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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망생 May 22. 2023

일기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이 마음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5/15 월요일

 살을 빼야겠다는 마음이 들다가도 굳이 그럴 필요 없다는 마음이 반복된다. 대개 전자로 시작해 후자로 끝나기 때문에 살이 찐다. 내일부터는 정말 다이어트다!라고 외치지만 어느새 머릿속에는 내일 먹을 메뉴들이 떠다닌다. 겨우 뱃살 따위를 걱정하며 살아가서 다행이다. 소소한 근심이 가능한 것은 아주 커다란 불행이 없다는 의미일 테니까.


5/16 화요일

 인간이라고 해서 매일 해야만 하는 일은 없지만, 굳이 하나를 꼽자면 스쿼트라고 말하고 싶다.


5/17 수요일


 후배의 뼈를 때려 그를 이롭게 해야겠다는 인생선배 호소인들의 발언은 가증스럽다. 얼마 전, 너는 늙어서 뭐 해 먹고 살 거냐는 말을 들었다. 앞뒤 맥락을 살펴볼 때, 순수한 호기심에서 오는 질문은 아니었고 일종의 비아냥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네가 할 일이 있겠냐는 말이었다. 글쎄요, 살아 있으면 다행이죠,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그냥 웃어넘겼다. 말을 하는 것에도 꽤 많은 에너지가 필요한데 내게는 그런 힘이 남아돌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날 들은 것은 하루 내내 머릿속에 남아 굳이 상기시키려 하지 않아도 맴맴 울어대는 피곤한 성격 탓에, 나는 그 질문에 적합한 답에 대해 고민했다. 질문을 던진 이가 떠나고 나서, 질문이 던져진 곳에 혼자 남아.


 늙음이란 무엇인가. 안타깝게도 나는 아직 늙지 않아서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과거에는 곱게 늙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게 헛소리라는 걸 안다. 곱게 늙는다는 말은 노화의 본질을 거스른다. 그것은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노화는 인간이 생을 소진하며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인간 모두가 각자의 다른 삶을 살듯 노화도 마찬가지다. 곱거나 곱지 않은 것은 없다. 그저 나와 가치관이 맞거나 맞지 않는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지금의 나와 늙어서의 나는 같은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을까. 서로의 손을 부여잡고 짝짜꿍 하며 오손도손 살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연민하는 동시에 경멸할 것이다. 내가 어떤 식으로 늙었든, 우린 그러고야 말 것이다.


 늙음에 대해 내가 아닌 것이라고는 그것 하나다. 나는 언젠가 내가 연민하고 경멸하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로 다행이다. 젊은 날이든 늙은 날이든, 나는 좀 더 살아볼 만할 것이다. 용서와 반성, 그것들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무너지지 않는다.


 그는 이런 나의 생각을 알고 있을까. 지금의 내가 10년 전의 나를 연민하고 경멸하는 것을, 그럼에도 계속 살아갈 생각이란 걸 알고 있을까. 지금, 나는 그때의 내가 바라는 모습이 되지는 못했으나 그건 내게 아무 상관도 없다는 걸 알까. 내가 이제껏 용서하고 반성해 온 것들의 잔해를 그는 발견할 수 있을까. 내가 나의 생활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는지, 그걸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지 알고 있을까. 이 모든 것들을 모른 채로 삶에 대해 쉽게 내뱉어도 되는 걸까.


 나는 삶이 무엇인지, 늙음이 무엇인지 모른다. 나의 삶이 늙어가는 방향에 대해서는 더더욱. 늙어서 무엇을 해 먹고 살지도 모르겠다. 그걸 알아낸다고 해도 나는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나의 생활을 지켜내는 것이다. 과거의 내가 그리하여 지금의 내가 있듯이. 나는 늙어서의 나를 위해 그렇게 할 것이다. 연민하고 경멸하며, 끝내는 화해할 것이다.


5/18 목

 오늘은 비가 왔다. 여름이 다 온 듯한데 빨리 걸어도 땀이 나지 않았다. 천막 아래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보았다. 불어오는 바람에 손에 쥔 모든 것들을 날려 보내고 싶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착각임을 알고 있었다. 아름다움은 어디에나 있지만 나의 손아귀에는 없다는 것을 안다. 목적 없는 삶을 바랐다. 삶이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았으면 좋겠다.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나는 그저 바랄 뿐이었다. 야윈 참새 한 마리가 주위를 맴돌았다. 울지 않았다. 아마 혼자여서 그랬을 것이다. 그것들에게 울음은 소통의 매개체이지 감정의 분화구는 아닐 테니까.


5/19 금

 핸드폰이 망가졌다. 외관은 전과 그대로인데 화면을 터치해도 반응이 없다. 겉은 멀쩡해 보이는데 속은 썩어 있는 것들이 세상에는 참 많다. 스마트폰이 더 이상 스마트하지 않게 되었으니 나의 핸드폰은 본질을 잃은 것이다.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찾아보니 터치 없이도 화면을 작동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블루투스 마우스를 연결해 쓰는 것이다. 연결하면 핸드폰 화면에 마우스 커서가 나타나고 그걸 움직여서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다. 액정이 아예 깨져버렸다면 이 방법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속이 망가졌어도 겉이 멀쩡하다면 그나마 소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망가진 것의 생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큰 대가가 따른다. 그것을 이겨내지 못하면 그것은 곧 버려질 것이다. 망가진 핸드폰을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블루투스 마우스와 키보드가 필요하다. 터치가 필요한 순간마다 마우스를 꺼내 커서를 움직여야 하고, 멈춰 있는 때가 아니면 자판을 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언제까지 이 불편을 감내할 수 있을까. 이렇게 까지 하면서 이 기계를 살려두는 것이 맞을까. 알 수 없지만 아직은 살리는 편을 택하겠다.


5/20 토

 수영을 안 한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 그토록 좋아하던 일을 이제는 그만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시간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것들 앗아갈까. 그러나 또 그만큼 많은 것들을 주겠지. 지금은 그저 멀리에서 오고 있는 것들을 서글픈 마음으로 기다리는 수밖에.


5/21 일

 책상 앞에 앉아 창문 밖을 쳐다본다. 회전교차로가 정면으로 보이는데 교통량은 그리 많지 않다. 하교시간이 되면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길을 건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보다 더 어린아이들은 부모 손을 잡거나 유모차에 탑승한 채로 길을 건넌다. 몇몇 아이들은 횡단보도의 시작에서 끝까지 팔을 어깨 높이 들고 간다.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랬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오랜 시절이 흘러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을 보는 것이 좋다. 모든 것들이 새로웠던 옛날로 결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내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위로가 된다. 나 또한 명랑했음을, 나를 괴롭혔던 기억들이 그렇게 나쁜 것들은 아니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그런 식으로 세상을 미화시키고 싶은 충동이 인다. 한 아이의 짧은 팔과 작은 손바닥에 이렇게나 많은 사랑이 담겨 있는 것이 새삼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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