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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무당 Mar 14. 2023

[독서일기] 1990년대 청춘물 한국영화

: 「1990년대 청춘물 한국영화와 이행기적 욕망의 궤적」, 김소연

(※「1990년대 청춘물 한국영화와 이행기적 욕망의 궤적」을 요약)

 

| 이행기로서의 90년대


    90년대의 이행기적 성격으로 접근하는 근거는 80년 '광주 항쟁'과 97년 IMF 외환위기 사이에 끼어 있는 시대기 때문이다. 문화적 조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정치적, 경제적 격동 한 가운데에 위치한 만큼 80년대가 가져다준 것과 2000년대가 바꾸어놓은 것의 중첩을 통해 '90년대성'을 사후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87년 체제(regime)'라는 용어는 오늘날의 한국사회를 파악하게 해줄 뿌리가 '87년'이라는 "구조형성적" "전환점"에 닿아 있다는 공통 인식을 통해 이루어졌다. 여기서 '체제'란 "정부의 작동 방식 뒤에 있는 사회문화적 규범"가지를 포섭하는 확장된 개념으로 채택된 것이다. 따라서 87년 체제의 규명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적 영역 모두를 포괄할 수 있으며 또 포괄해야 한다.1)


    이런 연유에서 90년대 한국영화와 그에 포함되는 청춘영화를 파악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87년 체제가 한국영화에 갖는 함의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를 통해 90년대 한국영화에서 '성인' 언저리를 배회하는 청춘들의 모습에서 90년대가 허용했던 것과 금지했던 것, 욕망의 대상과 그것의 실현과 좌절 경로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 '87년 체제' 속 한국영화와 '80년대성'의 잔영


    90년대는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주제와 양식의 한국영화들이 폭발했던 시기로, 그 시절 청춘물 영화의 90년대 제시 방식이 균일하다 보기 어렵다. 그럼에도 그 양상들을 짚는 작업은 '청춘물 한국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90년대성이 당대 영화들의 그것과 어떤 차이를 띠는지, 그 역사적 의의는 무엇인지 확인할 근거가 된다.


    80년대 말 한국영화의 변화를 대략 정리하자면 - 정치적 변화 / 페미니즘의 약진 / 삶과 욕망의 방향에 대한 원천적 질문 / 에로영화 / 장르적 반영성 으로 정리할 수 있다.


    먼저 [정치적 변화] 측면에서는 말할 것도 없이 6월 항쟁 이후의 일련의 흐름이다. 영화계 역시 이와 같은 변화의 영향권에서 88년부터 97년까지 흥행성적 상위 영화들이 '민중, 민주, 민족적 가치의 지향'의 80년대적 관점과 길항관계 속에서 제작되었음을 살필 수 있다. 가장 인상적인 현상은 소재의 다양화다. 검열의 완화로 정치적 소재의 영화들이 대거 등장하며 동학혁명(<개벽> <이재수의 난>), 한국전쟁 시기 좌우익 대립(<태백산맥>)과 빨치산 운동(<남부군>), 베트남 참전(<하얀 전쟁>), 광주 항쟁(<부활의 노래> <꽃잎>) 등 제도화된 한국사에 대한 저항기억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이례적인 변곡점을 보여준다.


    다음으로 [페미니즘의 약진]의 측면이다. 여성 평등의식을 강조하는 관점(<두 여자 이야기>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네온 속으로 노을지다>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그대 안의 블루>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들을> <개 같은 날의 오후> <누가 나를 미치게 하는가> <박봉곤 가출사건> <코르셋> <처녀들의 저녁식사> <해피 엔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관심에서 성 정체성(<내일로 흐르는 강>)이나 다문화적 정체성(<김의 전쟁> <웨스턴 애비뉴> <라이 따이한>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도시빈민(<우묵배미의 사랑> <나쁜 영화> <혼자 도는 바람개비> <장미빛 인생>) 등으로 표현되었다. <여고괴담> <노랑머리> <영심이> <스무 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참견은 노 사랑은 오예>와 같은 어린이부터 대학생까지를 아우르는 미성년 영화들도 같은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삶과 욕망의 방향에 대한 질문]에 대한 영화는 종교적 성찰과 해탈의 문제를 다루는 적지 않은 불교 영화나(<아제아제 바라아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산산히 부서진 이름이여> <화엄경>), 반자본적/반권위주의적/반제도적 풍자와 희화화(<투캅스>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미지왕> <할렐루야>)의 흐름을 꼽을 수 있다.


    [에로영화]는 90년대로 넘어가면서 B급 영화의 형태로 잔존하다 그 세가 약세되었다. 에로물에 대한 대중적 요구는 로맨틱 코미디의 에로틱한 과잉이나 감성 멜로의 형태로 세련화되거나 대체되었다.


    [장르적 반영성]의 경우는 <구미호> <귀천도> <은행나무 침대> <쉬리>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같은 영화로, 사회적 문제의식을 장르 관습으로 매개하고자 했던 2000년대 한국영화의 겨양을 예고하고 있었다.


    다소 거친 분류지만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범주화 목록은 90년대 영화가 직-간접적으로 80년대의 진보적 사고방식 확장에 부응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소재의 금기를 깬다거나, 성평등 관점을 강조하거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노골적인 섹슈얼리티 전시를 기피하는 등의  90년대 한국영화는 87년 체제 하 한국영화에 잔영처럼 깃든 '80년대성'의 요체로 그 체제적 자장과 어떻게든 조응하는 흐름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1990년대 청춘물 한국영화에서 적대와 물화라는 기능장애


    한국영화는 간헐적으로 어른이 아닌 존재의 삶과 고민에 주목해왔다. 70년대 얄개 시리즈에서 비롯된 하이틴물이 있었고 <배보들의 행진>과 <병태와 영자> 같은 대학생 영화가 있었다. 고뇌하는 낭만적 대학생의 표상은 80년대 <고래사냥> <철수와 미미의 청춘 스케치> 같은 영화로 맥을 이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이나 <구로 아리랑> 같은 영화는 청년 노동자의 표상을 등장시켰다. 


    물론 일련의 영화들이 청년 세대를 주인공으로 삼는다 해서 이들 모두를 '청춘물'이라는 명명아래 뭉뚱그리는 것은 무리한 일로 보일 수 있다. 무엇보다 상당수가 갱스터 장르의 관습에 따라 출구 없는 청춘을 전면에 내세우는 경우로, 어찌보면 갱스터 장르에 대한 관심의 결과로서의 청춘물일 수 있따는 점이다. 그럼에도 서사적, 양식적, 장르적 차이를 띠는 영화들이 방황하는 한국 청춘들의 고민/갈등/삶/사랑을 주요 관심사로 삼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90년대를 이행기로 규정할 때 청춘영화의 대거 등장은 납득할 만한 현상이다. 87년 체제가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일거에 새로운 패러다임에 들어감으로써 새로운 삶의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는 과업이 청년에게 부과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기존 세대와 달리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자본과 기반이 없는 청년 세대의 분투로서의 청춘영화는 90년대 내 모든 한국인들의 약분하는 이미지로도 이해할 수 있다. 즉 90년대 청춘영화란 특정 세대에 국한된 이야기라기 보다 90년대적 삶의 모방이자 알레고리가 되는 것이다.


    90년대 청춘물 한국영화를 가로지르는 핵심 서사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몸뚱이 외엔 아무것도 가짓 것 없는 청년(들)이 냉혹한 도시에서 극적인 성공을 거두겠다는 야심을 어찌저찌 성취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모든 기회와 가능성을 날릴 위기에 처한다. 그 탈출 과정은 죽음 또는 심각한 좌절로 귀결된다. 이러한 서사 속 갈등이나 적대의 감각은 계급의식을 둘러싸고 형성되어 있다. 가령 어떤 인물이 대학생 출신이더라도 전혀 전도유망하지 않은 휴학생(<젊은 날의 초상>)이거나 위장취업 수배자(<장미빛 인생>) 신세다. 그 외 절대다수의 주인공은 변변한 직억 없는 백수건달에 가깝다. 다방 레지, 술집 여자, 편의점 알바, 제비, 도박꾼, 조폭 끄나풀, 도박꾼, 밤무대 댄서, 미장원 보조 등 비루하고 암담한 현실을 살아내는 인물들이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오렌지족이라 불리던 인물들의 화려하고 무책임한 생활방식과 대비하며 강조한다.


    이들 청춘군상의 모습은 80년대 말 노동자 대투쟁 결과 90년대에 급성장한 노동운동 및 노동자 조직과 하등 관계가 없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노동계급 조차도 되지 못한 채 어두운 도시 빈틈에 기생하고 있는 '잉여'적 존재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이들 존재는 부르주와 대 프롤레타리아라는 상징적 대립 구도 어디에도 포함되지 못하며, 이런 범주화 바깥의 잉여(룸펜 프롤레타리아)로 포착될 뿐이다.


    이렇듯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잉여로서의 20대 청춘들은 좌충우돌의 연속이다. 그렇기에 가진 것 없는 그들의 인생을 건 한 방은 건달이 되거나 벼락 스타가 되는 길밖에 없다. 90년대 한국 영화의 이러한 서사적 선택은 급진적으로 보인다. 모두가 노동계급 승리에 몰두하던 시절 "구체적, 실정적 질서의 내속적 예외/배제 지점"으로서의 '천민'(2), 혹은 "포함인 배제"로서의 '벌거벗은 생명'(3)이라 마땅히 부를 수 있는 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던 것이다.


    이들 청춘의 성공에 대한 야망의 내용은 영화감독, 모델, 배우, 레스토랑 사장, 또는 여러 술집을 관리하는 건달 보스 같은 직업적 성취를 '꿈'으로 표현하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일확천금의 기회를 노리기 때문에 "한 방에 크는 거야. 제대로 한 방에"(<게임의 법칙>)으로 표현되곤 한다. 요컨대 90년대 청춘들에게 성공이란 진지하고 끈질긴 노력 없이도 이를 수 있는 순식간의 신분 상승을 의미한다. 또한 이들의 성공의 내용은 모든 기표를 압도하는 '화폐'라는 지배 기표로 드러난다. 이는 정확히 '물화(Versachlichung; reification)(4)의 작동 원리에 종속되어 있다. 결국 청년들의 유명세와 성공이라는 욕망은 화폐로 측량 가능한 물질적 소유의 욕망으로 환원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런 특징 역시 87년 체제의 영향과 관련된다. 87년 체제를 특징짓는 '민주화'로 경제 영역은 '자율화/민간화/시장화'에 돌입하게 된다. 사적 대기업을 통제한던 국가가 경제 전선 뒤로 물러나면서 개개의 상승욕구가 시장에 전면화될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라 불리던 '3저 호황' 시기(86-88)를 거치며 획기적 임긍 상승/소득 안정/대량소비/대중소비사회의 특징으로 이어진다. 스스로를 중산층이라 인식하는 개인들이 늘어나며 아파트, 가전제품, 자동차 소비가 보편화된 것도 이 시기 즈음이다. 이런 배경에서 개인은 성취 와 좌절 두 가지 갈래에서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90년대 청춘물 한국영화는 바로 이런 시대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다.



| 1990년대 청춘물 한국영화와 멜로드라마적 죄의식의 (비)윤리


    강력한 상승욕구를 탑재한 90년대 청춘영화 주인공들 상당수는 자신의 욕망에 짓눌려 죽는다. "가늘고 길게" 사는 게 꿈이라던 인물(<비트>의 민)조차도 소박한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간다. 갱스터 장르의 관습을 따르는 것이 이유라 해도, 90년대 대중 정서가 '코믹'의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감안하면 청춘물 영화들이 비극적 정서를 공유하는 것은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그 이유로는 일단 그들이 너무 많은 것을 노골적으로 욕망했기 때문이다. 적당히 하층계급의 일원으로 섞여 사는 인물들은 결코 죽지 않는다. 오직 "욕심 많은 어린놈들"만이 제도 안팎의 한계를 뚫지 못하고 죽임을 당한다. 과도한 욕망의 무리한 실현은 공동체를 위협하므로 다수의 안녕을 위해 해로운 존재를 살려둘 수 없다는 뜻으로도 읽히는 대목이다. 우리는 이러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해볼 수 있다. 87년 체제의 자장이 유효하다는 전제에서 90년대의 개인주의적, 속물적 욕망을 전경화하는 것에 부채의식과 죄의식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 하는 추측말이다.


    이러한 죽음 서사의 무의식적 동기를 죄의식(혹은 죄책감)으로 파악하는 것은 초자아 및 자아 이상과의 관계 속 주체가 누리는 향유의 문제를 좀 더 심층적으로 해명할 필요성으로 이어진다. 죄의식의 메커니즘 속에 들어감으로써 주체가 어떤 종류의 만족을 추구하는지에 대한 대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죄의식은 "자아와 자아이상 사이의 긴장이 표출된 것"(5)으로, 자아이상이 부과하는 의무나 규칙들에 자아가 복종해야 하는 상황에서 양자 간 괴리가 있을수록 죄의식이 발생한다.(6) 자아가 리비도를 도덕적으로 승화시킬수록 리비도는 중립적 에너지로 바뀌게 되고 리비도가 붙들고 있던 죽음충동을 초자아가 떠안게 되면 초자아는 자아를 공격하게 되며, 그 결과 자아쪽에 죄의식이 증가하게 된다. 


    한편 라깡은 죄의식과 초자아의 관계를 "욕망과 법의 변증법적 관계"(7)로 번역한다. 위반의 욕망은 금지의 법에 의해 생성된다는 점에서 서로를 지탱해주고 있으며 따라서 "오직 법 때문에 죄(sin)는 과도하게 과장된 성격을 띠게 된다."(8) 이것이 바로 초자아의 역설, 법의 외설성이다. 공적인 법(금지)는 언제나 사적인 향유(위반의 욕망)로 더렵혀져 있다. 즉 주체는 죄의식을 느끼는 한에서만 즐길 수 있다. 지젝은 이를 "선악을 넘어서가 아니라 단순하 선善을 넘어서" 나아가는 조처라 주장한다.(9) 이는 정신분석의 윤리가 상징적 규범으로서의 선악을 따지는 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며 그 규범 너머에 있는 '무無' 혹은 '공백'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그 '무로부터의 창조'를 실현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저 야심만만한 '어린놈들'이 죽어가는 것을 환영했던 혹은 적어도 동의했던 90년대 대중 관객의 죄의식에서 우리는 어떤 향유를 추적할 수 있을까. 아마 법과 욕망, 금지와 위반의 악순환이라는 80년대성에 갇혀 있지 않은, 따라서 초자아나 자아이상 어느 쪽에도 종속되지 않으며 어떠한 죄의식에도 사로잡혀 있지 않은 주체성의 실현과 연관된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90년대 청춘물은 선 너머를 바라보기는 커녕 멜로드라마적 권선징악의 단순화된 죄의식 회귀 논리가 전부였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관객들과의 의식적 공모라는 시대 전체에 대한 문제제기를 떠올려 볼 수 있다. 영화를 만들고 즐기는 모두가, 그리고 이들을 아우르는 시대라는 시공간이 타인들을 단죄하면서 혹은 스스로를 단죄하면서 어떤 식으로든 법의 외설적 차원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멜로드라마적' 서사 논리는 무엇일까. 기원적으로 멜로드라마는 근대 과도기의 도덕적, 문화적, 사회경제학적 불안정과 불안을 표현하는 장르다. 19세기 초 복종과 온정주의에 기반한 전통 양식들이 쇠락하던 때의 불안정한 시장 문화에서 노동 계급이 얼마나 삶의 불안정성과 취약성, 운명 통제의 불가능성을 느끼고 있는지를 환기시켜주는 장르가 '멜로드라마'라는 것이다.(10) 동시에 멜로드라마는 그런 불안감을 궁극적 미덕의 승리로 해소함으로써 "더 고차원적인 도덕적 힘이 여전히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 정의로운 손으로 세계를 다스린다는 것을 안심시킨"장르이기도 하다.(11) 이와 같이 멜로드라마 장르의 기원과 그 한국적 적용의 맥락을 종합해 판단해보면, 포스트모던의 물결이 몰아치던 90년대가 한국인들에게는 서구인들이 겪었던 근대 초만큼이나 불안한 시기였음을, 따라서 대중들은 명징한 권선징악의 도덕감을 통해 불안을 적극 방어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불안에 대한 방어의 방식은 청춘 세대의 죽음으로만 표출되어야 한 것일까. 김정훈은 이 세대를 '문화혁명세대'라 명명하며, 서태지로 대변되는 대중문화의 극적 변화의 주도를 꼽는다. 기존의 권위주의적, 집단주의적 문화에 최초로 저항한 세대로 이들의 저항은 정치적 권이가 아닌 일상의 권위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90년대 신세대 담론을 주도한 책들에서 이들은 <터미네이터>와 68혁명, 서태지 음악에 친근감을 표하며 80년대 문화를 비롯 기성세대에 무차별적 거부감을 표현하고 있다.(12) 기성세대가 이룩한 것들을 모두 부인하면서 그 한계를 지적하는 새로운 세대의 존재는 기성세대에 거북하고 불편하고 생경하고 위협적인 건 당연하다. 그러므로 허구적 서사에서나마 이들을 죽이고자 했던 (무)의식적 동기는 자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러한 세대를 기어이 죽이고야 만다는 것은 아직 상징적 질서 내에서 제대로 위치되어 있지 않은 그들이 상징계 내에서 권력화 되는 것에 대한 무자비한 차단이며, 더 나아가 90년대적으로 표현된 새로운 방식의 저항적 동력에 대한 가차 없는 단절인 것이다.







1) 자세한 내용은 김종엽 편. 2009. 『87년 체제론: 민주화 이후 한국사회의 인식과 새 전망』참고.

2) 슬라보예 지젝, 『까다로운 주체』, 2005, 이성민 역. 366-367쪽.

3) 조르조 아감벤, 『호모 사케르: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2008, 박진우 역. 43쪽.

4) 마르크스는 노동의 사회적 성격이 상품이라는 물신으로 치환되고 상품의 사용가치는 교환가치로 환원됨으로써 교환자들 자신이 역으로 상품의 운동에 의해 통제를 받게 되리라면서 이를 '물화'로 개념화 했다. 칼 마르크스, 『자본론I』, 김수행 역, 90-95쪽.

5) 지그문트 프로이트, 「집단심리학과 자아 분석」, 『문명 속의 불만』, 1997. 153-154쪽.

6) 맹정현, 『멜랑꼴리의 마술』, 2015, 130쪽.

7) 자크 라캉,『세미나7』

8) 자크 라캉,『세미나7』

9) 법과 욕망의 변증법에 대한 이러한 해제는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 244쪽 참조.

10) 벤 싱어, 『멜로드라마와 모더니티』, 2009, 199-201쪽.

11) 같은 책, 202쪽.

12) 송재희 외 『신세대: 네 멋대로 해라』, 1994, 현실문화연구; 김진송 외 기획 / 서동진 외 『신세대론: 혼돈과 질서』,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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