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편에서는 나폴레옹이 제노바를 포위 중인 오스트리아군의 배후로 침투하기 위해 알프스의 생 베르나르 협곡을 넘어 6월 2일, 롬바르디아의 수도인 밀라노를 성공적으로 점령하는 모습까지를 보셨습니다. 이 기습 작전으로 인해 허를 찔린 오스트리아군은 당연히 크게 당황했습니다. 전통적인 전술을 고집했던 오스트리아군에게 있어 무엇보다 소중했던, "본국과의 연락선"이 위협받게 되었으니까요.
당시 오스트리아군은 크게 3조각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먼저 총사령관인 멜라스(Michael Friedrich Benedikt Baron von Melas)는 약 1만8천의 병력으로 피에몬테의 주도인 토리노(Turin)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오트(Peter Karl Ott von Bátorkéz) 장군은 역시 1만8천의 병력으로 제노바에서 농성 중이던 프랑스의 마세나를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기타 부대들은 피에몬테의 대표적인 요새 도시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 등지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이 상황에서 멜라스가 내린 판단은 무척 상식적이고도 현명한 것이었습니다. 분산된 병력을 적절한 중간 지점에 모아, 나폴레옹에게 반격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멜라스는 그 적절한 중간 지점을 저 동쪽인 피아센차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거기에 병력을 모을 시간이 충분하다고 보았고, 또 최소한 병력을 그 정도 동쪽으로 옮겨놓은 뒤 전투를 벌여야 좀더 안전한 후퇴를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1796년의 제1차 이탈리아 원정 때 나폴레옹과 싸웠...다기 보다는 밥이 되었던 그 오트 장군 맞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나폴레옹이었고, 그의 기동력은 오스트리아의 칠순 노장이 생각하는 상식 수준을 벗어나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특유의 기동 작전을 펼쳐, 이들이 규합하기 전에 이들을 하나하나 각개격파할 작정이었습니다. 특히 오트의 부대는 제노바 포위에 붙들려 있었으므로, 움직임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특히 잘 하면, 마세나의 부대와 남북 양쪽에서 오트의 부대를 협격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 에러가 발생합니다.
나폴레옹이 맹장 란(Jean Lannes)을 보내 파비아(Pavia)를 점령한지 하루 뒤인 6월 4일, 이렇게 나폴레옹이 바로 코 앞까지 구원군을 이끌고 왔다는 것을 까맣게 모른 마세나가 그만 오트에게 항복해버린 것입니다. 사실 마세나의 항복은 그다지 탓할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태까지 공세적 방어를 취하며, 자주 출격하여 포위 중인 오스트리아군에게 패배를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굶는 것에는 장사가 없는지라, 부하 병사들이 며칠 굶고 나더니 배고파 못살겠다고 반란을 일으킬 기세를 보이자, 추한 꼴을 보기 전에 좋은 조건으로 항복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던 것이지요. 마세나의 항복 조건은 꽤 괜찮은 것이어서, 제노바의 프랑스군은 남은 병력 7천명이 모두 무기와 군기를 소지한 채 당당히 프랑스 땅으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덕택에 오트의 부대는 제노바 점령을 끝내고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나폴레옹은 아직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모든 프랑스 병사들은 탄약통 속에 원수봉을 넣고 다는다'는 말의 표본이 되었던 장본인, 사병 출신의 원수 란입니다.)
그래서 나폴레옹은 파비아를 점령한 뒤, 다소 태평스러운 마음으로 불과 8천의 병력을 가진 란에게 포(Po) 강을 건너 계속 남쪽으로 내려가 토리노-만토바(Mantua)를 연결하는 동서 대로를 정찰/장악하라고 명령하고, 또 더 나아가 뮈라에게는 동쪽의 피아센차(Piacenza)를 공격하여 그 곳에 주둔해있던 오스트리아 수비대를 내쫓아 버릴 것을 지시했습니다. 이 두 작전은 물론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그러나 뮈라가 피아센차를 점령하는 과정 중에 노획한 오스트리아군의 서신을 통해, 프랑스군은 비로소 마세나가 항복했고 제노바가 이미 오트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아직 이 소식이 란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6월 7일, 마침내 오트의 1만8천 대부대가 북쪽으로 향하여, 역시 토리노-만토바 간의 동서 대로를 확보하기 위해 움직입니다.
(몬테벨로 전투 직전의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의 움직임입니다. 아직 멜라스는 토리노에서 동쪽으로 이동 중이었습니다.)
아직 이 사실을 모르던 란은 6월 9일 아침, 오스트리아군의 선봉대를 몬테벨로(Montebello)라는 마을 근처에서 맞닥뜨리게 됩니다. 란의 부대는 겨우 8천이었지만, 오스트리아군도 그 규모는 크지 않을 것이라고 본 란은 호기있게 공격에 나섭니다. 하지만 전투가 계속될 수록, 오스트리아군은 점점 증원되었고, 프랑스군은 점점 수세에 몰렸습니다. 특히, 오스트리아군이 무려 35문의 대포로 볼링핀 쓰러뜨리듯이 프랑스군을 공격했지만, 아무래도 알프스를 넘어오느라 포병대를 많이 가져오지 못한 프랑스군은 제대로 대응 포격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전투에서 란은 자신의 보병들이 오스트리아 포병대의 캐니스터탄 공격을 받을 때의 소리, 즉 "오스트리아군의 캐니스터탄에 프랑스 보병들의 뼈가 부러지면서 났던, 마치 폭풍 속에서 유리잔이 깨지는 것 같던 소리"를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습니다. 약 5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기진맥진한 란의 부대가 붕괴의 조짐을 보이던 오후 1시경, 마침내 프랑스군 후방에서도 지원군이 당도합니다. 빅토르(Claude Perrin Victor) 장군의 군단이 현장에 도착한 것인데, 이때 가장 먼저 투입되었던 것이 바로 샹발락(Jacques-Antoine de Chambarlhac de Laubespin) 장군의 사단이었고, 여기에는 지난번에 소개드린 척탄병 쿠아녜가 소속되어 있었습니다. 이 몬테벨로 전투에서 쿠아녜 일병은 거의 혼자의 힘으로 오스트리아군 대포 하나를 탈취하여 나중에 현장에서 나폴레옹으로부터 직접 치하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몬테벨로 전투의 광경)
아무튼 이렇게 도착한 증원군 덕택에, 란은 마침내 오스트리아군을 패주시키고 몬테벨로 전투를 승리로 마무리합니다. 오스트리아군의 사상자는 약 4천, 거기에 2천의 포로까지 남겨야 했지요. 그에 반해 프랑스군은 약 6백의 사상자만을 냈다고 하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선전 습성을 생각하면 미덥지 못한 수자로서, 대개는 약 3천의 사상자를 냈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집니다. 아무튼 이 몬테벨로의 전투는 몇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먼저, 나중에 나폴레옹의 황제가 된 뒤, 수하 장군들에게 작위를 내릴 때 이 날의 승리를 기려 란에게 몬테벨로 공작 (Duc de Montebello)이라는 칭호를 내렸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스트리아군은 4년전이나 지금이나 프랑스군의 상대가 아니라는 자신감을 프랑스군에게 심어주게 되었습니다.
한편 이 몬테벨로 전투는 오스트리아 측에게 심각한 문제를 안깁니다. 이제 토리노-만토바 대로가 끊겼고, 살아서 아름다운 오스트리아를 보고 싶으면 이제 나폴레옹을 무찌르는 것 외에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었습니다. 당장 피아센차에 병력을 모으겠다는 멜라스의 전략은 대폭 수정이 불가피했습니다. 일단 멜라스는 원래 계획보다 훨씬 서쪽인 알레산드리아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자신도 그쪽으로 이동합니다. 이로써, 최소한 몬테벨로 동쪽에 배치되었던 소규모 오스트리아군과는 병력을 합치는 것이 불가능해지는 손실을 입었지만, 어차피 피아센차도 이미 뮈라의 손에 함락된 뒤라서, 사실 아쉬울 바도 없었지요. 몬테벨로의 패배의 충격이 컸는지, 멜라스는 무려 4일간 아무 움직임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습니다. 이러는 사이 나폴레옹은 멜라스를 포위하기 위해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고요. 대체 멜라스는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 멍때리고 있었던 것일까요 ?
(오스트리아군의 총사령관인 멜라스입니다.)
오스트리아군은 나름 정보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의 배치와 이동 방향 등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프랑소와 톨리(François Toli)라는 이름의 이탈리아 현지인을 정보원으로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오트가 몬테벨로에서 패전한 뒤 알레산드리아로 기어들어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만, 멜라스의 주력의 현위치는 정확히 모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 톨리라는 작자는 사실 오스트리아에 충성하는 이중 첩자였습니다. 이자는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군이 프랑스군과의 교전을 피해 포 강을 건너 북쪽으로 이동한 뒤 거기서 동진하여 밀라노를 노리고 있다고 거짓 정보를 알렸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말을 100% 신뢰하지는 않았습니다. 원래 전쟁에는 수많은 변수가 있는 법이니까요. 하지만 이 이중 첩자의 거짓 정보는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군에게는 교전 의사가 전혀 없고 그저 프랑스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라는 확신을 주는데 성공했습니다. 여기서 나폴레옹에게는 무척 드문, 실수라는 것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때 멜라스의 오스트리아 주력군은 이미 알레산드리아 근처에 와 있었습니다. 그리고 6월 12일, 몬테벨로에서 철수한 오트의 부대 1만2천이 합류하면서 총 3만의 군세를 거느리게 되었지요. 이렇게 오스트리아군이 집결해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군이 분산하여 요리조리 빠져나갈까만을 걱정하여, 자신의 포위망을 넓게 펼치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는 나폴레옹이 1796년 북부 이탈리아 원정에서 자주 활용해먹었던 오스트리아군의 실수였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이 넓게 방어망을 펼치면, 나폴레옹은 병력을 집중시켜 그 넓고 얇은 방어망을 쉽게 뚫고 각개 격파를 즐겼지요. 정말 자만이라는 것은 천재에게 있어 가장 두려운 적인가 봅니다.
(마렝고 전투 직전의 양군의 움직임과 위치입니다.)
아무튼 나폴레옹은 6월 13일, 알레산드리아 동쪽 약 15km 지점의 살레(Sale)라는 마을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병력을 갈라 북쪽으로는 코르누(Jean François Cornu de La Poype) 장군에게 3천5백의 병력을 주어 보내며 아예 포 강을 건너 그 지역에서 오스트리아군이 움직임을 견제하게 했습니다. 또한 남쪽으로는 드제(Louis Desaix)에게 6천의 병력을 주며 마렝고 남쪽 15km 지점의 노비 리구레(Novi Ligure) 지역까지 내려보내 넓은 포위망을 구성했습니다. 나폴레옹 본인은 이날 오후에 토레 가로폴리(Torre Garofoli)라는, 마렝고 바로 동쪽 5km 지점에 있는 큰 농장 건물에 사령부를 구축했습니다. 이때 톨리가 알려준 것처럼 북쪽이 아니라 오히려 남쪽으로 더 믿음직한 드제에게 더 많은 병력을 딸려 보낸 것을 보면, 나폴레옹도 톨리의 정보가 역정보일 수도 있다고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다만, 오스트리아군의 진짜 의도는 북쪽이 아닌 남쪽으로 도주하는 것이 아니라, 나폴레옹과 정면 승부를 보는 것이었지요. 이렇게 해서, 오스트리아군의 집결된 3만에 대해, 나폴레옹은 불과 2만 정도의 병력만을 가지고 부딪히게 되었습니다.
(다른 나폴레옹의 부하 장군들과는 달리, 드제는 상당히 귀족스럽게 생긴 미남자였는데, 실제로도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여기서 잠깐, 드제라구요 ? 드제는 이때 아직 이집트에 있어야 하지 않았던가요 ? 실은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을 때, 그에게 별로 안 좋은 소식이 하나 도착했습니다. 그가 이집트에 남겨두었던 클레베르가 독단적으로 영국과 강화를 맺고 항복해버렸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 이때는 이미 그 항복이 이미 뒤집혀 클레베르가 오스만 투르크군을 헬리오폴리스 전투에서 궤멸시킨지 무려 2달이 훨씬 지난 시점이었습니다만, 나폴레옹에게는 이때서야 비로소 항복 소식만 들려왔던 것이지요. 다만 나폴레옹도 이집트에 대해서는 캥기는 것이 많았던지라 별로 화를 낼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나쁜 소식을 들고 온 사람이 바로 다름아닌 드제였기 때문에, 나폴레옹은 이 소식에 대해 언짢음보다는 기쁨이 더 켰습니다. 드제는 원래 나폴레옹파 인물이었기 때문에, 반-나폴레옹 정서가 강했던 클레베르로서도 드제가 껄끄러웠는지 영국 해군의 양해를 얻어 본국에 소식을 전할 메신저로서 드제를 택해 프랑스로 보내버렸던 것입니다. 당시 나폴레옹은 자기보다 1살 많은 드제를 매우 아꼈습니다. 대개가 푸주간집 아들, 여관집 아들, 농사꾼 아들 출신에 사병 출신이었던 다른 프랑스 장군들과는 달리 자기처럼 정규 사관학교 출신의 귀족이었던 드제는 능력 뿐만 아니라 교양이나 성품에 있어서도 남다른 바가 많았기 때문이지요.
한편 오스트리아군도 준비가 잘 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 먼저, 멜라스 자신이 나폴레옹과 정면으로 붙어야 할지 우회하여 동쪽으로 탈출해야 할지 마음을 못 잡고 있었습니다. 뭐니뭐니해도 상대는 나폴레옹이었으니까요. 그러나 마렝고 전투 바로 전날의 오스트리아군 수뇌부들의 회의 결과, 다음날 나폴레옹에게 한방 먹여보기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도망친다는 것은 너무나 체면이 깎이는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잘 하면 피에몬테의 완전 정복을 이룰 수도 있었고, 중간만 하더라도 최소한 나폴레옹의 포위망을 뚫고 동쪽 브레시아나 만토바로 탈출하는 것이 가능했으니, 한번 모험을 해볼만 하다는 판단이었지요. 물론 여기서 잘못하다가는 알레산드리아에 꼼짝 못하고 갇혀버리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문제는 이런 결정이 너무 늦게, 전투 하루 전날에나 이루어졌다는 것이었습니다. 알레산드리아 동쪽에는 보르미다(Bormida)라는 작은 강이 흐르고 있어서 이걸 건너야만 나폴레옹을 공격할 수 있었는데, 이 강을 건널 다리가 아주 좁은 부교 2개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전날 오스트리아군의 라데츠키(Radetzky) 장군은 프랑스군의 우익을 돌아 침투하기 위해 보르미다 강 하류, 즉 더 북쪽에 부교를 하나 놓거나 하다 못해 이 부교 중 하나를 그쪽으로 옮기자는 의견을 냈으나, 자재도 부족했고 무엇보다 시간이 이미 부족했기 때문에 그냥 그대로 두기로 결정되었습니다. 결국 다음날인 6월 14일에 시작된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은 이 부분이 병목이 되어 신속한 병력 투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지요.
(토레 가르폴리의 농가 건물입니다. 아무리 외국군이긴 하지만 무려 나폴레옹이 그것도 역사적인 마렝고 전투 때 사령부로 사용한 건물이니 저렇게 명패를 붙여서 보존할 만 하겠지요 ? 그나저나 농가 건물치고는 참... 예쁘장하게 잘 지어놓았네요.)
드디어 운명의 6월 14일이 밝았습니다. 이날 저 멀리 이집트 카이로에서는 솔레이만이라는 이름의 열혈 시리아인 대학생이 멀리서 지켜보는 가운데 클레베르가 나일강 속의 작은 섬 로다 섬에 주둔한 부대를 검열하면서 하루를 시작했고, 드제는 나폴레옹에게서 남쪽 노비로 행군하라는 명령을 재확인하는 서신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침 8시, 오스트리아군이 보르미다 강과, 북쪽을 가로지르는 폰타노네(Fontanone) 개천을 건너 마렝고의 프랑스군에게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이때 마렝고의 프랑스군은 아직 빅토르 장군의 전위대 뿐이었고, 나폴레옹과 프랑스군의 주력부대는 나폴레옹의 사령부인 토레 가로폴리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베르티에는 빅토르에게 마렝고를 고수하라고 지시하고는, (좋게 말하면 손수 말을 몰아, 나쁘게 말하면 혼자서 안전한 후방으로 줄행랑을 쳐) 가리폴리로 달려가 나폴레옹에게 오스트리아군의 맹습이 마렝고에 가해졌다는 것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저 혼자 똑똑했던 나폴레옹은 이 공격은 도주 준비에 바쁜 오스트리아군의 페이크 모션이라고 판단하고는 남북으로 갈라보낸 병력을 재소집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현재의 알레산드리아시와 마렝고 마을의 모습입니다. 그 사이에 보르미다 강이 보입니다. 당시에는 보르미다 강과 거의 평행으로 좀더 동쪽에 폰타노네 개천이 흐르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최소한 위성 레벨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네요. 보르미다 강도 1800년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굽이굽이 흘렀는데, 지금은 많이 직선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날 전투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는, 지금은 보이지 않는 폰타노네 개천을 놓고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는 사이 빅토르 장군 휘하의 부대들은 그야말로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특히 가르단(Gardannes) 장군의 부대는 폰타노네 개천을 지키다 포병대의 지원까지 받은 오스트리아군 하딕(Karl Joseph Hadik von Futak) 장군의 맹공에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 와중에 오스트리아군의 하딕 장군은 프랑스군의 머스켓 총탄에 맞고 후송되어, 10일 뒤 알레산드리아에서 결국 사망할 정도로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가르단의 부대가 큰 피해를 입고 소진되어버리자, 빅토르는 가르단의 부대를 뒤로 빼고 예비대로 있던 샹발락 장군의 부대를 투입했는데, 이 샹발락 장군이 전투 초기에 겁을 집어 먹고 부대를 내버려둔 채 도망칠 정도로 이 전투는 치열했습니다.
오전 10시가 되어서야 나폴레옹은 이 공격이 단순한 페이크 모션이 아니라 오스트리아군의 진짜, 진지한 정면 공격이라는 것을 파악했습니다. 란과 켈레르만(François Étienne de Kellermann, 그 유명한 발미 전투를 승리로 이끈 그 켈레르만 장군의 아들입니다.) 등의 부대가 속속 마렝고 현장에 투입되었고, 특히 마렝고 북쪽의 폰타노네 개천을 사이에 두고 오스트리아군과의 치열한 공방전이 전개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은 이 폰타노네를 넘어 프랑스군의 우익 측면을 돌파하려고 했었고, 프랑스군은 그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형국이었습니다. 오전 11시가 되자, 나폴레옹 본인이 직접 마렝고 현장에 나타났습니다. 자신의 머리 속에 그리던 것과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은 나폴레옹은 급히 남아있는 예비대와 함께, 아끼고 아꼈던 자신의 근위대, 즉 통령 근위대(Consular Guard, 나중에 이들이 황실 근위대가 되지요)까지 모조리 쏟아붓고는, 남북으로 갈라보냈던 드제 등에게 시급히 돌아오라는 명령을 전달합니다. 하지만 당시 드제는 남쪽으로 계속 행군 중이었으므로, 그 뒤를 쫓아가 명령서를 전달하는데는 시간이 많이 소요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만한 아들이 없다고 하지만, 발미 전투 하나로 평생의 명성을 우려먹은 아버지에 비해 아들 켈레르만은 여기저기서 쏠쏠한 전공을 많이 남겼습니다.)
켈레르만의 기병대가 돌격을 거듭하며 오스트리아군을 분쇄하곤 했지만, 결국 수적 열세에는 방법이 없었고, 특히 오스트리아군이 100문의 대포로 프랑스군을 밀어붙이는 것에 비해 프랑스군은 고작 15문의 대포만을 가지고 있어서, 화력면에서도 크게 밀렸습니다. 결국 오후 2시 경이 되자 빅토르 장군은 마렝고에서 철수를 결정했고, 곳곳의 농가에 구축되어 있던 프랑스군의 거점은 포기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군은 남동쪽의 포도나무 덩쿨 지대로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물론 마렝고 점령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나폴레옹의 주력 부대를 완전 격파하는 것이었으니까요. 프랑스군이 마렝고에서 철수하자, 많은 수의 대포를 포함한 오스트리아군이 폰타노네 개천을 건너와 포도 덩쿨 사이에 숨은 프랑스군에게 맹렬한 포격과 머스켓 사격을 퍼부었습니다. 이대로가면 프랑스군은 일시적인 후퇴가 아니라, 전면적인 참패로 이어질 위기였습니다. 나폴레옹은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추격하는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에 통령 근위대의 잔여 보병과 포병을 모두 투입하여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지연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통령 근위대라고 해봐야, 결국 전투 경험이 좀더 많고 키가 좀더 컸을 뿐, 자동화기로 무장하거나 방탄복을 입은 부대는 아니었지요. 이들도 결국은 오스트리아군 기병대의 돌격에 의해 분쇄되어 퇴각해야 했습니다. 이제 프랑스군의 궤멸은 피할 수 없어 보였습니다.
(마렝고 전투에서의 통령 근위대의 분전. 저기 뭔가를 입으로 뜯고 있는 병사는 탄약포에서 탄환을 이빨로 뜯어내는 중입니다. 닭다리를 뜯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나폴레옹과 그 휘하 장교들, 그리고 프랑스 병사들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는 않았습니다. 이들은 약 3km를 허겁지겁 후퇴(...라기보다는 패주)한 뒤, 산 줄리아노(San Giuliano)라는 마을에서 다시 집결, 재정비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탄약도 거의 소진되었고, 방어하기에 가장 좋았던 마렝고 일대에서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이 산 줄리아노 마을에서 재정비를 한다고 해도, 이제 곧 추격해올 오스트리아군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때 나폴레옹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 가히 상상이 갈 만합니다. 그의 이날 패배는 정말 그가 3~4년 전에 '오스트리아 놈들의 멍청함이란 참' 하며 비웃던 그런 실수를 바로 자신이 저지름으로써 야기된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지금 파리에서는 수많은 그의 정적들이 '벼락 출세한 코르시카 촌놈'이 패전의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고 있다는 것을 나폴레옹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자기 형인 조세프마저도, 이번 원정에 나서기 직전에 '너에게 뭔가 사고라도 생기면 내가 그 후계자가 되도록 지명해놓고 가달라'고 졸라댈 정도였으니까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그리 쉽게 포기하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머리 속에서 남은 병력과 현재의 위치, 지금이라도 불쑥 나타날 수 있는 드제나 코르누의 지원 병력의 가능성 등을 계산하며, 더더욱 애를 태웠습니다. 이때의 그의 모습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글로 남긴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척탄병 쿠아녜였습니다. 이때 쿠아녜가 본 나폴레옹은 말고삐를 손에 쥔채,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이 휙휙 날아다니는 길가에 주저앉아 멍하니 말채찍으로 길가의 잔돌을 튕기고 있었습니다. 쿠아녜는 이때의 모습을 '오스트리아군의 대포알을 조금도 두려워하지는 않는 영웅 호걸의 대담한 모습'으로 보았습니다만, 실제로는 아마 나폴레옹은 그냥 여기서 확 대포알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버렸으면 하는 심정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멜라스의 참모장 자허입니다. 이 석판화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의 얼굴색은 백인치고는 상당히 어두운 편이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이 사람은 헝가리 귀족 출신이었습니다.)
반면에 오스트리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습니다. 드디어 나폴레옹을 완전히 격파한 것입니다 ! 이미 주요 전투는 다 종료되었고, 남은 것은 추격 및 전과 확대 뿐이라고 판단한 총사령관 멜라스는 참모장인 자허(Anton von Zach)에게 지휘권을 넘기고 후방으로 물러나 휴식을 취했습니다. 이 행동은 다소 성급한 것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변명의 여지가 없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멜라스는 당시 71세의 노인이었던데다, 노인답지 않게 전방까지 나와 전투를 지휘하느라 그가 탄 말이 적탄에 피격되어 죽어넘어진 것이 그날 하루에만 2번이나 발생할 정도로 용감히 싸웠습니다. 특히 두번째로 말이 죽어넘어질 때, 그는 왼팔에 심한 타박상을 입었기 때문에, 칠순 노인이 부상까지 입은 마당에 전투의 마무리인 추격전까지 일선 지휘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이 되었겠지요. 특히, 자허는 이날 나폴레옹을 패배시킨 작전의 총기획자였으므로, 믿고 맡길만 했지요. 자허는 오스트리아군을 추격 대형인 종대로 재편성하고, 나폴레옹의 뒤를 추격했습니다. 다만, 이곳저곳의 요새화된 농가에서 아직 저항 중이던 몇백명씩의 프랑스군을 포획하느라 시간이 낭비된 점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에게는 아직 드제가 남아있었습니다. 그는 연락을 받는 즉시 행군 방향을 돌려, 산 줄리아노에서 넋을 놓고 있던 나폴레옹에게 오후 5시경에 직접 나타나 자신의 병력 6천과 9문의 대포가 바로 3km 동쪽까지 왔음을 알렸습니다. 드제의 얼굴을 보고 반갑기도 하고 또 창피하기도 했던 나폴레옹은 드제에게 전황을 어떻게 판단하냐고 물었고, 드제는 다음과 같은 전설적인 답변을 내놓습니다.
"이 전투는 완패로 끝났습니다. 하지만 다른 전투를 승리할 시간은 충분히 남았군요."
(이제 오스트리아군에게 반격할 타임 !)
나폴레옹은 서둘러 오스트리아군을 위한 함정을 팠습니다. 드제의 싱싱한 부대를 포도덩쿨 속에 숨겨둔 채, 그는 이제 오스트리아군의 추격병과 교전하기 시작한 기존 부대를 30분 정도 더 후퇴하도록 했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을 충분히 끌여들였다고 판단되었을 때, 마르몽이 남아있는 프랑스군의 전체 포병을 이용해 맹렬한 포격을 퍼부었고, 드제의 새 병력이 오스트리아군에게 뛰어들었습니다. 오스트리아군도 자허의 지휘 하에 용감히 반격했지만, 프랑스군의 포격이 럭키샷 하나를 만들어냈는지, 오스트리아군 대오 속의 탄약 수송차 하나가 대폭발을 일으켰고, 때마침 드제의 요청에 따라, 이날 하루 종일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켈레르만의 기병대가 오스트리아군의 좌익을 덮쳤습니다. 이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폭발과 기병대의 돌격에 순간적인 패닉을 일으킨 오스트리아군의 선두는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고, 뒤따라오던 오스트리아군도 덩달아 이 패주 물결에 휩쓸려버렸습니다. 특히 참모장이라는 지위에 걸맞지 않게, 너무 전방에 나와 선두에서 지휘하던 자허가 리슈(Riche)라는 이름의 프랑스군 기병대원에게 멱살을 잡힌 채 포로가 되버리는 바람에, 오스트리아군의 혼란은 더욱 컸습니다. 오스트리아군을 막아선 것은 드제였지만, 이날 오스트리아군을 패주시킨 것은 이 켈레르만의 기병 돌격이라고 전해집니다. 켈레르만의 돌격 덕분에, 자허 뿐만 아니라 약 2천명의 오스트리아군은 그 자리에서 항복해버립니다.
(르죈이 그린 마렝고 전투 공식 기록화입니다. 왼쪽의 질서정연한 드제의 부대가 중앙의 오스트리아군을 막아서고, 그 측면을 켈레르만의 기병대가 들이치는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결정적인 순간에, 역시 너무 전방에서 지휘하던 드제도 오스트리아군의 총탄에 심장을 맞고 말에서 떨어져 즉사합니다. 놀랍게도 열띤 추격전 속에서 그의 죽음은 부하들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의 시체는 일단 버려졌습니다. 전투가 끝난 뒤, 패배 직전에서 승리를 낚아챈 나폴레옹은 너무나 기뻐하며 드제를 찾았는데, 그때서야 드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그의 부하들도 알아차렸다고 합니다. 그의 행적을 수소문하던 나폴레옹은, 드제의 부관 하나와 하사관 하나가 드제가 말에서 떨어지는 것을 본 것 같다는 증언을 하자, 병사들을 풀어 밤새도록 수많은 시체들이 널려 있는 마렝고-산 쥴리아노 사이의 벌판을 등불을 들고 뒤지게 했습니다. 그의 시체는 나중에 푸셰의 뒤를 이어 나폴레옹의 경찰청장이 되는 사바리(Anne Jean Marie René Savary, 1st Duc de Rovigo)에 의해 발견됩니다. 수많은 다른 병사들의 시체 사이에 쓰러져 있던 드제는 그의 특징이었던 리본으로 묶어놓은 긴 검은 머리 덕택에 간신히 발견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다른 시신들과 마찬가지로, 드제의 시신도 옷을 포함한 귀중품을 노리는 프랑스 병사들 및 주변 이탈리아 주민들에게 약탈당해 벌거벗겨진 상태였거든요. 사바리는 그의 시체를 자신의 망토로 감싸 나폴레옹에게 가져갔고, 나폴레옹은 '왜 나에게는 그를 위해 울 시간이 허용되지 않는가' 라며 한탄했다고 하는군요. 드제도 나폴레옹처럼 마멜룩 시종을 하나 데리고 있었고, 흑인 소년 하인도 한명 데리고 다녔는데, 현장에서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운 것은 이 둘 뿐이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에게 드제의 시신이 운구되어온 이 그림은 실제와는 달리 많이 미화된 것입니다. 일단 시간이 한밤중이었고, 또 드제는 비싼 제복을 입고 있었으므로 장화니 바지니 할 것없이 모두 약탈당해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림 중앙에 그의 시종인 흑인 소년과 마멜룩 한명이 울고 있는 것이 보입니다.)
(드제의 시신을 발견한 것은 당시 드제의 참모 장교였던, 나폴레옹보다 5살 어렸던 젊은 사바리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아우스테를리츠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 참전하여 로비고 공작에 봉해졌고,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에 끌려갈 때 그를 따르려 했으나 도중에 억류되어 결국 나폴레옹과 함께 가지는 못했습니다.)
나폴레옹이 여기서 울지 않았다고 해서 나폴레옹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은 것은 정말 아니었습니다. 나폴레옹은 자신을 패배의 나락에서 구원해준 드제의 죽음을 정말로 몹시 애석하게 생각했고, 그의 장례식은 나중에 정말 성대하게 치루었습니다. 이날밤 나폴레옹은 정말 바빴는데, 일단 후퇴해간 오스트리아군의 뒤처리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오스트리아군의 선두는 무질서하게 무너져 항복하거나 도주했지만, 그 후방 부대들은 오트 및 오라일리(Andreas O'Reilly von Ballinlough) 장군 등의 지휘 하에 질서정연하게 알레산드리아로 철수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군의 위협이 아직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실제로 프랑스군의 사상자 수자가 4천7백 명 정도에 포로가 9백명 정도 난 것에 비해, 오스트리아군은 6천5백명의 사상자에 약 2천9백명 정도의 포로를 냈으므로, 아직 오스트리아군의 전력은 프랑스군에 비해 별로 떨어지는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오스트리아군은 40문의 대포와 무려 15개의 군기를 빼앗긴 상태라, 사기는 정말 바닥을 친 상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이미 승리했다고 생각하고 편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러 간 총사령관 멜라스의 충격이 가장 컸습니다. 나폴레옹은 이 상태를 120% 활용하기로 합니다.
나폴레옹은 그날 밤 즉각 멜라스에게 편지를 써서 24시간 휴전을 제안했고, 포로로 잡은 자허에게 그 편지를 들려 멜라스에게 보냈습니다. 이미 자허에게는 긴 대화를 통해, 나폴레옹 본인은 평화를 원하며, 무리한 요구로 오스트리아군의 명예를 실추시킬 생각은 없다는 등의 공작을 해놓은 상태였지요. 이날 겪은 패배로 인해 심리적으로 크게 흔들린 멜라스는 이 편지를 받고 순순히 그에 응했고, 결국 나폴레옹이 제안한 평화안, 즉 오스트리아군은 군기와 무기를 소지한 채 민치오(Mincio) 동쪽으로 철수하며, 그 강을 프랑스군과 오스트리아군의 경계선으로 정한다는 것에 동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알레산드리아 조약입니다. 과거 1796년 나폴레옹이 1차로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이 민치오 라인까지 정복하는데 약 2개월이 걸렸었는데, 이번에는 불과 반달 만에 정복했으니, 정말 대단한 전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단번에 200km ! 이것이 바로 나폴레옹의 스케일 !)
이 마렝고 전투는 여러 사람에게 여러가지 의미를 가집니다. 가장 먼저, 나폴레옹에게는 다시 한번 불멸의 영광을 장식한 전투 이력서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것 외에도, 아직 불완전했던 제1통령으로서의 권력을 공고히 했다는 실질적인 이익이 있었습니다. 이집트에서 찌질거리던 그가 기술적으로는 탈영에 해당하는 행위로 제멋대로 프랑스로 돌아와서, 노골적인 반란을 일으켜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했음에도 프랑스의 열혈 상 퀼로트들이 들고 일어나지 않은 것은 그에게서 승리와 영광, 그리고 평화를 기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국민들이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면, 그도 다른 전임자들처럼 다른 쿠데타에 의해 밀려나 열대 기아나로 추방되거나 운이 나쁘면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질 지도 모르는 판국이었습니다. 그런데 나폴레옹은 단 한번의 원정으로 그것을 정말 이룩한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이렇게 극적으로 얻은 승리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정말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전투에서 나폴레옹의 역할은 엉터리 판단으로 프랑스군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 외에는 별로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은, 알레산드리아로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넣은 것은 알프스를 넘는다는 나폴레옹의 탁월한 전략적 기동 덕택이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동국이 아무리 골대 앞에서 어이없는 홈런을 날린다고 해도, 이동국이 아니었다면 그 앞에서 슈팅 기회도 노릴 수 없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결코 이동국을 욕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예, 저 이동국 팬입니다.) 그리고 이 전투에서 가장 빛나는 활약을 한 두 사람은 바로 드제와 켈레르만 주니어였지요. 하지만 나폴레옹은 이 모든 것을 최대한 미화하여, 마치 이날 승리가 나폴레옹의 숙명이었고, 드제의 죽음조차도 나폴레옹의 승리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주는 비극적 요소로서 장식했습니다. 나폴레옹은 향후 이 마렝고 전투의 전후 상황을 무려 5번에 걸쳐 고쳐 쓰면서 점점 더 미화했습니다.
드제는 넬슨 또는 이순신 장군과 같은 승리 직후의 죽음을 당했으므로, 나폴레옹은 드제에게 질투 같은 것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는 '드제의 묘지는 알프스를 발판으로 하고 수도사들로 묘지기를 삼겠다'며 정말 그가 넘은 생 베르나르 수도원 인근에 성대한 의식과 함께 드제를 안장하고 거기에 근사한 기념탑까지 세웠습니다. 그 장례식에서 베르티에가 읊은 송사가 인상적이었는데, 다음과 같았습니다.
"여기, 동방에서는 '공정한 자'로 불렸고, 조국에서는 '용감한 자'로 불렸으며, 이 시대가 '현명한 자'라고 부른 사내가 잠들었노라"
(안젤로 피찌 Angelo Pizzi가 만든, 이 드제 석고상은 실제 드제의 시신에 석회를 입혀서 뜬 데쓰 마스크입니다. 이렇게 보니 진짜 미남이군요. 켈레르만이나 란 등과 비교됩니다 그려.)
드제의 죽음에 덧붙일 이야기로는, 저 멀리 카이로에서는 같은 날 클레베르가 어떤 시리아인 대학생에게 암살되었다는 것 정도입니다.
한편 켈레르만의 경우는 버젓이 살아있었으므로 그의 이날 활약에 대해서는 뭔가 치하가 있어야 했는데, 켈레르만의 활약이 너무 칭송되면 곤란했으므로, 그 정도가 조절되어야 했습니다. 특히 이날 별로 빛을 발하지 못한 동료 장군들의 질시도 있고 해서, 마렝고 전투가 끝난 당일 밤부터 켈레르만의 공적을 깎아내리는 발언들이 참모 회의에서 나오는 바람에 켈레르만은 꼭지가 돌 정도로 화를 냈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가 이날 보여준 무용은 정말 굉장한 것이어서, 나폴레옹도 그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켈레르만은 나중에도 이런저런 전투에서 공을 많이 세웠는데, 그가 스페인에서 뭔가 과오를 저질러 나폴레옹 앞에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나폴레옹은 켈레르만의 변명을 도중에 자르고 이렇게 그를 위로했다고 합니다.
"장군, 어떤한 건으로든 당신 이름이 내게 보고될 때마다, 난 마렝고 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오."
이긴 쪽은 이렇게 훈훈한 이야기가 가득했지만, 진 쪽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특히 이 패배에 대한 비난은 참모장 자허 장군에게 집중되었습니다. 사실 그럴 만 한 것이, 멜라스가 전투를 다 이겨놓은 직후 지휘권을 자허에게 양도했더니, 불과 2~3시간 만에 패배 소식이 되돌아왔기 때문입니다. 또한, 자허는 포로로 잡힌 것도 모자라 나폴레옹의 편지나 들고다니는 심부름꾼 역할까지 했으므로 더욱 체면이 깎였습니다. 멜라스는 이 자허에 대해 어찌나 악감정이 북받쳤는지, 알레산드리아 조약 이후 군 지휘권을 후임자인 벨레가르드 (Heinrich von Bellegarde) 백작에게 넘길 때, 자허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여기 이 조그만 친구 보이십니까 ? 이 친구는 안색만 시커먼 것이 아니라 속까지 시커멓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벨레가르드 백작은 그 후에도 자허를 중용했고, 자허는 1809년 제5차 동맹전쟁때까지도 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지휘했고, 명예롭게 군에서 은퇴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마렝고 전투는 프랑스 요리에 있어서도 한 획을 긋습니다. 바로 치킨 마렝고의 전설이지요. 이 전설에 따르면 이날 밤 짜릿한 승리를 거둔 뒤 나폴레옹은 몹시 허기가 져서 개인 요리사인 뒤낭(Dunand)에게 식사 준비를 시킵니다. 그러나 늘 그렇듯이, 나폴레옹의 보급마차는 제 시간에 전장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에, 뒤낭은 아무 준비도 없이 근처에서 허겁지겁 긁어모은 재료, 즉 닭과 토마토, 계란, 작은 민물 가재, 올리브 기름, 그리고 병사들의 건빵 만으로 요리를 만들어야 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치킨 마렝고>라는 것입니다.
(전설에 따르면, 훗날 나폴레옹은 마렝고 전투 기념일마다 저 요리를 주문했는데, 당시의 재료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 있어서, 가령 가재 하나 건빵 하나라도 빠지면 식사를 거부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이 전설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불과하다는 것이 중론입니다. 먼저, 뒤낭은 마렝고 전투가 벌어진지 5년 뒤인 1805년에야 나폴레옹의 요리사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치킨 마렝고라는 요리가 정말 등장한 것은 182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게다가 당시 이탈리아 북부에서는 6월 중순에 토마토를 구할 방법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위에서 보셨다시피 나폴레옹은 당시 반찬 투정이나 하고 있을 상황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드제의 죽음은 그에게 정말 큰 상실이었고, 그의 죽음을 애통해 할 틈도 없이 알레산드리아의 오스트리아군에게 제안할 휴전 협정 문건을 구술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폴레옹은 미식가가 아니어서, 보통 그의 저녁 식사는 마멜룩 시종인 루스탐이 병사들에게 얻어온 말고기 한조각에 빵 한덩어리인 경우가 드문 일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만화책 '대사 각하의 요리사'입니다. 매우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다 좋은데 내용이 일본의 외교전이다 보니 좀 불편한 부분들이 있더군요.)
이런저런 뒷이야기를 남기며, 일단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를 제압하고 자신의 제1통령 지위를 지키는데 성공합니다. 이제 당분간 그가 전투에 나설 일은 별로 없게 되는데요, 그렇다면 그의 이집트 원정으로 촉발된 제2차 대불 동맹전쟁은 이렇게 마렝고 전투로 끝이 나는 것이었을까요 ? 아닙니다. 그러기에는 오스트리아의 군사력은 매우 웅후했지요. 그러면 대체 어떻게 제2차 동맹전쟁이 끝나게 된 것이었을까요 ? 그리고 왜 이로 인해 나폴레옹은 심각하게 심사가 뒤틀리게 되었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