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선무당 Mar 06. 2023

[멍멍왕왕] K 없는 K-팝을 보며 장치이론을 떠올렸다

| K-팝의 자율성?


    지난달 말. 메이브(MAVE:)라는 버추얼 휴먼 멤버로 구성된 K-팝 걸그룹이 데뷔를 했다. 뮤직비디오뿐 아니라 음악방송 무대, 인터뷰까지 여러 활동을 진행 중인 이 그룹은 분명하게 K-팝이라는 장르를 토대로 삼고 있다.



    헌데 컨셉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어떤 기시감을 강력하게 자극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것은 바로 너도 알고 나도 아는 K/DA와 그들의 데뷔곡 Pop Star다.


2018년 Pop Star라는 곡으로 등장한 K/DA


    K/DA는 게임 리그 오브 레전드(이하 LOL)의 주요 캐릭터들이 뭉쳐 K-팝 걸그룹으로 활동하는 컨셉의 팀이다. 위의 곡 역시 메이브와 마찬가지로 K-팝을 표방하고 있으며 아주 정확하게 실천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심지어 음원 사이트에서도 K-팝으로 분류될 정도라고 하니말이다.


iTunse에서 K/DA의 Pop Star라는 곡은 K-POP로 분류되어 있다.


    이렇게 되면 도대체 K-팝의 정의나 정체성이 궁금해진다. 그룹 멤버의 국적도, 그룹을 제작한 회사의 국적도 상관없이 어떤 특징들을 충족시키면 마냥 저냥 K-팝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되는 이 상황에서 말이다.


    여기서 예시 하나 더. 미국에서 K-팝 가수로 활동 중인 AleXa를 떠올려 볼 수 있다. AleXa 역시 한국과의 인연이라곤 아주 어릴 적 미국으로 입양된 어머니의 출생국이라는 것 말고는 없다. 다시 말해 미국인으로 태어나 미국인으로 살다가 K-팝이라는 장르로 활동 중인 가수라는 것이다. 2022년엔 미국 NBC 방송국 음악 경연 프로그램에서 K-팝 가수로서 최종 우승까지 하는 뛰어난 가수라는 점에서 K-팝이라는 게 그냥저냥 장르로서만 기능한다고 보기엔 뭔가 석연찮다, 는 것이 나의 느낌적 느낌이다.



| K-팝의 자율성? 그런 점에서 예술의 자율성?


    이와 같은 오묘한 상황이 K-팝에서만 벌어지는 일일까 생각하다, 역시나 귀동냥을 그나마 많이 한 영화 관련 이야기가 떠올랐다.


    영화이론사에서 끈질기게 지속되는 단 하나의 질문을 꼽으라면 아마 "영화란 무엇인가?"가 아닐까. 이는 영화이론 스스로가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인지, 어떻게 이야기하고 되어야 할 것인지라는 끊임없는 자기 점검과도 관련될 것이다. 그래서이지 초기 영화이론과 현대영화이론 나아가 포스트-시네마 담론에 이르기까지 영화이론은 끊임없이 '무엇이 영화냐'는 자문자답의 굴레를 다양하게 펼쳐왔다. 초기 영화이론의 경우 우선적으로 '영화가 예술이냐?'는 질문을 우선 해결해야 했었고, 그 결과는 나름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카누도의 '제7의 예술' 개념도 그렇고, 사진-지표론을 시공간적 차원으로 확장시켜 리얼리즘과 형식주의라는 개념 대비로 풍부한 논의를 이끌어낸 것도 그렇고 말이다. 


감독님께 영화란 무엇입니까...


    문제는 이런 노오오오오력들이 어떤 합의에 이르지 못한 상황에서 텔레비전이라는 게 등장했다는 점이다. 개인적으로 이게 영화에게 있어서 문제적 상황이라 여겨질 법도 하다 생각되는데,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영화의 무빙이미지 독점 시대가 허무하게 막을 내림과 동시에 '영화'라는 것이 극장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뜯겨 나와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자세한 연구들을 살펴보고 이런 썰을 푸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깔깔-. 그런고로 영화는 그 스스로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텔레비전에서 '영화'라는 이름으로 막연하게 불려 왔다. 스스로에 대해 명쾌한 대답을 내리지 못했음에도 '오리지널 TV Movie'라는 식의 작품들이 만들어지기도 했을 정도니까.


    이렇게 '영화'라는 것이 극장을 벗어나게 됨에 따라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이미 나왔다고도 보일 수 있다. 흡사 뒤샹의 '샘'처럼 무엇이 예술작품인지에 대한 질문이 정리된 느낌적 느낌? 


    물론 이처럼 영화가 왜째서 영화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에서 매체 특정성과 같은 논의들이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고지식하다 할 정도의 완강한 그린버그 할아버지에 의해 정립된 '매체 특정성' 개념은 사진, 추상화, 개념미술 등 다양한 예술 양태가 난립하던 상황에서 회화가 어떻게 회화일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였다. 소위 다른 예술과 환원될 수 없는, 오롯이 회화만이 할 수 있는 회화 고유의 전략으로서의 특징을 매체에서 찾는 태도로서의 '회화의 순수성' 같은 것 말이다.


각 예술의 유일무이하고 고유한 권한 영역은 각 예술의 매체가 지닌 유일무이한 본성과 일치한다는 사실이었다. 이리하여 자기비판의 과제는 각 예술의 효과들 가운데서 다른 예술의 매체로부터 또는 다른 예술의 매체에 의해 빌려왔다고 여겨질 법한 모든 효과를 제거하는 것이 되었다. (...) “순수성”은 자기 정의를 뜻했기에, 예술에서 자기비판이라는 과업은 철저한 자기정의의 과업이 되었다.1)

 

    영화 역시 이와 같은 전략을 토대로 영화의 매체 특정성을 정리하려 했었다. 영화적 이미지가 기입되는 셀룰로이드 필름, 카메라라는 기록-입력 기계와 그것의 자동기술성, 또는 '영화'라는 하나의 제도나 관습을 소프트웨어적 차원에서 접근해 영화의 매체 특정성으로 삼는 식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자가문답의 순환에서 나름의 출구를 찾는 기획으로 가치 있는 입장들이라 하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합의가 도출되지 않았다. 동시에, 이런 상황에서도 넷플리스와 같은 OTT 플랫폼에서 영화는 버젓이 제작되고 상영되고 있다. 그 누구도 영화가 무엇인지 간명하게 정리할 수 없지만 '영화'라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알쏭달쏭한 상황으로 말이다.2)



| 그래서 뭐 어쩌자는 말인가?


    사실 이 글의 마무리를 어떻게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이러저러한 경향들에서 영화와 그 이론이 처한 난처한 상황이 겹쳐 보인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 더군다나 예술의 자율성이 곧 예술의 위기와 맥락화되는 흐름에서 K-팝은 특이하게 위기와는 무관한 것으로 보여 신기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생각나는 영화이론은 '장치이론'이다.


    장치이론은 현대영화이론의 약동을 알린 정치적 모더니즘 시기 등장한 주요 이론 중 하나로 장-루이 보드리의 「기본적 영화 장치의 이데올로기적 효과」(1970), 「장치: 영화의 현실효과에 대한 메타심리학적 접근들」(1975)을 통해 등장했다. 보드리가 이 두 편의 글을 통해 겨냥했던 것은 앙드레 바쟁으로 대표되는 리얼리즘 이론이었다. 보드리에게 있어 영화는 필름-지표론이 현실의 매끈한 재현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이는 한 편의 영화와 그 이미지가 제작되고 제공되고 소비되는 면면에 카메라, 영사기와 같은 광학적인 기본적 영화 장치와 빛과 스크린과 암흑과 객석과 관객, 나아가 1초를 24개의 사진으로 쪼개놓은 기술적 조건 등이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보드리는 영화라는 것이 이런 다종다양한 조건들의 합이며, 그 합이 가능한 이면에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자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이러한 보드리의 장치이론 기획을 통해 영화는 그를 구성하는 두 가지 조건, 즉 물질적인 하드웨어적 조건과 그 하드웨어를 특정 목적에 맞춰 작동시키는 소프트웨어적 조건으로 분별가능하게 재정립된 것이다.


    하지만 장치이론을 통해 규명된 영화는 영화에 대한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 상황을 마주하게 되면 기각되기 십상이다. 당장 앞서 언급했던 텔레비전만 떠올려봐도, 스크린과 극장이라는 영화적 이미지 출력 방식과 공간이 변경되면 '영화'라는 게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역설에 놓이기 때문이다. 사실 뭐 이런 이유를 떠나서도 장치이론이 영화 관객을 이데올로기 주입에 취약한 수동적 주체로 설정한 것에서부터 그 한계가 드러나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장치이론은 영화를 설명함에 있어 영화적 이미지 차원을 포함한 그 전후의 기술적 조건까지 아울렀다는 태도는 기술 변화에 맞춰 영화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데 있어 재고의 여지를 남긴다. 그리고 이러한 재고의 여지를 발견해 장치이론을 디스포지티프 이론으로 재전유한 에이드리언 마틴이 등장한다. 에이드리언 마틴의 디스포지티프 논의는 영화를 구성하는 조건과 그 조건들의 배치에 주목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결과 영화는 영화적 이미지와 그 전후의 입력-출력 방식을 포함한 다양한 조건의 합으로 작동하게 된다. 그 끝에서 등장한 것이 컴퓨터라는 범용 기계라는 것이 내 생각이고 말이다.


    그렇기에 컴퓨터를 통해 매개-재매개 되는 다종다양한 객체들은 음악, 텍스트, 이미지를 측정 가능한 무엇으로 변모시킨다. 여기엔 매체 특정성을 갱신하고자 했던 포스트-매체적 입장, 다시 말해 특정 예술의 전통과 관습을 예술 그 자체의 존재론과 연결시켜 '매체는 기억이다'는 식의 언급을 떠올리게도 만든다.3)


    이런 디스포지티프 기획을 통해 영화 이론과 비평을 갱신할 수 있다면, 여타의 예술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지점에서 K-팝 역시 디스포지티프적 기획을 전제로 접근한다면 뭔가 다양한 논의가 가능하지 않을까?


    문제는 K-팝이라는 것이 영화처럼 굳이 이론과 비평과 담론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일 테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학제에서 K-팝을 둘러싼 신묘한 현상들을 설명하려 자신의 무기들을 휘둘러대는 것도 그렇고.


    마냥 넋 놓고 즐기기엔 많은 사람들이 교차하는 시공간으로서의 K-팝이니.




멍멍왕왕 끗.





1) 클레멘트 그린버그, 「모더니즘 회화」, 『예술과 문화』, 조주연 옮김, 경성대학교출판부, 2019, 345쪽.


2) 심지어 게임을 만드는 게임 엔진이나 비디오 게임 장르에서도 '시네마'나 '시네마틱'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가령 언리얼 엔진의 경우 시네-카메라 액터라는 기능(https://docs.unrealengine.com/5.0/ko/cinematic-cameras-in-unreal-engine/)을 통해 영화적인 룩업 구현이 가능하다 안내한다. 비디오 게임 장르로는 '인터랙티브 무비'라는 이름으로 <스틸 레인>,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과 같은 작품들이 있다. 이들 모두 영화(cinema)를 표방하는데, 촬영 카메라나 촘촘한 서사 같은 식의 영화의 몇몇 조건만을 충족할 뿐 진정으로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대답을 주지 못하는 것 같다.


3) 김지훈, 「매체를 넘어선 매체: 로잘린드 크라우스의 '포스트-매체' 담론」

작가의 이전글 [독서일기] 인터페이스 효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