에 Y2K 한 스푼이 담긴 허무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와 지금의 차이는 인터넷의 유무가 있다. 인터넷은 모든 인류에게 ‘지식의 저주’를 내렸다. 모두가 자신을 이성적이라고 생각하고 모두가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 지식의 저주가 우리의 허무함에 기름을 붓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정보와 지식에 비해 현실과의 괴리는 굉장히 크기 때문이다. 요즘의 사람들 대부분을 만나면 다음과 같은 뉘앙스를 꼭 느낄 수 있다.
내가 이렇게 똑똑한 사람인데 내 인생은 왜 이 모양이지? 저 멍청한 놈들 때문이야. 니들이
뭘 알겠어.
하지만 90년대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이야기엔 ‘쟤들도 병신, 하지만 우리도 병신’이라는 기조가 꼭 깔려있다. 이제는 모두가 아는 더닝 크루거 곡선처럼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지식은 저주다. 나도 이렇게 단언하는게 모순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래서 그와 보내는 시간은 마냥 즐겁기만 했다. 그는 자조적이었지만 냉소적인 사람은 아니었고, 현실을 직시하지만 꿈이 있는 사람이었다.
솔직히 특정 시점 이후로부터는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안주와 술을 배에 욱여 넣느라 만취해 뒤의 대화들은 기억이 남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부터 내향적인 삶을 살고 있는 내게 오랜만에 찾아온 새로운 만남은 간만에 큰 설렘을 주었다.
여담이지만 이 날 만취해서 종착역인 봉화산에서 내렸는데 사람이 너무 없어서 놀랐다. 메롱시티 걷는 스폰지밥의 심정이었다구. 무튼 택시잡고 들어가다가 갑자기 아버지 생각이 치밀어 올라서 쪼금 울었다. 요즘 나는 감정을 느낄 일이 별로 없다. 술 마시면 감정이 생기는데, 그래서 요즘은 다른 목적으로 술에 의존하는 것 같다.
오랜만에 장서린과 동기들을 만났다. 사실 나는 3명 이상이 모이는 자리를 선호하지 않는다. 에너지가 부족해 다른 사람들을 골고루 신경쓸 수가 없고, 3명이 넘어가면 공통 관심사를 이끌어내기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요즘 조금은 비겁한 방법을 쓰고 있다. 바로 서로 ’싫어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서로 좋아하는게 겹칠 때보다 싫어하는 게 같을 때 더 힘을 합치는 경향이 있다. 아무튼 나는 ‘절대 안 되는 이성 조건’ 등을 주로 꺼내는데, 친구들의 반응을 들으면 꽤나 재미있다. 그들의 답변이 다 천차만별이지만, 기시감이 드는 사람들의 특징을 얘기한다는 점이 흥미롭기 때문이다. 다음은 임의의 순서로 배치한 우리의 ‘이것만은 안돼‘리스트이다.
소위 사재기 술 발라드 듣는 사람
카피형 디자인의 휠라 스니커즈를 신는 사람
와이드도 스키니도 아닌 이상한 레귤러 핏의 바지를 입는 사람
퍼플립인 사람, 피부 안 좋은 사람 등등
이뿐만 아니라 이분법적인 접근으로 이성의 특징을 분류해 밸런스 게임을 하는 대화 주제도 있었다.
양지상 vs 음지상 (아나운서상 vs 타투남녀상)
나에게 과도한 윤리를 강요하는 사람 vs 윤리의식이 없는 사람 등등…
대화 결과만 밝히자면, 음지상이 훨씬 인기가 많았고 굳이 지역으로 분류했을 때 홍대&성수를 자주 다닐 것 같은 인물상들이 성별을 구분하지 않고 인기가 많았다. 요즘 점점 고전적인 매력이 붕괴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 20-30년 전에도 이런 캐릭터들이 나오는 작품들이 있던 걸 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꾸준한 수요가 있었던 것 같다.
여튼 나는 음지상이 좋다. 나는 눈에 독기가 서려있는 사람이 좋다. 사연이 있는 사람이 좋다. 어린 시절의 결핍으로 세상을 좀 더 세밀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 좋다.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이상한 취미와 취향이 있는 사람이 좋다. 쓰잘데기 없는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좋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보통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조금 더 재밌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보통은 어두운 이 사람들이 가끔 웃는 모습을 볼 때의 매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빠져나올 수 없다.
+ 추가 1) 오랜만에 만난 동기들 앞에서 가감없이 내 취향을 드러냈다. 원래 동기들에겐 좀 선을 지키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러니까 대화가 재미가 없더라구. 좀 지탄받을 만한 이야기들을 드러놓긴 했는데 얘들아 그래도 나랑 놀아줭 ㅠ
+ 추가 2) 사람은 결국 사회적인 동물이고 따뜻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 이틀이었다. 자주 나가야겠다. 이제 방구석에서 영화 그만 볼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