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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무당 Feb 28. 2023

[독서일기] 인터페이스 효과

: 고마워, Deepl과 ChatGPT! 덕분에 빨리 읽는 중이야

(알렉산더 갤러웨이의 『The Interface Effect』서문 정리)


| 재현 형식의 역사로서의 '문화'


   알렉산더 R. 갤러웨이의 『인터페이스 효과』는 컴퓨터라는 새로운 미디어(그러니까 뉴미디어)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는 단순히 컴퓨터로 인해 변화된 세계!라는 식의 이야기에서 그치기보다는, 흡사 마셜 매클루언이 '매체'가 인간의 감각기관을 변화시켜 세계 인식의 방법론을 그 뿌리부터 변화시켰다는 주장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런 이유로 갤러웨이는 인간과 세계의 접속 방식이라는 '인터페이스'에 주목해 그 효과를 언급한다, 고 이해되었다.


    갤러웨이는 이러한 본인의 전략 및 기획의 방법론으로 프레드릭 제임슨의 '인식적 지도 그리기(cognitive mapping)'에서 가져온다고 밝힌다. 제임슨의 '인식적 지도 그리기'는 개인 개별이 스스로의 위치를 찾아내고 주변을 체계화하며 주체의 위치를 외연에 인지할 수 있게끔 지도를 그리는 작업을 의미한다.1) 이런 입장에서 시대별 변화의 중심엔 시대를 구성하고 재현하는 토대적 형식이 자리하고 있고 그 형식을 통해 인간은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는 점에서 '재현 형식의 역사로서의 문화'를 파악하는 것이 갤러웨이의 전략이라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갤러웨이의 인터페이스에 대한 접근, 다시 말해 지배적 문화-인터페이스로서의 컴퓨터라는 뉴미디어를 이해하는 방식은 제임슨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는 제임슨이 재현 형식을 통해 역사화를 분석하는 것을 떠올리게 만든다. 제임슨이 문학과 영화를 아우르며 주목했던 서사(화)라는 것은 기실 지배적 재현 형식에 대한 주목과 등치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역사라는 것에 우리가 직접적으로 접속할 수 없기 때문에 서사(화)라는 전략을 통해 '모든 것에 형식과 내용을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서야만 감지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2) 부재하는 원인으로서의 역사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역사화'라는 재현을 통해야만 한다는, 어딘가 모순적인 방법론 말이다. 갤러웨이 역시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인터페이스'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재현 형식은  ···지도, 환원 또는 새긴 및 상징적 위상학이다. 이 '환원'은 현재의 세게를 생각할 수 없고, 현재를 역사적인 것으로 읽을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외상이다. ··· 문화는 이러한 비호환성에서 출현한다. 인터페이스도 마찬가지로 비호환성에서 비롯된다. 


    이런 이유에서 인터페이스는 다양한 것들과 이접할 수 있다. 실재와 상징계의 관계, 형식과 내용의 접속으로서의 서사(화), 하드웨어-소프트웨어-웨트웨어의 위상학 같은 것들로 말이다.



| 매개의 모드로서의 컴퓨터


   알렉산더 갤러웨이는 지배적 문화 인터페이스로서의 뉴미디어라는 컴퓨터를 설명하기에 앞서, 이 분야의 교과서라 할 수 있는 마노비치의 『뉴미디어의 언어』에 대해 설명한다. 갤러웨이에 따르면 『뉴미디어의 언어』는 마노비치 개인의 성취라기보다는 90년대 웹문화 1세대 공동체 산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말한다. 이 책이 탄생하기까지 넷타임과 같은 온라인 포럼에서의 토론, 웹진 리좀에 미리 공개된 내용에 대한 다양한 의견 교류 등과 다양한 웹문화의 상호작용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뉴미디어의 언어』가 문제작이라거나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마노비치는 뉴미디어가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객체, 다시 말해 텍스트/이미지/무빙이미지 등은 역사적·사회적 맥락을 통해 식별된 형식들인 만큼 디지털 기술을 시적이고 미학적 접근이 필요한 대상으로 묘사했다. 바로 이러한 전략이 마노비치와 『뉴미디어의 언어』의 강점이라는 것이 갤러웨이의 설명이다.


    갤러웨이는 마노비치의 전략을 영화와 역사 두 가지로 정리한다.


   먼저 영화의 측면에서는, 영화가 최초의 뉴미디어였다는 것을 밝히는 데 있다. 마노비치에 따르면 영화는 오늘날 컴퓨터의 논리를 이미 선취하며 컴퓨터가 지배적 문화 인터페이스로 작용할 수 있는 모든 길을 마련했다. 이는 그가 『뉴미디어의 언어』서두에서 지가 베르토프의 <카메라를 든 사나이(Man with a Movie Camera)>(1929)의 다양한 요소를 뉴미디어의 논리와 매칭하는 작업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다음으로 역사의 측면에서는 마노비치의 작업이 비-역사적 접근이라는 비판에 대한 갤러웨이의 옹호와 관련된다. 이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선전 영화의 성격을 띠는 <카메라를 든 사나이>를 그 어떤 정치-사회적 맥락에 대한 언급도 없이 컴퓨터라는 뉴미디어의 근간을 밝히는 작업으로서만 접근하는 그의 태도와 관련된다. 하지만 갤러웨이는 마노비치에 대한 서구-좌익 특유의 비판이 무의미하다 정리한다. 왜냐면 마노비치 그 자체가 이미 소련 연방의 붕괴를 온몸으로 경험했고 그로부터 탈출한 정치적 역사 한가운데를 살아왔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에서 마노비치의 정치적 제스처가 반-직관적일지라도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갤러웨이의 입장이다. 또한 베르토프의 작업이 오늘날에도 정치적으로 여전히 유효한지에 대한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사실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들이 기저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오히려 비-정치적으로 보이는 마노비치의 작업은 그 자체로 오늘날의 정치적 현실을 잘 보여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게 컴퓨터라는 뉴미디어로 인한 시각 문화의 변화는 "겉모습은 영화화되어 있고, 재료 수준에서는 디지털화되어 있으며, 논리적으로는 컴퓨터적(즉, 소프트웨어 중심)이다."3) 그리고 이러한 내용은 인간-컴퓨터 인터페이스, 다시 말해 HCI라는 것이 인간과 세계의 접촉면이자 재현 형식으로서의 문화를 형성하는 것과 관련된다.


    즉, 매개 방식으로서의 컴퓨터라는 뉴미디어가 오늘날의 문화 형식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 만약 영화가 존재론이라면, 컴퓨터는 윤리다


   알렉산더 갤러웨이는 마노비치의 뉴미디어의 논리(수적 재현, 모듈성, 자동화, 가변성, 부호변환)의 근원을 좀 더 깊게 파고든다. 이는 인간이 컴퓨터라는 뉴미디어를 통해 세계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 그를 통해 재현 형식과 방법을 어떻게 추구하는지를 추적하는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컴퓨터라는 뉴미디어는 수적 재현을 통해 세계를 모듈화 한다. 갤러웨이의 표현에 따르면 세계를 명사화하고 정보화하는 정의하는 기계가 컴퓨터라는 뉴미디어라는 것이다. 이러한 특징을 거치지 않고서는 세계와 접촉하는 방식은 불가능하다. 물론 뉴미디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영화 역시 필름의 방법론(이는 셀룰로이드 필름의 광감물질의 특징이자 영화의 근간인 지표성과 과련된다)을 따르기에 컴퓨터라는 뉴미디어의 특징을 새삼스레 여길 필요에 의문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갤러웨이는 스탠리 카벨을 인용하며, 컴퓨터라는 뉴미디어와 영화가 아주 다른 경향을 띤다는 것을 지적한다.


카벨은 다음과 같이 남겼다. "하나의 회화는 하나의 세계다. 하나의 사진은 세계의 사진이다." ··· 시네마에 대한 카벨의 정의를 바꿔 말하면, 시네마는 자동으로 세계를 연속적으로 투영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컴퓨터는 어떤 지시 대상으로부터 분리되어 그것을 모델링하고 보완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단순히 세계 위에 있다.
··· 인간 형상과 세계와의 밀접한 관계에 집착하는 예술(인간의 눈을 모방한 카메라 옵스큐라를 통해 세계를 재현하는 회화, 사진, 영화)은 컴퓨터와 결별한다. 즉, 인간이라는 주체의 위치가 자리한 전통적 예술을 통해 세계는 객체로서 재현되지만, 컴퓨터는 그런 객체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컴퓨터 그 자체가 하나의 객체이기 때문이다.4)


    그렇다면 컴퓨터라는 뉴미디어를 통해, 더 정확하게는 HCI를 통해 세계와 접촉하는 우리는 전통적 예술이 취하던 주체-객체 구조에서 어떻게 위치될 수 있을까. 갤러웨이는 여기서 철학의 전통적인 존재론적 접근 방법을 제시한다. 마노비치가 영화를 최초의 뉴미디어라 언급했던 것을 전제한다면, 영화와 컴퓨터라는 두 뉴미디어의 차이점에서 본격적인 논의를 시작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갤러웨이는 영화가 일반적으로 존재론적 차원, 특히 현상학적 차원에서 접근 가능하다는 점을 언급한다. 하지만 컴퓨터는 존재론적 조건과 무관하며 존재 자체의 조건을 재매개 한다. 즉, 컴퓨터를 통해 데이터로 정의되고 명사화된 세계에서는 존재는 그저 조건으로만 객체화될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영화는 존재론으로서 기능할 수 있고, 이런 존재론을 시뮬레이션을 통해 조건화하고 객체화하는 컴퓨터는 실천적 차원에서 작동하는 윤리학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갤러웨이는 언어와 미적분의 구분을 통해 이를 예시한다. 언어는 영화로, 설명과 참조 수준에서 세계를 부호화(encode)하며 작동한다. 컴퓨터는 미적분으로 계산과 과정 수준에서 작동하는 기계적 추론 시스템으로 작동한다.


    그러므로 컴퓨터를 윤리적 차원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기계의 의인화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컴퓨터를 통해 세계와 접속 방식을 결정할 때, 우리는 컴퓨터의 방법론으로 객체화되어 컴퓨터의 방법론으로 객체화된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는 의미라 하겠다. 따라서 컴퓨터를 세계와의 관계에서 실천 또는 일련의 실행, 행동의 관점에서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면 이는 존재론이기보다는 실용적 측면에서 윤리학에 가깝다는 것이 '컴퓨터는 윤리적'이라는 말의 정체인 것이다.


    




독서일기 끗!





1) 프레드릭 제임슨,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 문화 논리』, 2022.

2) 윌리엄 다울링, 『정치적 무의식을 위한 서설』, 22-23쪽.

3) 레프 마노비치, 『뉴미디어의 언어』, 242쪽.

4) 알렉산더 갤러웨이, 『The Interface Effect』, 1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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