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마지막~6월 첫째주
5월 29일 월요일
자동차 창문 너머로 엄마의 무릎에 앉아 있는 아이가 보였다. 한 손에는 노란 막대사탕을 들고 있었고 나머지 한 손은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내가 그 자동차 바로 옆에 다다르자 아이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의 눈을 바로 보았다. 손을 흔들면서 온 얼굴로 웃었다. 나도 그에 화답하여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신호가 바뀌고 차는 유유히 떠났다. 커다란 행운이 깃든 날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가끔 이런 행운을 맞닥뜨린다. 자동차 아래에서 식빵을 굽고 있는 길고양이나 대문 아래에 코를 내놓고 킁킁거리는 개를 발견하기도 한다. 유치원 버스에 타고 있는 어린이와 눈이 마주치기도 하고 아빠 손을 잡고 병원에 가는 아이와 대화를 하는 일도 생긴다. 장미가 길게 늘어선 화단에서 아들을 붙잡고 사진을 찍는 엄마를 보기도 하고 나비에 정신이 팔려 집에 가는 것을 잊은 듯한 아이와 그 옆에서 묵묵히 그를 기다려주는 아빠를 보기도 한다. 골목에서 줄넘기를 하는 소녀와 숫자를 세어주는 엄마, 같은 안경을 쓰고 같은 가방을 멘 어린 형제, 아이스크림이 녹아 손을 뒤덮어도 그저 해맑은 아이. 이런 행운들이 찾아올 때면, 희열이 솟구치는 것을 느낀다. 세상은 여전히 경이롭구나. 살아갈 힘이 생긴다.
5월 30일 화요일
길었던 겨울이 가고 봄, 그리고 여름. 길지 않을 것 같았던 머리는 어느새 자라 어깨에 닿아있다. 다 읽지 못할 것 같았던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시간은 통제불능의 미운 4살같다가도 세상사에 통달한 백발노인 같다. 그 간극에서 나는 부지런히 자라고 있다. 시간에게 상처를 입고 위로를 받고, 체념과 용기를 배운다. 많은 일들을 망각하고 약간의 일들은 기억한다. 사랑하고 미워한다.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것들이 시간 속에서 파도처럼 내게 밀려온다.
시간의 바다에서 유영하고 싶다.
5월 31일 수요일
5월의 마지막 날. 한동안 잃었던 쓰기를 되찾았고 잊었던 바람들도 기억해냈다. 하지만 그것들이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언젠가는 또 잃고 또 잊을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럼에도 다시, 처음부터 혹은 중간부터 다시 시작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면 된다. 끝을 향해 가지 않으면 멈추는 것이 두렵지 않다. 다시 걸으면 된다.
6월 1일 목요일
어제 보도블록 사이에 돋아난 새싹을 보았다. 오늘 다시 가서 사진을 한 장 남기려 했는데, 그새 사라져 있다. 옅은 비가 내린다. 이 비를 마시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새싹이 뽑혀나간 자리를 바라본다. 언젠가는 그 구멍도 메워지겠지.
6월 2일 금요일
디디에 에리봉의 [랭스로 되돌아가다]를 읽고 있다. 제목을 처음 보았을 때, ’ 랭스‘라는 철학이 있고 그것의 근본으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인 줄 알았다. 언어 혹은 문학 그리고 문화와 관련한 철학이라 생각했고 꽤 흥미가 생겼다.
1 챕터를 다 읽은 지금, 랭스는 철학이 아니라 프랑스 작은 도시의 이름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인 디디에 에리봉은 오래전 떠난 자신의 고향인 랭스로 되돌아가, 자신이 지금까지 외면하고자 했던 그러나 그의 뿌리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던 계급정체성을 발굴한다.
에리봉은 꽤 오랫동안 자신의 아버지, 어머니가 속했던 노동자계급을 경멸했다. 그들과는 자신의 취향을 공유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의 부모는 그가 추구하는 철학, 문학, 성적 취향, 그가 그의 정체성이라 여기는 대부분의 것들을 쓸모없거나 특이하거나 정상성을 벗어난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10대 후반에 그의 고향 랭스를 떠나 파리로 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자유를 얻었다. 게이 지식인으로서 자신이 원하는 학문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시골 노동자계급 출신으로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는데, 그가 새롭게 속하게 된 지식인 집단에서 성소수자는 후한 평가의 대상이지만 노동자에 대한 평가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그 집단 속을 떠도는 노동자에 대한 혐오의 공기를 마시며 한편으로는 분노를 또 한편으로는 불안을 느꼈다. 그는 분노를 숨기고 불안을 떨치기 위해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더욱 공고히 한다. 자신의 삶의 궤적은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항하며 그려진 것이고 노동자 계급과는 전혀 무관하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는 랭스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식인 계급에서 그들의 생활을 공유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에리봉은 성소수자 인권과 문화에 대해서 열렬히 연구했으나 노동자계급의 삶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몸져누웠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그를 보러 가지 않았다. 그는 그것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는데, 이미 그의 의식 속에 가족이란 자신에게서 멀리 떨어진 것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그는 어머니 홀로 남은 랭스의 집을 방문하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듣는다. 출생부터 어린 시절, 중단된 학업과 결혼, 생계를 위한 노동, 가정과 육아 등에 대해 그녀는 허심탄회하게 말한다.
에리봉은 이를 통해 어머니가 자신의 삶, 즉 교육받지 못한 노동자 계급으로서의 생활을 선택했다기보다는 강요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계급에 속한 그 누구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로 사회가 정해놓은 일정한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그 길은 사회의 내부로 이어지지 않고 끊임없이 외부를 맴돌게 설계되어 있다. 중등교육을 마치고 곧바로 공장 취업의 길로 들어서며 영원히 그곳에 갇히도록 말이다. 그들의 목소리는 사회 내부로 흘러들어 가지 않는다. 문학, 문화, 정치에서 그들의 존재는 묵살당한다. 애써 치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들은 사회 제도 내에서 사라진다. 대다수가 공고히 다져져 있는 길을 당연스럽게 여기며 따르기 때문이다. 에리봉의 어머니, 아버지, 동생들은 조상들이, 친척들이, 이웃들이 그랬던 것처럼 불평 없이 그 길로 들어섰다. 에리봉만이 예외였다. 그는 학업을 이어가길 원했고 사회로 진출하고자 했다. 무성한 풀들을 베어내고 새로운 길을 내어 사회 내부로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는 그것에 성공해 ‘특이한’ 사람이 되었다. 에리봉이 더 이상 노동자 계급에 속하지 않게 된 이후, 그가 만든 허술한 길에는 다시 무성한 풀이 자라났다.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 아쉬워하거나 다른 길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거론하지 않았다, 심지어 에리봉 자신조차도. 그것은 다만 ’ 예외적인 ‘ 일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예외’가 왜 여러 가족구성원 중 자신에게만 찾아왔는가, 에 대해 에리봉은 생각한다. 자신 또한 자신의 부모, 형제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그는 ’ 우연하게 ‘라는 말 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는 것을 느낀다. 다수는 교육받지 못하고 우연한 소수만이 교육을 받는 노동자 계급의 현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적어도 자신의 동생들만은 자신이 교육시킬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자신이 우연히 발견한 길로 그들을 이끌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 부르주아집단에게는 자명히 보여 당연하게 여겨지는 그 길이 노동자집단 다수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리하여 극히 드문 우연을 바랄 수밖에 없는 현실이 존재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회적 계급은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충분히 자신의 노력으로 삶을 개선시킬 수 있다, 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러나 에리봉은 이런 종류의 슬로건은 특정집단의 삶에 대한 무관심과 탈복지국가로의 지향을 정당화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특정 집단을 사회 제도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고 정치에 대해 무지하게 만들려는 속셈으로 ’ 계급‘을 지운 것이라고. 그로 인해 지배자층과 피지배자층의 간극은 더 멀어지고 더 공고해져 지배자들은 피지배자들을 더욱 손쉽게 자신들의 지지층으로 포섭한다. 여러 정치적 역사 속에서, 지배층은 필요할 때만 갖다 쓰고 쓸모가 없어지면 버리는 식으로 피지배층을 이용했다.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은 형식적으로는 맞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에리봉은 자신의 어린 시절의 경험을 통해 설명한다. 고급 아파트와 허름한 관리실 사이에는 고작 울타리 하나가 존재할 뿐이지만 그 두 공간에 존재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집단에 속한다는 것을 그곳의 모두가 알고 있다. 사회에서 계급을 없애려는 시도는 탈복지국가로의 전환을 위한 전초작업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이제 이 세상에는 계급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개인은 개인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다는 말속에 방치된 사람들이 있었다. 철저히 울타리 밖을 떠돌다 이제는 정말 잊힐 위기에 처한 사람들, 좁고 낡은 공간에 모여있는 이들, 게으르고 멍청해서 울타리를 넘을 수 없다고 평가받는 이들. 국가는 이 귀찮은 인간들의 불만을 처치하기 위해 개인의 능력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 편으로는 무능력에 대한 강조이기도 했다. 당신들이 못 하는 걸 우리 보고 어쩌라고, 무책임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6월 3일 토요일
갈 수도 있었을 길에 대해 생각한다. 그랬다면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을까.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란 장담은 못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자신이 가지 않은 길에 미련을 남기지, 그건 아마 무지에서 오는 걸 거야, 내 것이 아닌 건 결코 알 수 없으니까.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부리지 말자, 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모르는 것이 많아서 서러운 날이면 그런 자기 위로는 통하지 않아, 그래도.
괜찮다고 또 다독여봐.
6월 4일 일요일
내가 살아오면서 들은 조언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가슴 뛰는 일이 없으면 그냥 나가서 달리라.” 는 말이다. 그 말을 들은 당시에는 그게 허무맹랑하게 느껴졌는데, 좀 더 살아보니 저 말이 맞는 것 같다. 정신적이라고 생각했던 많은 부분들이 실은 육체와 연결되어 있었다. 정신에 가두어두었던 것들을 육체로 발산하는 순간, 가시적인 성장이 일어났다. 10미터도 가지 못했던 내가 100미터를 수영할 수 있게 되고 팔을 1번 굽히면 무너졌던 내가 10개를 거뜬히 해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그제야 내가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된 것을 믿게 되었다. 너무 애쓰지는 않되 꾸준히, 건강하기만 하면 뭐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