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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생 Aug 07. 2020

고독한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사랑이었다.

고독과 불행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나다워진다.

그날도 어김없이 새벽이 찾다. 적막한 방에서 까만 천장을 멀뚱히 바라보다 몸을 일으켜 노트북을 열었다. 다른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막연한 외로움이 해소될까 하여 지인들의 메일 주소로 블로그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굳이 블로그를 찾았던 이유는 과시적인 사진들이 쏟아지는 다른 sns보다는 블로그가 더 개인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고 소소한 삶의 기록에서 공감과 위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또래는 블로그를 잘 사용하지 않았기에 대다수가 텅텅 비어있거나 스크랩된 글만 있었다. 조금 아쉬웠지만 스스로가 음침하다 느껴 마지막으로 한 명만 더 찾아보고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지막 한 명은 중학교 동창이었는데,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별 기대 없이 들어간 블로그에 중학교 2학년 시절부터 시작되어 4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졌던 1500개의 글이 있었다. 초반의 글들은 그가 좋아하는 한 소녀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었는데, 진지하고 순수한 마음이 돋보였다. 점점 글에 빠져들었고 다른 이의 은밀한 속내를 훔쳐보는 것 같아 조마조마한 느낌이 있었다. 다음 글을 누른 순간, 글 속의 그녀가 누구였는지 알 수 있었다. 깜짝 생일 파티가 있었던 날, 그는 그곳에 없었지만 하루가 다 지나고 나서야 축하한다는 말을 적을 수 있었던 날, 그 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그 후에도 꽤 많은 글들이 그 소녀가 나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대화들, 주고받았던 선물들. 당시에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몇 년이 지나고 나서야 그의 진심을 알 수 있었다. 졸업식 날 마지막까지 손 한번 흔들지 못했던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는 글을 끝으로 소녀의 이야기는 더 이상 나오지 않았고, 그 후에는 존재에 대한 성찰을 담은 글들이 많았다. 그는 그 시간 동안 늘 후회했고, 아파했고, 고독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서야 그 흔적을 읽었던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에 휩싸였다. 생각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고, 짧은 시간 동안 과식을 해 급체에 걸린 사람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그 생각들을 소화시키기엔 새벽은 너무 짧았고, 나는 쓰린 속을 부여잡으며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평범한 첫사랑 이야기이고 지나간 인연의 흔적일 뿐인데, 뭐가 그리 심각하냐는 눈으로 볼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만 나는 그 글 속에서 사랑이 아닌 고독을 느꼈고, 그 슬픔들에 동화되었다. 존재와 세계, 그 너머의 관계에 대하여 성찰하는 글에는 짙은 고독이 배어있었고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 나는 알았다. 나에게 고독은 삶을 바다 한가운데로 끌고 가 정처 없이 떠돌게 하고, 희망 대신 끝없는 상실을 안기는 것이었다. 고독의 순간마다 나는 공간이 한없이 좁아지는 것 같아 숨통이 조였고, 잘 살고 있는 타인에 비해 초라한 내가 이상하고 못나보여 마음 한 구석이 시큰했다. 그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쳤으나, 모두 낯익은 타인들로 남았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를 외면했고, 인생을 비관해 무기력한 나날들을 보냈다.


나는 그 블로그에서 이제껏 외면했던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불쌍한 나의 모습을 보았다. 그곳에서 나는 이대로 버려두지 말라고, 뭐라도 좋으니 좀 해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나는 그가 쓴 것처럼 ‘거울을 깨고 싶은 생각이 들어도 스스로가 한없이 미워져도’ 나를 마주하기로 했다. 어둠 속에서 호숫길을 걷고 또 걸었고 스스로가 너무 싫어질 때는 공책에 나에 대한 욕을 적었다. 더 우울해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시원했다. 내 마음이 내뱉는 말들을 그저 듣기만 했고, 굳이 스스로를 사랑하려,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았다. 나의 모든 모습을 기꺼이 인정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늘 다른 관계 속에서 ‘밝고 잘 적응하는 사람’ 이길 바랐다. 다른 이들의 sns에 올라오는 사진들처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 시끄러운 음악 속에서 춤을 추는 그런 사람 되고 싶었다. 이상을 좇기 위해 열심히 달렸지만, 계속 제자리걸음이었고 오히려 스스로가 비참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멀어지는 ‘환상 속의 나’를 보며 울고만 있었다. ‘진짜 내 모습’이 바로 눈 앞에 있었는데 말이다.


책 ‘혼자 있고 싶은데 외로운 건 싫어 (피터 홀린스, 공민희(역), 포레스트 북스, 2018)’ 의 저자는 세상에는 외향적인 사람, 내향적인 사람 두 가지 부류가 존재하고 각자 에너지를 소비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한다. 모든 사람이 완전한 외향성, 내향성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고 단편적인 성격만으로 개인을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각자가 지닌 고유의 성질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한다.


나의 이상은 사실 외부의 것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여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했기에, 그 거짓들을 버리고 마음이 가는 방향을 따르기로 했다.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산책을 하면서 나는 그저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일 뿐 이상한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인생은 원래 고독하고 불행한 것이며 이를 받아들여야만 희망을 찾을 수 있음을 느꼈고, 그 감정들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시를 통해 고독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을 보았고, 그것이 이제껏 내가 고독의 망망대해에서 찾아 헤맨 희망이었음을 알았다.


시를 쓰며 나는 모호하지만 생생한 것이 있음을, 죽음을 바라는 동시에 구원을 바랄 수 있음을, 전부가 아닌 것에 전부가 담길 수 있음을 본다. 거창한 말 같지만, 우리 보통의 인생과 같다. 세상은 언제나 모순적이고, 알 수 없는 감정이 우리를 강렬하게 압도할 때가 많다. 우리는 죽고 싶지만 어떻게든 잘 살고 싶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기를 바란다. 이 고독하고 불행한 세상 속에서 나는 글과 시를 쓰면서 내 발자국을 남기고 싶다. 지쳐 쓰러지고 싶을 때, 뒤돌아 본 발자국이 나의 것만은 아니길, 수많은 사람들의 것과 함께이길 바라면서 말이다.


낮에 보았던 저수지에는 쓰레기가 가득해 더러웠지만, 밤이 되고 어둠이 내리니 검은 물결 위로 별빛들이 일렁거려 마치 은하수를 보는 듯했던 경험이 있다. 사실 그 빛은 저수지의 것이 아니라 내가 창조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아름다움을 느꼈다. 행복은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불행한 우리의 삶을 가려주는, 고통스러운 순간을 깨뜨리는, 일렁거리는 환상. 우리는 이를 위해 사랑을 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이의 눈동자에 비치는 나의 모습이 빛나고, 아름다워 고독하고 불행한 삶을 잠시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름다움의 기한은 짧기에, 우리는 다시 고독한 삶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우리는 자주 고독 속에서 불행을 돌아보고 또 자주 사랑 속에서 행복을 찾아야 한다. 두 개의 균형을 맞추다 보면 언젠가는 불행과 행복 사이를 맴도는 꽤 괜찮은 인생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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