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행운이라는 꽃말때문만은 아니다.
거리를 걷다가 콘크리트로 빼꼼 고개를 내민 클로버들을 보았다. 저 작은 것들이 여간 지독한 게 아니구나 싶으면서 회색 세상에서 푸른빛을 내느라 고생이 많다 싶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세 잎 클로버들 사이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았다. 행복의 꽃말을 가진 세 잎 클로버도 소중하다는 소리를 귀가 아프게 들었는데도 결국 나는 순간의 행운을 찾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단순히 행운만을 바랐다기보다는 네 잎 클로버에 담긴 추억들을 다시 꺼내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길을 가다가도 클로버만 보면 멈칫하는 이유는 어릴 적부터 이 식물과 아주 친밀했기 때문이다. 자주 가던 놀이터나 도서관 앞마당, 길가의 들판 어디서나 클로버를 볼 수 있었고 나에게 아주 좋은 놀잇감이었다. 토끼풀로 매듭을 짓기도 하고, 세 잎 클로버 사이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며 놀았다. 나는 여태껏 토끼풀과 클로버가 다른 식물인 줄 알았다. 토끼풀은 하얀 꽃이 피어 있는 풀이고 클로버는 세잎이 붙어 있는 풀이라고, 서로 다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토끼풀이 클로버고, 클로버가 곧 토끼풀이란다. 토끼풀의 꽃을 꺾으며 들판을 휘젓고 다니는 발 밑에 네 잎 클로버가 밟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러나저러나 토끼풀이자 클로버는 나의 유년기를 함께 했다는 점에서 변함없다.
토끼풀은 나에게 우정을 알려준 풀이다. 어렸을 적에 풀이 가득한 공원에 가서 토끼풀을 꺾으며 놀았다. 새하얀 꽃이 가운데에 달려있는 반지를 친구에게 건네며 너에게만 특별히 주는 거라고 속삭였고 아이는 곧 새하얀 꽃이 군데군데 박힌 왕관을 만들어 내게 씌워주었다. 해가 뉘엿뉘엿 지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면 우리는 시들어버린 반지와 왕관을 벗고 새로 꽃과 풀을 꺾어 다시 파릇한 장신구들을 만들어 서로에게 선물했다. 내일 꼭 다시 차고 만나자고 우리는 작은 손가락을 맞대며 약속했다. 다음날이 되면 꽃과 풀들은 무조건 시들시들해졌지만 나는 굳이 그것을 들고 다시 공원으로 갔다. 서로 약속을 지켰다며 자랑스레 어제의 것들을 내보이다가 그새 내팽개치고 새로운 오늘의 것들을 만들며 희희낙락거렸다. 지금은 토끼풀로 반지나 왕관을 만드는 법을 잊었지만 여전히 들판에 핀 새하얀 꽃을 보며 마음이 설레는 것은 그 속에 담긴 순수한 마음들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네 잎 클로버는 나에게 사랑이었다. 어릴 적 아빠는 자주 내 손에 네 잎 클로버를 쥐어 주었다. 들판만 보이면 그냥은 못 지나가는 이상한 호기심 때문에 나는 자주 아빠를 불러 세우고 네 잎 클로버를 찾아 달라 떼를 썼다. 우리 둘은 그렇게 아무 들판에나 쭈그려 앉아 네 잎 클로버를 찾았고 나는 하나도 못 찾는데 아빠는 몇 개씩이나 찾아 주었다. 아빠 눈에는 돋보기가 달렸나 하는 생각도 들고 원래 어른이 되면 뭐든 빨리 찾을 수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아빠라고 그 수많은 세잎 속에서 네 잎을 찾기가 쉬웠겠는가. 오매불망 자신만 기다리는 작은 손에 네 잎 클로버 하나 쥐어주고 싶어 눈에 불을 켜고 찾았던 거겠지. 네 잎 클로버를 끝끝내 찾지 못한 날은 그냥 세 잎 클로버를 두 개 꺾어 네 잎을 만들었다. 세잎이든 네 잎이든 그저 그 넓은 들판에서 작은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며 나를 생각했을 아빠의 사랑이 그 날 내가 얻은 가장 큰 행운이었을 것이다.
네 잎 클로버는 나에게 약간의 흑역사를 선사하기도 하였다. 초등학생 때 친구들과 노래대회에 참가했는데 그때 부른 노래가 네 잎 클로버였다. 엄청나게 잘 부르고 싶다는 생각은 아니었고 그저 완곡만 하자는 마음으로 임했다. 우리 차례가 왔을 때,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친구들의 손을 꼭 잡고 칠판 앞에 섰다. 선생님 두 분이 앞에 앉아 계셨고 그중 한 분은 훗날 나의 담임 선생님이 되셨다. 아무튼 노래를 시작했고 중간까지 어찌어찌 잘 가다가 하필이면 가장 밝아지는 '랄랄라'에서 음이탈이 나고 말았다. 선생님들은 어린 제자가 상처 입을까 아주 간신히 웃음을 참고 계셨는데 지금 내가 생각해도 좀 웃기긴 하다. 그래도 끝까지 열심히 불렀다. 마지막 가사인 '빛처럼 밝은 마음으로 너를 닮고 싶어.'를 꼭 부르고 싶었던 것이다. 유독 부끄럼이 많았던 내가 그 자리에서 고개 숙이지 않고 끝까지 서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아마 내가 가진 네 잎 클로버의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네 잎 클로버에게 한 번쯤은 인사를 건네고 싶다는 나의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저수지에 가니 제초작업이 한창이었고 무성했던 풀들이 마구 잘려나가 땅은 갈색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클로버였고 그때 처음으로 그 풀이 잡초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약간 당황스러움을 느꼈는데, 나의 우정과 사랑의 추억을 담고 있는 푸르른 풀이 잡초였다는 것이 놀라웠다. 아니 사실은 매번 클로버를 보면서도 한 번도 잡초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는지도 모른다. 내가 그동안 이 풀들을 얼마나 미화하고 있었나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잡초는 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풀을 일컫는다. 그래서 저수지의 클로버들은 잘려나갔고 마땅한 일이었다. 그들은 끈질기게 땅에서 솟아나 다른 식물들의 생장을 방해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네 잎 클로버를 보며 행운을 바라고, 세 잎 클로버를 보며 행복을 말한다. 한낱 잡초를 보며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으면서도 잡초로 태어난 운명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희망을 전하려 애쓰는 클로버가 기특하기도 하도 그런다.
나의 인생도 이와 같은 듯하다. 누군가에게는 해가 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된다. 예전에는 나에 대한 작은 험담에도 마음이 쓰여 세상의 모든 사랑을 의심하곤 했다. 지금은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고 미워하고 되갚아 주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의 아주 작은 좋은 점 하나 찾지 못하여 결점만을 걸고넘어지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불쌍히 여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에 타인의 결점만 보인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불행할까 싶은 생각으로 말이다. 그가 나를 미워함으로써 원했던 것은 분명 나의 미움이었을 터인데 그것에 반대함으로써 나는 소심한 복수를 하고 있는 셈이다. 누군가에게 해가 되는 사람은 곧 누군가에게는 사랑이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니, 미움에 너무 마음 쓰지 말고 눈을 돌려 사랑을 찾는 것이 세상의 이치에 더 맞는 것 같다.
나는 운명을 믿지 않지만 다만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람은 사랑을 간절히 바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잡초인 토끼풀을 나눠 가지며 우정을 느끼고 드넓은 들판에 잡초인 네 잎 클로버를 찾으며 사랑을 느끼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 운명을 부정하면서 한낱 잡초 따위가 무슨 사랑이냐고 인생이 이렇게도 팍팍한데 풀때기나 보고 있을 시간이 어딨냐고 스스로에게 못 된 소리를 하기도 한다. 그럴수록 마음은 아프고 허전하여 결국은 간절히 사랑을 바란다. 운명은 부정할 수는 있어도 거스를 수는 없다. 어차피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도록 태어난 운명인데 굳이 마음 아프게 부정하며 살 필요가 뭐 있나 싶다. 사랑을 부정하며 미움만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다. 그 사람이 나를 미워한다고 해도 상관할 일이 아니다. 사람은 운명을 부정한 만큼의 손해를 입는다. 그 사람은 그만큼의 손해를 입었을 테고 미움의 대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과 행운이다. 그것이 잡초든 아니든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식물은 꽃말대로 산다. 클로버는 잘라져야 하는 잡초임에도 불구하고 꽃말대로 사람들에게 행복과 행운을 가져다준다. 사람의 인생도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생이 화려하든 허접하든 각자만의 꽃말을 가지고 살면 그저 ‘기특하다’고 말해주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