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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생 Aug 20. 2020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1등으로 살기

기억될만한 삶을 살고 있으니 굳이 애쓸 필요 없다

안녕, 일등?


ㅇㅇ초등학교 3학년 1반 문을 열고 들어선 나를 보며 한 아이가 인사를 건넸다. 반 등수가 적힌 종이가 칠판에 붙어있었고 각자의 이름을 확인하려는 아이들로 교실은 시끌벅적했다. 그때 아이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쟤가 1등이래. 이번엔 쟤야.” 심장이 쿵떡 쿵떡 뛰었고, 얼굴은 벌게졌다. 속은 설레어 미칠 지경이었다. ‘내가 진짜 일등이라고?’


그 날은 우리 반이 온 학교를 돌아다니며 아침 쓰레기를 줍는 날이었다. 쭈쭈바 껍질을 줍는 나에게 ‘전 1등’이 다가왔고 자신이 졌다고 1등 축하한다는 말을 하고는 자기 친구들과 팔짱을 끼며 갔다. 나도 모르는 새에 무슨 시합을 뛰고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패배를 인정하고 상대의 승리를 축하하는 그 멋진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이후 조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러일으켰다. “우리 반 1등에게 모두 박수” 아이들의 박수 소리가 들렸고 나는 평생 동안 받아본 것보다 더 많은 관심을 체감하며 얼떨떨하게 서있었다. 아이들은 그 날 하루 종일 나를 ‘1등’이라 불렀다. 그 익숙하지 않은 관심이 불편하긴 했으나 기분은 매우 좋았다.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고 이것이 1등의 인생이라고 말하는 거만한 속마음을 숨기고 나를 부르는 아이들을 향해 인자하게 웃었다. 아무튼 그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급식에 맛없는 반찬이 나와도 꼭꼭 씹어 먹었고, 미워보이던 담임 선생님이 사람 좋아 보였다. 집으로 당장 뛰어가 엄마에게 1등을 했다고 자랑을 했다. 엄마는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고 내일이 기대되는 하루였다.


다음 날부터 선생님들이 시험지 풀이를 했다. ‘전 1등’을 했던 아이는 자신이 틀렸던 문제마다 손을 들면서 “채점 잘못하신 거 같은데요. 제가 쓴 것도 답인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며 몇 개의 빗금을 동그라미로 만들었다. 그 아이는 나를 계속 쫓았고 답이라 우기던 한 문제가 정답으로 인정받지 못하자 그 지독한 경기를 끝냈다. 내가 1점 앞섰기에 마음을 놓고 여전히 1등이라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난 후, '전 1등'이 나에게 와서 과학 시험에서 1문제가 틀린 답으로 채점되었으니 알아두라는 말을 하며 참고로 자신은 이 문제를 맞아서 점수가 올라갈 것이라 했다. 시험지를 꺼내 확인해보니 나는 그 문제를 이미 틀렸고 또한 정답이 아닌 것을 골랐기에 점수는 바뀌지 않을 예정이었다. 머리가 복잡한 채로 집에 와서 시험지를 책상에 펼쳐두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시험지에 쓴 답을 정답으로 티 안 나게 바꾸어 점수가 올라가면 1등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엄마에게  "엄마, 나 이거 틀리면 1등 아닌데 그냥 답 바꿀까?"라고 물었고 엄마는 굳이 그럴 필요까지 있느냐고 되물었다. 엄마는 내가 1등이 아니어도 괜찮은 것 같았고 나는 괜찮지 않았다. 나는 지우개로 내가 쓴 답을 지웠고 정답으로 바꿔 적었다. 그리고 다시 시험지를 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이 너무 싫었고 나는 바꾼 정답을 지우고 원래 내가 썼던 답을 다시 적었다. 결국 내 점수는 오르지 않았고 나는 더 이상 1등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소수만이 아는 사실이었고 여전히 반 아이들 대다수는 나를 1등으로 기억했다. 이후에 아이들이 나를 1등이라고 부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쿡쿡 찔렸다. 동네방네 자랑하고 싶었던 첫 1등은 그렇게 꽁꽁 숨기고 싶은 불편한 1등이 되었다.


그로 인해 나는 약간의 공포증이 생겼다. 채점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등수가 나와도 확정이 되기 전까지는 불신했다. 나는 절대 가채점을 하지 않았다. 먼저 채점한 점수가 잘 나와도 이후에 바뀔 수 있고 만약 그런다면 그때 느낄 실망감이 너무 클 것 같아서였다. 또한 내 점수를 다른 사람이 아는 게 싫었다. 시험 결과가 나오기도 전에 가채점한 점수로 등수를 매겨보는 아이들이 많았던지라 내 이름이 점수를 등에 엎고 이리저리로 불려 다니는 게 싫었던 것이다. 그러다 나는 다시 ‘1등’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게 되었다. 


공부잘하니까 좋냐?

학교에서 소위 잘나가는 아이들이 지나가는 나를 불러 세우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중학교에 가면서 반을 편성하기 위한 용도로 진단고사를 보았고 아무 부담 없이 문제를 풀었는데 입학하고 몇 주가 지나자 내가 진단고사에서 1등을 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 아이들은 나를 1등이라고 불렀다. 내심 기분이 좋기는 했으나 동시에 짐이 하나둘씩 쌓이는 듯했다. 나를 1등이라고 부르는 이 사람들의 관심을, 기대를 앞으로도 내가 충족시킬 수 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말이다. 첫 1등의 기억이 떠올랐다. 1등을 빼앗겨서 쪽팔렸던 그 기억. 그 쪽팔림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고 사람들이 나를 계속해서 ‘공부 잘하는 아이’로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입학 후 한동안은 열심히 공부를 했던 것 같다.


이후 몇 번의 시험에서 1등을 했고 나는 확실히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었다. 시험이 끝나고 한 아이가 이번 1등이 누구냐고 선생님에게 물었고 선생님은 “뭐, 이번에도 똑같지.”라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교무실을 청소하고 있던 나는 그 대화를 들었고 선생님의 눈빛을 보았다. 그녀는 내가 1등인 게 마음에 안 든 모양이었다. 그 옆에 있던 선생님은 나에게 “너는 생긴 것만 보면 공부 못하게 생겼는데 참 신기해.”라는 말을 했다. 하긴 수업은 열심히 안 들으면서 시험만 잘 보는 나를 어떤 선생님들이 예뻐하겠는가. 그것까지는 이해가 갔는데, 정말 이해가 안 갔던 것은 나에게  1등의 품위에 대해 논하는 것이었다. 한문 수행평가에서 이름을 한자체로 쓰는 숙제가 있어 열심히 공들였는데 점수를 보니 60점이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100점을 받았기 때문에 내 점수는 거의 최하점에 가까웠다. 이해가 가지 않아 한문 선생님을 뵈려고 교무실 문을 열자마자 나에게 화를 내면서 “너는 1등이라는 애가 지 이름 하나도 한자로 못쓰냐? 그러고도 네가 1등이냐? 우리 학교 1등이라고 하면 다른 학교에서 비웃겠다. 부끄러운 줄 알아. 부끄럽다. 부끄러워.” 알고 보니 내가 성씨의 한자를 착각하여 다른 한자를 적어 낸 것이었다. 점수는 고쳐지지 않았고 나는 추가로 이름을 더 써서 제출하는 숙제를 받았다. 뭐, 이름을 한자로 못썼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매를 들 수도 있고 60점을 줄 수도 있다. 하지만 거기서 왜 ‘1등’이라는 단어가 나와야 하는지 이해가 안 된다. 나는 그저 내 이름을 한자로 못쓰는 아이일 뿐이었지, 어디 가서 부끄러움을 당할 만한 아이는 아니었다. 나는 단 한 번도 어디 가서 내가 00 중학교 1등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왜 선생님이 더 난리인지. 학생들에게 품격 교육하기 전에 교사로서의 품격을 한 번 돌아봤으면 좋겠다는 말을 지금이라도 건네고 싶은 심정이다.

공부를 방어막으로 썼다.


고등학교에 진학하자 마음이 급해졌다. 설렁설렁 공부해도 점수가 곧잘 나오던 중학교와는 달리 고등학교 공부는 너무 어려웠다. 선행학습을 하지 않아 수업을 따라가는 것이 벅찼고 나보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 지천에 깔리니 마음이 급해졌다. 명확한 목표도 꿈도 없이 공부를 하다 보니 의욕이 안 생겼고 한 번 미끄러지면 끝이라는 생각에 자꾸만 불안했다. 1등급은 겨우 13명만이 받을 수 있었고, 그 자리를 두고 2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피 터지게 경쟁을 했다. 나도 그 1이라는 숫자를 쟁취하기 위해 참전을 했고 때로는 이겼고 때로는 졌다. 또한 생활기록부를 채우기 위해 교내 대회에 나가 1등을 해야 했으니 몸은 하나인데 여기저기 싸워야 할 전투가 너무 많았다. 그럼에도 아마 졸업하고 나서 돈도 많이 벌고 명예도 얻어서 원하는 집과 차, 옷을 사고 떵떵거리며 살 수 있겠지라고 되뇌며 3년을 보냈다. 그렇게 한 곳에 합격을 했고 잠시 동안 기뻤지만 이후에는 계속 방황했다. 20년을 살던 고향을 떠나 연고 없는 곳에서 적응하기란 매우 힘들었다. 마음의 문이 닫혔고 스스로를 외부인이라고 느꼈다. 그렇게 고독감에 허우적대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왔는데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너무나 막연했다. 이제까지 아무것도 한 게 없다는 생각에 좌절감이 들었고 번아웃이 왔다. 그렇게 열심히 1을 위해 공부해서 명문대에 오고 또 치열하게 학점 따려고 노력했는데, 나 지금 뭐지? 일종의 열등감이었다. 어릴 적에 만났던 ‘전 1등’, 나에게 ‘짜증 난다’고 말했던 아이, 나를 깔봤던 선생님보다 더 좋은 학교에 갔고 이제 더 이상 공부 때문에 쪽팔릴 일이 없는데 나를 1등으로 기억해주는 사람이 많은데 왜 나는 속 시원하지가 않지?


결핍은 오직 내면의 힘으로만 채울 수 있다.

나에게는 여전히 많은 결핍이 존재했기 때문이었고 그것은 단순히 명문대의 이름이나 내가 그로 인해 얻을 수 있는 돈이나 명예로 채워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은 까닭이었다. 나는 이제껏 1등이라는 멋스러운 말을 방패막으로 삼고 단점들을 가리려고 애를 써왔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내면을 돌보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 나의 단점에서부터 벗어나지 못할까 봐 불안에 떨었고 틈만 나면 상황이 좋지 않다는 말로 나의 꿈들을 짓밟았다. 나는 언제나 나에 대한 사랑이 부족하여 가난했다.

 외부의 가림막은 언제나 나를 배반할 수 있고 결핍은 오로지 나의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다. 너무나 늦게 깨달아버린 지금, 나는 스스로가 묶은 족쇄를 풀고 정말 쪽팔리지 않게 스스로를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선생님이 나를 불러일으켜 1등이라는 이유로 박수받게 하지 않았더라면 그래서 아무도 내가 잠시 동안 1등이었다는 것을 몰랐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전 1등이 본인의 틀린 답을 정답으로 고쳐 점수를 바꾸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하지 않았을 테고 내 시험지를 들고 틀린 답을 정답으로 바꿀까 말까 고민하지도 않았을 테고 무엇보다도 자꾸만 내 귀에 울리는 ‘1등’과 박수 소리에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때의 나에게 한마디만 해주고 싶다. “1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결과를 정직하게 받아들이는 게 중요한 거야.” 그래, 1등이든 100등이든 그것이 나의 것임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억울할 일이 뭐가 있고 죄스러울 일이 뭐가 있겠나..


중학교 때, 누군가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말고 “잘했다.”라고 조금 틀려도 “괜찮다.”라고 해줬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본인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라고 믿고 나를 쉽게 판단하고 깎아내리는 이들의 말을 무시하고 허영을 강조하고 실수를 부풀려 나를 억누르는 이들의 눈빛을 무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나일뿐이라고, 누군가의 비교 대상이 아니고 어딘가에 내놓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 아니라고 소리칠걸 그랬다.


스스로에게 “네가 뭘 하든 응원해”라고 자주 말해줬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나는 조금 덜 고독했을 것이고 덜 쪽팔렸을 것이다. 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결핍은 오직 사랑만으로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것에 서툴고 가끔씩은 또 스스로를 해하려 하지만 괜찮다. 사랑하는 나도, 미워하는 나도 어차피 다 나이기에 멀리 돌아가도 결국엔 한 곳에 모일 것이란 걸 안다.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나?


우리 모두는 기억될만한 1등의 삶을 살 수 있다.

세상이 1등만 기억한다는 이야기는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굳이 세상을 향해 내가 1등이라고 악쓸 필요가 있을까?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나 자신을 1등을 놓고 산다면 언제나 기억될만한 삶을 살 수 있는데 말이다. 우리 모두가 1등인데 구태여 서로 다투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위해 욕심낼 필요가 있을까? 세상은 공평하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은 결국 자신을 1등으로 두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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