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화는 두 가지 우주의 반복과 번복을 그리며 그것의 종합을 이야기하고 싶은 듯했다.
두 가지 우주란 다음과 같은데,
하나는 영화가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멀티버스'로 횡으로 널리 펼쳐진 우주. 다른 하나는 '가족' 또는 '세대'와 같은 종으로 펼쳐진 우주다. 영화는 이 두 종-횡의 우주의 절대적 작동방식은 '선택'임을 보여주며 영화 내내 그 선택에 따른 (불)가능성들이 다양하게 그린다. 이를 통해 영화가 겨냥하는 것은, 어지간한 영화들이 그러하듯, '성장' '화해' 뭐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성장과 화해에 있어 흥미로웠던 것은 소위 '세카이계'로 분류할 만한 조건에서 꽤나 발전적인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다.
우선 '세카이'란 세계(世界)를 일본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에다 '-계'라는 분류의 의미를 다시금 집어넣은 조어라 하겠다. 이것이 구체적인 개념어로 작동하기 시작한 것은 1995-1996년 방영된 TV 애니메이션 <신세기 에반게리온> 이후 소위 제로연대(2000-2009)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의 공통된 경향을 설명하는 과정에서다. 즉, 세카이계란 '포스트-에반게리온'이라 할 수 있는 애니메이션이 공유하는 특정 경향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들 애니메이션들이 공유하는 경향이란 다음과 같은데, 하나같이 필요 이상으로 혼잣말을 많이 하는 주인공이 등장하고, 그 주인공이라는 작자들은 고작 '나'의 문제에만 집중하면서 '세계(세카이)'를 들먹이느 자의식 과잉의 괴이쩍음이 그것이다. 이러한 특징들이 '개념어'씩으로까지 격상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문제 세계의 문제'로 곧장 등치 시키는, 미시와 거시 사이의 그 어떤 매개도 고려하지 않은 채 손쉽게 큰 이야기를 뱉는 자잘할 인물들을 통해 세대론을 운운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례로 인터넷에서 꽤나 호응을 받았던 '기분이 곧 태도'라는 문장처럼, 인물의 감정이 곧장 세계 존망의 근거가 되는 이야기란 징후적으로 읽히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세카이계'라는 조어가 서브컬처씬을 휩쓸던 시기를 지나서는 일본 내 문학, 정치, 사회문화 비평계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기 시작한다. 일종의 세대론이나 담론적 지형도를 그리는 과정에서 손쉽게 시대/세대적 경향을 설명하기 맞춤한 탓이었다. 비록 그것이 포스트-에반게리온 이후 애니메이션의 경향들이라는 역사적 맥락이 제거되는 바람에 미묘한 디테일이 떨어지지만 "주인공(나)과 히로인(너)을 중심으로 한 작은 관계성(나와 너) 문제를 곧장 '세계의 위기', '이 세상의 마지막' 같은 추상적인 큰 문제와 직결하는 '자의식 과잉'의 세계관"으로 정리되는 것은 정말이지 비평적으로 써먹기 맞춤한 게 사실이었으니까 말이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겹쳐보면, 정말이지, 기가 막히게 맞춤하게 들어맞지 않는가. 횡으로 펼쳐진 멀티버스 하나하나가 악당의 기부니 하나로 멸망하니 마니 하는 위기를 맞이하니 말이다.
3.
다만 본 영화가 세카이계 특유의 자의식 과잉적 인물을 내세워 극의 발단과 전개와 위기를 진행함에도 특기하고 싶은 것은, '세카이계'라는 개념어 기저에 깔린 비아냥을 극복하는 지점이라 하겠다.
기실 세카이계와 같이 세대론 맥락에서 소환되는 개념들은 세대 간 갈등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기성세대보다는 그에 대립하는 세대를 지적하는 용도로 많이들 쓰였다. 대표적인 게 20대 개새끼론이 있겠는데, 여하간 그런 식의 비아냥과 조소와 갖은 조롱이 '세카이계'라는 조어가 겨냥하는 '자의식 과잉', '맥락 없는 미시와 거시의 접속'을 미성숙으로 읽어내는 것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세카이계'의 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청소년, 그러니까 '중2병'을 앓고 있는 그네들이 태반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세카이계'라는 키워드로 특정 세대를 소환해 읽는다는 것 그들의 미성숙을 전제하고 있다는 고까운 태도라 하겠다. 그 과정에서 20대 개새끼론처럼 특정 세대의 특징은 교정과 개도의 대상이 될 뿐. 이해와 수용의 여지란 있을 수가 없어 있을 수가.
그러나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부모자식 간 반복되는 지긋지긋한 역사를 비관하며 우주를 소멸시키려는 것들에 어른의 태도를 통해 극복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사실 그것이 뭐 얼마나 성공적인 회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그간의 '세카이계'물들이 북 치고 장구 치던 것과는 달리(정말?) 나의 혼란이 인정받는 순간을 목도할 수는 있다는 거다.
흡사, 사춘기 앓는 혼돈의 도가니가 세계와 부정교합에 시달릴 때. 스스로도 감당이 안 되는 소용돌이 자체를, "나 좀 어떻게 좀 해줘-"라는 교교한 비명을, 그 자체로 받아내 버리는 어른의 태도를 봤달까, 하는 거.
4.
여하간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의 징징거림을 손쉽게 어리광으로 치부하던 혐의를 이 영화는 벗어낸다. 젠체하며 종적 세계에 가하는 불친절함이 있기에 무수히 많은 '나'가 세계와 불화하는 건 필연적일 수밖에.
하지만 우리 모두는 유아적이었던 중2병 시절을, 자의식 과잉의 긴긴 실타래를 기어코 다 풀어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감지할 수 있다. 영화 속 악당이 세계를 증오하고 세계에 분노하는 감정의 모양을. 그래서 그를 삼켜서라도 품어 줄 태도가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나의 기분이 세계 존망의 근거가 되는 '세카이계'의 세계관은 발전된 형태로 도약한다. 한 세계가 다른 세계에 내미는 무조건적인 배려를 통한 종-횡의 종합을 통해서. 물론 이 역시 '나 좀 어떻게 해줘!' 따위의 대책 없는 불만에 '내리사랑'을 꽂아버리는 사랑과 평화 같은 고전적 가치의 실현이라는 점이 답답할 순 있겠지만. 항구적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고전'의 힘 아니었나.
암튼 나도 울고 너도 울었다면 고담준론이라 할 고전의 힘을 우리가 온몸으로 체험했다는 말일 거다.
영화일기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