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보객, 건축가, 운전자, 그리고...
당대의 기술 조건을 통해 제시되는 '세계'란, 너무나도 당연하게 시대별-세대별로 다르게 조망된다. 그 기술조건은 세계와 인간의 접속 방식이라는 인터페이스로 세계를 감지, 감각, 인지하는 방법론이나 툴로 세계상을 다종다양하게 (재)구성하게 만들어냈다. 이에 대한 훌륭한 예시로는 벤야민의 산보객, 르 코르뷔지에의 건축가, 벤투리의 운전자라는 세 가지 주체 범주를 들 수 있겠다.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에서부터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프에 관하여」,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이르기까지, 그에게 도시를 두 발로 거니는 산보객(과 군중)이란 세계를 온몸으로 읽어내는 계기 그 자체였다. 이는 나와 세계를 매개하는 방식으로서의 신체이자, 그 신체를 통해 감지되는 세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다. 시간은 흘러 자동차와 마차가 거리에 주를 이루기 시작하면서 산보객은 거리에서 추방된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 역시 자동차로부터 거리에 내쫓기는 경험을, 더 정확히는 자동차에 치일 뻔한 경험을 하면서 파리 같은 메트로폴리스의 대대적 개선을 위한 방법을 구상한다. 즉, 자동차 기반의 시공간 기계로 파리를 탈바꿈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부아쟁 계획>이다. 역시나 시간은 흘러 흘러 1972년. 건축가 로버트 벤투리와 데니스 스코트 브라운은 『라스베이거스의 교훈』이라는 책을 통해 자동차를 몰고 도로를 질주하는 인간, 다시 말해 운전자로서의 주체를 근거로 한 '세계'의 새로운 조망 방식에 주목하며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될 디자인 명제를 제시한다. 일사불란한 통일성보다는 복잡다단한 모순이, 기하학의 투명성보다는 아이러니의 유머가, 모더니즘의 형식주의보다는 버내큘러(vernacular)의 임기응변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1)
이처럼 세계상이 하드웨어적 차원에서의 기술 조건에 연동되었던 것처럼 소프트웨어적 차원과 연동되는 기술 조건 변화 역시 새로운 세계상의 제시로 이어지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으로 '풍경화'의 등장을 들 수 있다. 특히 기하학적 원근법과 함께 탄생한 서양의 풍경화는 단안 원근법이라는 "고정된 시점을 가진 한 사람을 통해 통일적으로 파악되는 대상"으로서의 풍경의 등장과 궤를 함께한다.(2) 이러한 연장에서 히토 슈타이얼은 「자유낙하: 수직 원근법에 대한 사고 실험」에서 구글맵, 폭격기 같은 군사, 엔터테인먼트, 정보산업의 수직 시점으로 세계가 재편되는 것을 지적한다. 즉, 오늘날에는 지평선과 수평선 같은 선현 원근법이 몰락했다는 것이다.(3) 이와 같은 내용은 인간정신의 객관화 작용과 매개작용을 드러내는 문화형식을 '상징형식'이라 개념화 한 카시러의 입장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렇게 세계는 기술적 조건 조응하거나 또는 그것의 결과로 우리들에게 나타났다. 또는 우리는 기술적 조건을 바탕으로 세계를 감지했다. 그러니까 기술적 조건과 그에 깃든 상징형식을 통해 주체/객체가 작동할 수 있는 세계라는 시공간이 창출될 수 있었다, 라고 정리할 수 있겠다.
그렇다면 오늘날은 어떠한가. 오늘날 세계를 감지하고 감각하고 인지하는 상징형식을 무엇으로 꼽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프레드릭 제임슨이 당대의 주된 재현 형식으로서의 문학과 영화를 통해 시대의 정치적 무의식을 살펴보고자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정치적 무의식은 어디서 어떻게 살펴볼 수 있을까. 나는 요걸 이제 스마트폰과 그걸로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유튜브라는 플랫폼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유튜브 하나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겠지만, 한 가지 특정적 조건이랄까 하는 것만을 대상 삼고자 한다.
왜 하필 섬네일이냐! 하면 요 섬네일이야말로 유튜브 생태계에서 가장 자주 접할 수 있는 대표 이미지이자, 그 풍경을 가득 메운 어떤 표준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그 표준을 형성하는 존재가 '우리'라는 사적 존재들의 자발적 참여, 다시 말해 아마추어들 주도로 형성되는 버내큘러적 요소가 자리하고 있기에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라스베이거스의 교훈』이 라스베이거스에 주목했던 근거에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
앞서 설명했듯 『라스베이거스의 교훈』은 로버트 벤투리가 '운전자'라는 존재들에게 도시라는 세계상이 어떻게 조망되고 감각되는지, 세계라는 하나의 상이 어떻게 구현되는지에 주목한다. 이를 위해 벤투리의 기획은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관광객들 다수가 이용하는 66번 도로에 주목한다.
"고속도로 변 간판들은 조각적 형태 혹은 도상적 실루엣, 공간의 위치, 그 변형된 모양, 그래픽적 의미를 통해 메가텍스처를 정의하고 통합한다. 그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단지 몇 초의 시간 동안 수많은 연상들을 유발하고 복합적인 의미들을 커뮤니케이션하면서, 공간을 가로질러 구어적이고 상징적인 연결점을 만들어낸다. (···) 공간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형태보다는 상징이 저 큰 역할을 한다. (···) 거대한 간판과 조그마한 건물은 66번 도로의 법칙이다. 간판이 건축보다 중요하다."(4)
여기서 말하는 '메가텍스처'란 운전자는 자동차를 자신의 신체적 확장물처럼 느낄 수 있게 되면서 시선의 동질화되면서, 폴 비릴리오의 지적처럼, "새로운 속도의 차원에서 세계를 경험하게끔 해주는 일종의 스크린"으로 인간-자동차 인터페이스의 운전 감각이 기능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기 드보르가 『스펙터클 사회』에서 언급한 "현대적 생산 조건이 지배적인 사회에서, 직접적으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던 삶의 모든 측면들이 재현(representation)의 차원으로 퇴각"한다는 지적과 공명한다. 즉, 문화적 인터페이스가 삶 일반의 보편적 기준으로 작동하게 됨에 따라 신체적 경험의 중요성이 감소하고, "육체, 경관, 시간은 모두 장면(scene)으로 사라"지며 시뮬레이션 기호학이 감각의 현상학을 대체하게 된다는 것이다.(5)
이와 같은 입장은 자크 데리다와 베르나르 스티글레르가 대담집 『에코그라피』에서 텔레비전을 통해 제공되는 세계-이미지 일반을 '인공적 현재성'이라 지적한 것과도 연결 지을 수 있다. 여기서 '인공(물)'이란 매체 장치에 의해 "계산되고 제약되며 '양식화'되고 '주도'"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현재성'이란 데리다 특유의 말장난과 섞여 '뉴스'를 의미하면서 동시에 '현재성'을 이중적으로 지시하게 된다. 결국 인공적 현재성이란 텔레비전이 세계 일반의 상징형식이던 시절 "현실이 아무리 독특하고 환원 불가능하고 완강하며 고통스럽거나 비극적이라 해도, 항상 허구적인 공정을 통해 우리에게 도착"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6)
여기서 주목할 점은 데리다·스티클레르의 입장은 텔레비전 뉴스를 구성하는 게이트키핑을 어느 정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벤투리가 주목한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길목 위 '거대한 간판'이라는 빌보드의 버내큘러 논리와는 대척점에 있는 지점이다. 즉, '인공적 현재성'을 생성하는 매체 장치를 독점한 대상이 오늘날엔 유튜브를 통해 일정 개발살이 나면서 '인공적 현재성'에 버내큘러의 임기응변이 괴이쩍게 섞여 들어간 것이 오늘날의 섬네일 디자인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뭐 그런 이야기.
이에 대표되는 이미지로는 소위 애국보수 진영의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섬네일 디자인들을 꼽을 수 있겠다. 그 특징이 얼마나 일관되는지, 뉴진스(이야기 죄송합니다) 커뮤니티에서도 이를 패러디할 수 있을 정도다.
보라 오로지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한 목적으로 똘똘 뭉친 자극의 향연을. 한데 모텔과 카지노를 홍보하기 위한 방법론이었던 것이 이제는 유튜브라는 무빙이미지 플랫폼을 통해 '세계상'을 설명하는 '인공적 현재성'과 연동되어서는 세계의 풍경을 해괴망측하게 헤집고 있다고 볼 법하게 흘러가고 있다.
고로 세계란 유튜브라는 플랫폼 생태계의 과소 표현(내지는 재현)되어 제각기 다른 인간들의 버내큘러 섬네일화 된 것으로도 보인단 말이다.
ㅋㅋㅋㅋ....
이러한 해괴한 살풍경이 가능한 기저엔 무엇이 있을까, 고민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앞서 특정한 기술적 조건을 통해 세계를 감각하는 인간! 뭐 이런 식의 문장으로 답 아닌 답을 도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지배적 문화-인터페이스가 무엇인지, 이를 통해 주체/객체의 작동방식을 유추하는 식 말이다. 그래서 결론은 뭐다? 24시간 7일 내내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 않는 인간과 스마트폰의 물아일체 상황, 뭐 이렇게 정리가 되겠다.
이를 통해 세계는 쉼 없이 이미지로, 움짤로, 영상으로, 소리로 분별없이 업로드돼버린다. 이 과정에서 몇 가지의 편집이 작동하겠지만 영화와 같은 의도의 구현을 목표로 한 편집과는 거리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해 그놈의 알고리즘을 통해 취향과 관심사라는 이름으로 각자의 에코챔버에 갇혀서는 그것이 세계의 표준이라 외치는 식으로 개방된 폐쇄에서 섬네일 따라 떠돌 것이다. 아니 이미 그러고 있고.
고로 오늘날 인간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면 위와 같은 세계상 변화와, 그 변화의 맥락에서 오늘날의 세계상이 어떤 기술적 조건과 관련되어 있는지를 아울러 고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지배적 문화 인터페이스로서의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가 이제 인간-스마트폰 인터페이스와 세 싸움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시점이 넘은 것 같은 이 시점에는 더더욱 말이다. 고로 인간은 그냥 인간, 주체가 아닐 것이다. 그것은 기술과 변증법적 관계를 맺는, 공백을 통해 다양한 불/가능성을 몸살 앓듯 앓는 웨트웨어로서의 인간-주체를 상정해야만 뭐라도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글이 이런 식으로 흐르면 대개 교훈적 결말을 위해 "당장 스마트폰을 버리고 세상을 보십시오!" 뭐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던뎅 ^_ㅠ 그냥 세계가 이런 꼴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재밌지 않나요?의 의도가 더 크다. 뭘 알아야 좌로 갈지 우로 갈지 고민이라도 할 수 있는 거니까.
뻘줌도 하니 뭔가 본 글과 관련이 느슨하고 가늘게 있을 것 같은 글을 인용하며 마무리하고자 한다.
"오늘날에는 주체화 과정과 탈주체화 과정이 서로 차이 나지 않게 되는 것 같고, 또 가면을 쓰거나 이른바 유령적인 형태가 아니고서는 새로운 주체의 재구성은 일어나지 않는 듯하다. (···) '휴대전화'라는 장치에 포획되도록 스스로를 내버려 둔 자는, 얼마나 강한 욕망에 의해 그렇게 됐든 간에, 새로운 주체성을 획득하기는커녕 그저 하나의 번호를 얻을 뿐이다. (···) 텔레비전 앞에서 밤을 보내는 시청자가 자신이 행한 탈주체화의 대가로 받게 되는 것은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대는 자(zappeur)의 욕구불만 섞인 가면이거나 시청률 계산에 포함된다는 사실뿐이다.
따라서 테크놀로지에 대해 좋은 의도를 가진 담론은 공허하다. 그런 담론은 장치들에 관한 문제가 결국 그것을 똑바로 사용하느냐의 문제라고 단언한다."(7)
멍멍왕왕 끗.
1) 박해천, 「포촘킨 파사트: 벤투리와 고다르」, 『인터페이스 연대기』, 2009.
2) 가라타니 고진, 『일본 근대문학의 기원』, 2010.
3) 히토 슈타이얼, 『스크린의 추방자들』, 2018.
4) 박해천, 같은 책, 66쪽.
5) 박해천, 같은 책, 66쪽.
6) 자크 데리다, 베르나르 스티클레르, 「인공적 현재성」, 『에코그라피』, 2014.
7) 조르조 아감벤, 「장치란 무엇인가?」, 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