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게 살아보자
5월 22일 월요일
꽃다발을 들고 가는 사람에게 흥미가 생긴다. 저 꽃 한 다발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제 멋대로 상상해 본다. 성별도 연령도 다 다른 사람들의 손에 들린 꽃들은 모두 다른 꽃말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며칠 전에는 한 손에는 작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한 손에는 하늘색 포장지로 싸인 꽃을 들고 가는 중년의 남성을 보았다. 그는 어떤 것을 기념하고자 했을까. 부인과의 결혼기념일? 자녀의 생일? 딸의 초경을 축하하기 위해서거나 아들의 전역을 환영하기 위해서일 수도 있다. 어느 것이든, 그는 그 꽃을 고르고 포장하는 동안 그가 사랑하는 이들을 떠올려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는 순간들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용서는 찾아왔고 사랑은 채워졌다는 것을, 여전히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기뻐했을 것이다.
다정함이 물질이 된다면, 그것은 아마 꽃을 담은 모양을 하고 있을 것이리라. 피고 지는 꽃들. 그 짧은 아름다움을 위해 긴 시간을 견뎌내고, 곧 질 것을 알면서도 애써 꽃잎을 활짝 피는 그들. 그들이 그럴 수 있는 것은 자연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자연의 흐름과 순환을 거스르지 않고 추함과 아름다움을 구별하지 않고 그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필 것을 알기에 지는 것이 두렵지 않은 것이다.
다정함이란 그런 것 아닐까. 상처입을 것을 알면서도 애써 사랑하는 것. 결국에는 떠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 사랑이 다시 올 것임을 믿는 것. 혼돈이 가득한 세상에서 다정함을 지키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거스를 수 없는 흐름과 일정한 순환주기 속에서 서로의 일부를 공유하며 살아가는 존재들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다정함은 자연스럽게 내게 올 것이다. 색색의 포장지에 싸인 꽃다발의 모습으로.
5월 23일 화요일
목표를 향한 삶이 내게는 맞지 않음을 자주 느낀다. 목표는 필연적으로 욕심을 불러일으키고, 언젠가는 수단이 목표를 압도해 버릴 것이다. 주체성을 잃은 삶은 살아지는 것에 불과하다. 나는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경이를 누리고 싶다. 나는 그저 살고 싶다.
내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자주 생각한다. 목록들을 점검하면서 기존의 것을 지우거나 새로운 것을 추가하고 우선순위를 매기는 일을 즐긴다. 목록들의 선정기준은 다음과 같다. 먼저, 목적 없이 행할 수 있어야 한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감각뿐이어야 한다. 다음으로는,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너무 즐겁거나 너무 괴롭지 않은 톤이 일정한 일이어야 한다. 또한 중간에 멈추더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한다.
노래를 듣고 흥얼거리는 일과 책을 읽다 조는 일, 산책을 하다 하늘을 보는 일. 나는 이 일들만 할 수 있다면, 뭐든 괜찮다. 살아갈 수 있다. 목표 없이, 그저 생을 누릴 수 있다.
5월 24일 수요일
최진영의 ‘해가 지는 곳으로’를 다 읽었다. 한참 전에 샀던 책인데, 손이 가지 않아 묵혀 두었던 것이다. 그동안에 최진영의 다른 작품들을 몇 개 읽었는데, 단편 소설집 ‘겨울 방학‘, 장편 ’내가 되는 꿈’, ‘이제야 언니에게’, 그리고 최근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홈 스위트 홈’까지. 나열하고 보니 꽤 많다. 최진영을 처음 안 것은 단편 소설집 ‘겨울 방학’을 읽으면서였다. 중고서점에서 다른 책을 사면서 아무 생각 없이 끼워 산 것이었는데, 읽으려고 샀던 다른 책 보다 이게 더 좋았던 기억이 있다. 최진영은 다양한 문체를 구사하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한없이 다정하다가도 한없이 냉담해지고, 그로테스크해지기까지 하는, 다채로움이 좋다. 그는 주로 그때는 알 수 없고 시간이 지나야 만 알게 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당연한 듯 곁에 있던 것들이 사라졌을 때 느끼는 상실과 슬픔,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사랑에 대해 자주 쓴다.
‘해가 지는 곳으로’ 또한 그러한 이야기의 하나이다. 멸망하기 직전인 세계에서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각자만의 발악을 한다. 세상이 무너졌는데도 힘의 차이는 여전히 공고하다. 권력은 모든 것이 무너진 세계에서 오히려 더 도드라진다. 성인과 아동, 남성과 여성, 비장애인과 장애인. 어떠한 보호막도 없는 사회에서 강자는 약자를 약탈하기 더 쉬워진다. 재난으로 폭력을 정당화시키고 타인을 죽이는 것에 거리낌이 없다. 힘의 차이는 갈수록 더 커지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힘에 편승하여 생존하고자 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을 죽이고 자신까지 죽이려 했던 이들에게 충성을 맹세하기도 한다. 세계는 다름이 아니라 그로 인해 멸망한다. 생을 독식하고자 하는 이기심이 아직 남아있는 가능성들을 불식시킨다.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폭력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이 멸망을 부추기는 모순의 고통은 순전히 약자들의 것이 된다.
그러한 고통 속에서도 그 편에 서지 않는 이들이 있다. 이 세계의 땅과 강, 산과 바다, 햇빛과 달빛이 소수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는 이들. 그들은 멸망으로 향해가는 사람들과 발맞춰 걷지 않는다. 그 반대편에서 작지만 강한 투쟁을 이어간다. 빛나고 단단한 보석을 마음속에 품고 사랑을 약속한다. 그들은 해가 지는 쪽으로 걷지만 그 길은 결코 멸망을 향한 길이 아니다. 강자들이 밟고 지나간 폐허가 어둠 속에 잠기고 작은 불꽃이 피어오른 곳. 그 온기 앞에서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사랑을 속삭이는 곳, 사라진 줄 알았던 희망이 아직 남아있음을 확인하는 곳이다. 그들은 간절하게 서로의 생존을 바란다. 살아있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한 믿음은 살고자 하는 의지로 이어진다. 우리가 언젠가 만나기 위해서는 너뿐만 아니라 나 또한 살아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당신의 생존을 바라는 마음에서 사랑은 발명된다. 그것을 사랑이라 명명하지 않더라도, 분명 사랑이다. 그것이 당신과 나를 살린다는 믿음만이 멸망 직전의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책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며 새로운 가족의 형태를 제시한다. 여성인 엄마와 남성인 아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그리고 혈연으로 이어진 친족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규정한 전통적인 가족상을 해체한다. 사회의 규칙들이 사라진 땅에서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가족은 자고로 그래야만 한다는 암묵적인 룰들 또한 깨진다. 가족이라는 틀 안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던 이들은 멸망이 도래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틀 밖으로 나온다. 엄마, 아빠, 딸, 아들, 친척이라는 가면을 벗고 온전한 자신의 모습과 마주한다. 그들은 기존의 것을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 대안으로 나아간다. 그러한 과정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을 끈끈하게 연결하고 있는 사랑 때문이다. 결혼이라는 법적제도로는 포용할 수 없는, 그보다 더욱 진실된 서약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그들은 성장한다.
사회의 많은 문제는 가족에서 시작된다고, 나는 감히 생각한다. 현대 사회에서 가족의 붕괴는 빠르고 진행되고 있다. 그러한 균열은 퇴보하는 사회 제도 때문에 일어난다. 개인의 인식은 나날이 변하고 진화하는데 제도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간극에서 개인은 좌절하고 분노하며 때로는 세뇌당하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원치 않는 역할극을 이어가며 스스로를 감옥에 가둔다. 자신에게 수갑을 채우고 스스로를 매섭게 채찍질한다. 그러느라 진정 중요한 것을 잃는다. 사람은 사람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잊는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진다. 타인과 나의 생존, 공존은 사라진다. 그러한 멸망의 그림자가 세상의 곳곳에 퍼지고 있다.
세상의 멸망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혹여 그것을 막지 못하더라도, 그래서 완전히 망해버리더라도 사랑의 잔해는 남아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것이라고. 사랑이란 거창한 것이라 아니라 그저 나는 당신의 생존을 바라고 당신을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고백이면 충분하다고. 다 무너져 가는 세상 속에서 사랑을 역설하는 이 책이 나는 꽤 애틋하다.
5월 25일 목요일
주기적으로 한 단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즐긴다. 저번달에는 ‘다행’에 대해, 이번달에는 ‘명랑함’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나는 유머가 고도의 지적 활동이자 유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나와 표면의 부정적 감정들을 치유한다. 감정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만이 제대로 된 유머를 구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의 불온전함을 받아들이고 긍정하는 것. 다양한 불행 속에서도 긍지를 잃지 않는 것. 유머가 인간을 구한다.
한 때는 자기 연민에 빠져 스스로를 깊은 심해 속에 가두기도 했었다. 침잠하는 감정들을 적으며 나는 내가 불행하지 않을 때도 글을 쓸 수 있기를 바랐다. 당시에는 간절했으나 돌아보니 치졸하기 그지없다. 선택적인 기억에 의존해 많은 것들을 미화시키거나 악화시켰다. 나는 그런 식으로 시간의 흐름을 회피했다. 그 먼 길을 돌아온 지금, 나는 여전히 다양한 불행 속에 있지만 명랑함에 대해 쓴다. 나는 멜로드라마의 비련한 여주인공이 아니라 시트콤의 눈치 없이 해맑은 친구 2가 되고 싶다.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에 내내 유쾌하고 싶다.
5월 26일 금요일
매일 산책을 한다. 가끔은 이건 산책이 아니라 운동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걷는다. 나의 언니, 우정은 나의 산책 동료이다. 동네 한 바퀴 돌고 가자는 나의 제안을 그녀는 언제나 흔쾌히 받아들인다.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주로 밤에 산책한다. 달의 빛이 흐릿할 때 시작되어 그 빛이 명확해질 때까지 이어진다. 어제와 같거나 다른 거리를 걷는다. 오래도록 살아온 동네의 거리는 어디를 가도 익숙하지만 새로운 것을 찾아내기 위해 기를 쓴다. 이제 막 간판을 단 가게를 발견하는 날에는 신대륙을 찾아낸 듯이 기쁘다. 그것이 빵집이라면 그 기쁨은 배가 된다. 우리는 날이 밝을 때 이곳에 다시 와보자는 약속을 한다. 그 약속이 지켜졌던 적이 있었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우리는 매일 걸을 것이고 언젠가는 그 가게를 다시 찾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줄줄이 이어진 카페를 지나치며 나는 언니에게 언니도 꼭 언니만의 가게를 차렸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우정은 나중에,라고 짧게 답한다. 나는 나를 그곳의 바리스타나 홍보 담당자로 임명시켜 달라고 말한다. 보수는 적거나 아예 없어도 되고 다만 숙식이 제공되면 충분하다는 말로 그녀를 구슬린다. 우정은 같이 망하자는 소리냐며 싫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한다. 그 카페에서 책도 팔 것이라고, 특별히 엄선한 좋은 책들에 짧은 서평을 달아 전시할 것이라고, 매일 그날에 어울리는 시를 골라 책갈피를 만들 것이라고, 그런 건 일도 아니라고. 그러면 우정은 구워낼 빵에 대해 말한다. 페이스트리와 타르트, 갸또 케이크 같은 것들에 대해. 내가 너무 많이 먹어서 팔 게 없어지면 어떻게 하냐고 묻자 그녀는 그럼 그날로 내쫓을 거라고 답한다. 우리는 우리가 내뱉는 말들에 미련이 없다. 그저 상상의 세계를 자유로이 유영할 뿐이다.
걷고 또 걸으며 허무맹랑하지만 명랑한 말들로 우리는 우리의 유토피아를 구축한다. 한 걸음에 하나씩 쌓고 또 한 걸음에 하나씩 버린다. 집으로 돌아오면, 우리가 세웠던 빵집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아쉬워하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그것은 부수기 위해 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루의 버거움을 상상 속 그곳에 모두 버리고 우리는 현실로 돌아온다. 슬픈 일이 아니다. 내일 또 걸으며 새로운 이름의 빵집, 커피집, 책방을 만들어내면 되니까. 우리의 산책은 목적 없이 그저 즐겁다.
5월 27일 토요일
높은 건물의 끝을 보면서 그곳에 사람이 서 있는 상상을 한다. 그와 눈이 마주칠 확률에 대해 생각한다. 눈을 감는다.
그는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싱긋 웃는다, 너는 거기에 있구나, 하고 나의 존재를 확인하듯이. 나도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활짝 웃는다. 너도 있구나 거기에.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다시 만난 어린 시절의 친구처럼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이 넓은 세상,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가 눈을 맞춘 것은 기적이라고 나는 그에게 말하고 싶다. 여기에든 거기에든, 어디든 있으면 돼, 그것 자체가 기적인걸, 마음이 전해지길 바란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살아지는 삶이라도 그냥 살았으면 좋겠다. 나는 누구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 걸까.
5월 28일 일요일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젖은 아스팔트 냄새가 거리에 가득했다. 우산을 쓰기에도 쓰지 않기에도 애매한 빗줄기. 귀여운 우산이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 비가 오는 날도 조금은 설렐 수 있을까.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목덜미가 축축했다. 땀인지 비인지 모를 애매한 것이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지치고 지치고 지친다. 신발 속 양만은 자꾸만 내려갔고 가방은 물을 머금은 솜처럼 점점 무거워졌다. 청바지는 젖은 박스 상자처럼 눅눅해졌다. 나는 흐물흐물 녹아내렸다.
학교 운동장에서 조기축구회가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비인지 땀인지 모를 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차라리 그게 나은 거 같았다. 아예 뒤섞여버리는 거, 비인지 땀인지 구별할 의미도 없게, 이 축축함이 날씨 탓인지 내 탓인지 알 수 없게 빗속에서 뛰는 것이 더 나을지도.
그러다 문득, 간밤에 내가 축구클럽에 들어가는 꿈을 꾸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나와 또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는데, 꿈을 꾸는 당시에는 알았는데 깨고 나니 그가 누군지 잊어버렸다. 아무튼 우리 둘은 어떤 축구 클럽에 들어갔고 환영을 받았다. 축구 클럽에 들어갔으나 정작 축구는 하지 않은 채로 꿈에서 깼다. 축구가 하고 싶었다기보다는 축구클럽에 들어가고 싶었던 걸까. 환대와 소속감을 원했던 걸까.
어릴 적, 모르는 사람들과 축구를 한 적이 있었다.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던 아빠와 아들에게 다가가 나와 친구도 그 놀이에 끼워 달라 말했다. 그들은 흔쾌히 그러자고 했고 우리는 축구 비슷한 것을 했다. 공을 쫓아 뛰어다니기만 했는데 즐거웠다. 땀에 절은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나누어먹었다. 그리고 해가 지기 전에 헤어졌다. 그런 일이 가능했던 날들, 순수한 즐거움이 있었던 때가 그리워지는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