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가던 예술가에게 산소 호흡기를 씌웠다.
우리는 태어날 때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다.
예술가가 되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가 아니라 되어야만 하는 단 한 가지 이유가 예술가를 만든다.
“예술해서 뭐하려고?”라는 악마의 질문에 웃으며 답하자. “음, 재밌어서. 나만 재밌는 거 해서 미안.”
예술가가 되자, 지금 당장, just do it.
-김영하 작가의 ted 강연-
꿈이 없는 사람은 불안하다. 다들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혼자서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는 듯하다. 바로 내 이야기다. 먹고는 살아야 할 것 같아 커뮤니티에 ‘비상경 문과 취업’을 검색해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의 글에 달린 댓글들을 정독하다 괜히 마음만 더 복잡해진다. 한 때는 모르는 이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꿈이 없어서 슬퍼요.’라고 적으니 ‘저도 그랬었는데, 지금은 그냥 퇴사하고 싶어요.’라는 답장을 받았다. 꿈이란 게 원래 이렇게 어려운 것이었나.
나도 예전에는 꿈이란 게 있었다. 발레리나, 화가, 간호사, 약사... 지금은 '나의 직업 목록'에서 지워진 것들이 많다. 발레리나가 되고 싶다고 했던 때가 생각난다. 7살이었는데, 춤보다는 무대에 오르기 전에 빨간 볼터치를 하고, 예쁜 옷을 입는 게 더 좋았다. 옷은 예뻤는데, 너무 까칠해서 고역이었다. 깃털이나 반짝이들이 아토피로 예민한 피부를 마구 찔러 춤을 추는 동시에 몸을 마구 긁었다. 학예회 사진 전시회에 내 사진이 걸렸는데, 하필이면 목을 긁고 있는 사진이라 민망했던 기억이 있다. 아무튼 나는 춤이 추고 싶었고, 가장 예쁜 옷을 입는 발레가 하고 싶었다. 엄마에게 당당하게 발레를 하겠다고 말했더니 "네가 그걸 어떻게 해."라는 대답을 들었다. 엄마는 내 통통한 팔을 꼬집으며 "그런 거 하는 사람은 따로 있어."라며 웃었다. 그렇게 발레는 잊혔고 나는 미술에 맛들이기 시작했다. 나보다 2살이 많은 언니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미술 학원에 다녔다. 그림들을 가져와서 나에게 자랑하곤 했는데 (굴뚝에 얼굴을 내민 산타 할아버지 그림이 아직도 생각난다.) 엄마에게 아무리 졸라도 나는 미술학원에 보내주지 않았다. 엄마는 내게 "그런 거는 굳이 돈 주고 안 해도 돼."라고 말하며 달력 뒷면에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맘껏 그리라고 말했다. 나는 주로 살고 싶은 집, 타고 싶은 차, 입고 싶은 옷들을 그렸다. 항상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그려 넣었는데 그걸 보고 있으면 마음이 가득 차는 느낌이었다. 나는 내가 그린 그림에게 항상 말을 걸었다. 대답해주는 이는 없었으나 그저 재미있었다. 교내 미술 대회에서 몇 번 상장을 차고 선생님들께 칭찬을 받으니 스스로가 미술에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고, 화가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엄마에게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하자 "화가는 돈 못 버는데?"라는 말을 들었다. 상관없다고 말하자 "그림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도 그릴 수 있어. 그런 건 굳이 직업이 아니어도 돼."라고 했다. 10만 원은 머리에 이고 다닐 정도로 큰돈이라 생각했던 때이기에 '돈 못 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후 10만 원은 1초 만에 쓸 수 있는 종이 쪼가리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돈 못 버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화가라는 직업은 나에게 '굳이 지금 할 필요 없는 것'이 되었다. 중학생 때는 교사가 되고 싶었다. 공무원이라는 안정성과 명예, 어디서도 부끄럽지 않을 만한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등학생이 되자 그마저도 사라졌다. '일단 시험만 잘 보자, 그럼 뭐든 할 수 있을 거야.'라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어린 시절 엄마가 나에게 '그런 건 나중에도 할 수 있다'라고 했던 것처럼, 지금 공부하면 나중에 다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근거 없는 약속을 했다. 꿈이 없는데 꿈이 있었다. 그래서 없는 꿈을 만들어냈고 나를 그 안에 욱여넣었다. 결국 꿈을 이뤘으나 껍데기뿐이었다. 나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자유와 선택지, 방향들이 나에게 주어질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여전히 작은 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모든 선택들 앞에서 망설이고 어떤 방향도 찾지 못해 헤매기만 나를 발견했다. 재밌는 것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재미'앞에 서면 죄책감부터 든다. 내가 지금 이걸 하는 게 맞나. 뭐해먹고 살 건지나 걱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처음에 말했듯 꿈이 없는 사람은 늘 불안하다.
이렇게 불안한 와중에 김영하 작가의 강의 동영상을 보았다. '하고 싶은 것을 해라, 그냥 재밌으니까.' 이게 해답이었다. 그냥 예쁜 옷 입는 게 좋아서 발레리나가 되고 싶고, 돈 못 벌어도 재밌으니까 화가가 되고 싶었던 어린 날의 나처럼 그냥 재밌으면 하면 되는 거였다. 꿈이 없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나는 발레리나, 화가가 되고 싶고 글을 쓰거나 노래를 부르고 싶다. 어린 날의 엄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그런 건 다음에도 할 수 있어.'라고 되뇌며 꿈이 없어 우울해하고 재밌는 일들에 죄책감을 느낀다. 나도 꿈이 있다는 걸 인정하면 우울해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텐데 말이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예체능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공부를 조금 잘한다는 이유로 집안의 모든 기대가 나를 향했고 '넌 이렇게 살지마.'라고 말하는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짊어질 필요 없는 짐을 메고 그들의 구원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내 몸 하나도 버거워하면서 무슨 남을 구원하겠다고. 지금에서야 그런 생각이 든다. 나는 누군가를 구원할 필요가 없고 그럴 자격도, 능력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제야 나는 내 안에 죽어있던 예술가들을 살려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를 구원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어릴 때의 나처럼 그림을 그렸고, 글을 썼고, 시를 읽었다. 재미는 있지만 인생에는 도움이 안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걱정으로 가득했던 삶에 활기를 주었다. 그림을 그리면서 내가 좋아하는 색, 선, 도형들을 알았고, 글을 쓰면서 마음에 맺혀있던 것들을 덜어내었고, 시를 읽으면서 아주 작은 것을 의미 있게 바라보는 연습을 했다.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고 글을 쓸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저 책상에 앉아 연필을 들기만 하면 가능한 일들이었다. '그거 해서 뭐하게?'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던 수많은 날들이 아깝다. '재밌어' 세 단어로 작은 예술가들을 살릴 수도 있을 텐데 말이다. 나는 꿈이 없지만 조금 덜 불안하다. 하고 싶은 걸해도 굶어 죽지는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이 든다. 꿈이 없는 김에 재미라도 있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