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망생 Sep 11. 2020

머리카락을 싹둑 자르고 일어난 변화

자연스러운 삶을 위해

꼭 허리까지 길러서 찰랑찰랑 긴 머리를 휘날리고 다닐 것이라는 다짐이 무색하게 숏커트를 했다. 동네 미용실에 가서 '아무렇게나 아주 짧게 잘라주세요'라고 말했고 싹둑 잘라져 나가는 머리카락들을 거울을 통해 보았다. 이상한 전우애를 느꼈다. 그동안 붙어있느라 고생했던 머리카락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뜯어 가며 빗기느라 고생했던 나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고 싶었달까. 숏커트를 치겠다는 결심은 사실 충동적인 면이 강했는데, 자르고 나니 진작 자르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만족스럽다.




작년 봄, 중간고사가 끝나고 쌓여 있던 스트레스를 풀고자 무작정 미용실로 달려갔다. 탈색을 하면 두피가 아프다는 말을 들어서 겁이 났는데 조금 따가운 느낌만 들고 아프지는 않았다. 검은 염색을 했던 머리라 색이 잘 빠지지는 않았지만 몇 시간에 걸친 2번의 탈색 끝에 샛노란 머리카락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머리에 다시 회색빛을 물들여 TV 속 아이돌과 같은 머리 색이 되었다. 내 얼굴이 아이돌이 아닌 탓인지 그와 비슷한 느낌은 없었지만 무언가 새로운 내가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회색빛은 딱 5일 가고 색이 빠져 노란 머리가 되었다. 뿌리에서 검은 머리가 새로 나 노란 머리와 층을 이루고 '뿌염이 시급한' 머리가 되었다. 뿌리를 탈색해 노랗게 만들고 여러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기 시작했다. 파란색, 초록색, 분홍색, 보라색, 밝은 갈색 등. 한 번은 지하철에서 내 옆자리에 앉으신 아주머니가 내 머리를 보며 색이 예쁘다며 칭찬을 하셨다. 염색에 질려 이제 그만할까 싶었던 마음이 다시 들떠 또 머리에 헛짓을 하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거의 빗자루 되어 한 움큼씩 빠질 지경이 되어서야 다시는 머리를 혹사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으로 머리카락을 어두운 색으로 덮었다. 머리가 거추장스러운 것이 되어 머리를 감고 제대로 말리지도 않고, 꽉 묶고, 엉킨 머리를 마구 빗다 보니 두피가 엉망이 되었다. 이렇게 살바엔 차라리 머리카락이 잡히지 않는 게 더 낫겠다 싶어 아예 잘라버리기로 했다. 아무도 내 머리카락에 관심 없는데 내가 편한 게 제일인 것 같아서.




머리카락을 자른 당일에는 많이 어색해서 괜히 잘랐나 싶었다. 하지만 다음날 머리를 감고 나온 후부터 숏커트의 진가를 알 수 있었다.


1. 머리 감을 때 너무 편하다.

머리가 길 때는 두피를 구석구석 씻고 싶어도 엉킨 머리카락이 방해를 해서 머리를 잡아 뜯어야 했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빠지고 개운한 느낌도 없어서 트리트먼트를 두피까지 발라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하고 다시 여러 번 감았다. 지금은 엉킬 머리카락이 없고 두피 마사지기로 구석구석 씻을 수 있다. 트리트먼트는 모발에만 바르고 한 번 씻어내면 말끔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샴푸도 아끼고, 트리트먼트도 아끼고, 물도 아끼고, 시간도 아낄 수 있다.


2. 머리 말릴 때도 너무 편하다.

탈색모는 잘 마르지 않아 오랫동안 드라이기의 뜨거운 바람으로 말려야 했다. 나는 그것이 귀찮았기 때문에 그냥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머리를 방치하고 다른 일을 했다. 그러다 보니 찝찝한 느낌이 나고 마르지도 않는 머리를 아무렇게나 틀어 올려버리니 두피가 남아나지 않았다. 머리를 자르니 물이 뚝뚝 떨어질 것이 없고 수건으로 물기를 턴 다음 드라이기의 찬 바람으로만 말려도 충분하다. 두피도 건강해지고 오랫동안 뜨거운 드라이기 바람을 맞을 필요도 없어서 매우 좋다.


3. 욕실이 깔끔해진다.

머리가 길었을 때는 물이 여기저기로 튀어서 항상 씻고 나오면 욕실 밖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이상하게 머리를 자르고 나서는 욕실 밖으로 물이 새어 나가지 않고 거울에도 물이 덜 튀긴다. 머리가 짧아지니 목욕 시간도 줄어들고 씻는 것 자체가 간편해져서 그런 듯하다.


4. 물욕이 줄어든다.

짧은 머리에 따라 스타일이 바뀐다. 머리를 꾸미지 않으니 굳이 얼굴이나 옷을 부자연스럽게 꾸밀 필요도 없다고 느낀다. 머리가 편안해지니 얼굴도 몸도 편한 것을 원하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도 그 편이 훨씬 자연스럽고 생기가 있어 보인다. 색조 화장품, 새 옷, 액세서리를 살 필요가 없다. 나에게 길들여진 나의 것들로 삶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진정한 '나의 스타일'이라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장롱에 옷이 쌓여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화장대에 한 번 쓰고 버려둔 색조 화장품을 전시하고 머리에 돈을 쏟아부을 때, 하나를 사면 또 다른 하나가 가지고 싶고 또 사고 싶고 또... 계속되는 도돌이표 끝에 남은 것은 빈 통장 잔고밖에 없다. 옷장에는 입지 않는 옷이 애물단지처럼 쌓여 있고 서랍에 처박아둔 립스틱이 유물로 발견되고 머리는 빗자루가 되고... 다시 또 사고 사고 사고... 머리카락을 끊음으로써 이 도돌이표를 끊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좋은 예감이 든다.


5. 거울을 잘 안 보게 된다.

머리가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와 상관없이 거울을 잘 안 보게 된다. 머리가 길었을 때는 여러 이유들로 거울을 자주 들여다보았다. 머리가 너무 상해서 보고, 지금 머리가 안 어울리는 것 같아 보고, 어떤 머리가 더 나을까 상상하면서 보고, 묶을까 말까 고민하면서 보고, 빗으면서 보고 등. 나는 거울을 통해 처음에는 머리를 보고, 얼굴을 보고, 몸을 보고 자연스럽게 단점을 찾는다. 머리카락에 대한 생각이 '머리가 문제가 아니라 얼굴이 문제야, 아니 얼굴보다는 몸이 문제지'라는 생각으로 껑충 뛴다. 거울은 알게 모르게 나의 의식을 조종하고 그 횟수가 더해질수록 의식을 지배한다. 머리를 자르니 굳이 거울을 볼 필요가 없다. 이미 잘린 머리카락, 마음에 들든 안 들든 되돌릴 수 없는 것이고 들여다볼 머리카락이 없으니 거울을 멀리하게 된다. 저절로 얼굴이나 몸도 덜 보게 되고 스스로에 대한 평가도 줄어든다. 실용적이지 않은 고민들로 스트레스받고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줄어드는 것이다.


6. 활기찬 느낌이 든다.

확실히 가볍다. 그리고 새롭다. 지금 상황에서 이것만큼 좋은 점이 있을까. 무언가를 버린 만큼 무언가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그 기대는 나에게 생각하고자 하는 의지를 주고 실천하고자 하는 동기가 된다. 지금은 작은 숨구멍도 소중하게 여겨지는 시기이니 나의 변화가 더 크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단점은 아직까지 없다. 앞으로 불편한 점이 생길 수도 있겠지만 편안함이 압도적으로 클 것 같아 계속 이 상태를 유지할 것 같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이고 의견이며 나의 변화를 기록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매거진의 이전글 1등만 기억하는 세상에서 1등으로 살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