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원물과 청춘물의 주인공은 같잖아요
개소리를 적어 내려가기에 앞서, 얼마 전 [씨네21]에 올라온 뉴진스의 <Ditto> 뮤직비디오를 연출한 신우석 감독니뮤의 인터뷰 한 구절을 살펴보자.
Q. 레퍼런스를 굳이 찾지 않는 성향이라고 들었지만, 많은 이들이 <Ditto>를 보고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를 떠올렸다. 혹시 참고했거나 은연중에 영향받은 작품이 있나.
A. 사실 나는 <여고괴담> 시리즈를 본 적이 없다. <여고괴담> 시리즈가 한국 학원물 계보에서 워낙 상징적인 작품이라 그렇게 느끼는 것 같다. 그리고 시나리오를 쓰면서 현실적인 한국 학원물을 그려내고자 했기 때문에 관객이 그렇게 느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목한 구절은 저거다 저거. "현실적인 한국 학원물을 그려내고자" 했다는 감독니뮤의 말. 현실적인 한국 학원물을 그려낸 결과가 <여고괴담>이라는 공포물로 이어지는 수순이라니. 이렇게 되면 뉴진스 멤버들+학교=<여고괴담> 도출 수순이라는 것은 한국 학원물 계보의 비루함을 보여주는 것도 같아서 참 거시기한 심정이기도 했다. 왜냐면, 당장 떠오르는 학원물의 이미지라는 것이 <여고괴담>이라는 공포영화 외엔 '청춘물'로 수렴될 길이 없다는 고백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학원물이니 하이틴물이니 청춘물이니 하는 것들이 공유하는 주인공이 '청소년'이라는 동일 존재임을 염두에 두었을 때. 그들을 대상으로 한 시공간의 창출, 재현 등이 우리에겐 '공포물' 뿐인가? 하는 약간의 갑갑함 같은 것.
물론 <Ditto> 뮤직비디오가 청춘물 영화와 아주 엮이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인터넷에 '뉴진스', '청춘물' 이렇게만 검색해 봐도 몇몇 글들을 살펴볼 수 있는 게 사실이니까. 다만 그 청춘물이라는 것이 '일본' 또는 '대만'이라는 시공간에 한정되어 '청춘물'로 소환된 게 특기할 포인트라면 포인트겠다. 더불어 대만이라는 곳과 일본이라는 곳이 문화적 차원에서 꽤나 깊게 동기화되어 있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거의 뭐 일본 청춘물 외에는 '청춘'의 이미지라는 것이 작동하는가? 하는 궁금증까지 생길 지경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하고 싶은 건 동시대 한국에서 찬란한 청춘과 그 이미지가 무엇인가, 존재는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없지 않을까, 싶은 게 나의 소감이다. 푸르른 봄날 같은 학창 시절에 대한 대표적 이미지라는 게 과연 우리에게 존재하는지 너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영화 기준 학창 시절과 관련된 작품이라는 건 <여고괴담> 같은 공포물 외에는 현실의 적나라함을 공포물 수준으로 묘사한 <박화영>, 또는 학창 시절의 혼란상을 그린 <최선의 삶> 같은 것들이다. 상업 또는 독립영화들 하나 같이 청춘에 부합하는 이미지들 보다는 성장기의 혼란상을 온몸으로 돌파하는 앙팡테리블에 주목하는 것도 같고.
영화 외 가수들이 재현하는 청춘의 이미지들은 어떠한가. 좀 나쁘게 말하자면, 일본의 청춘영화 이미지 없이는 우리 스스로의 삶에서 청춘의 찬란함을 소환할 수 없음을 고백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왜색을 이야기하자는 게 아니라는 걸 밝히는데, 이건 그냥 우리네 삶에서 '청춘'과 관련된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끌어낼 수 없다는 훌륭한 예시다. 우리네 인생에서 참고할 이미지가 없는 '삶의 한 켠'으로서의 청춘이라니. 슬프다 슬펑.
그런 점에서 우리가 아련하다 여기는 청춘물의 노스탤지어들은 가상의 가공된 노스탤지어로 다가가려 할수록 공허해질 뿐이다. 신기루의 신기루랄까. 그러니 그곳에서 공포가 샘솟고, 허무가 샘솟고, 슬픔이 샘솟는 거 아닐까 싶단 말이지. 이 허망한 시공간의 공회전과 불협화음이여.
그럼에도, 정말 그럼에도, 굳이 학원물이 청춘물로 탈바꿈하기 위해서 그들이 공유하는 '청소년'이라는 존재가 머무는 한국의 시공간을 쥐어짜 내보자면 어느메가 될까. 아마도, 학원/스터디카페/PC방/편의점/코인노래방 등이 아닐까 싶다. 학창 시절과 애초에 안녕하고 청춘과도 저만치 멀어진 육신을 지닌 입장에서 이런 후려침이 미안하지만. 이런 뇌내망상을 근거 한 장소들에서 청춘의 해사함을 묘사하고 모사하자면 어떤 방법을 동원할 수 있을까.
근거가 빈약한 탓도 있지만, 암튼 당장의 나는 모르겠다.
모른다. 모르겠다. 이 대책 없는 고백 아닌 고백이 허무하지만, 정말 모르겠다. 앞서 밝혔듯 학원물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는 나이에 청춘이랑도 실시간으로 숨 막히게 결별하는데 내가 어찌 알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깃들 수 있는 시공간의 창출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반복되고 있다.
다만 학원물과 청춘물의 배경이 되는 학교가, 더 정확히는 학창 시절이라는 시공간이 추억되는 방식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거듭 들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내심 기대해 보는 것은 그러한 시공간을 창출하는 존재 일반에 대한 주목이 뭔가 가능성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거의 무슨 용비어천가 수준으로 뉴진스를 언급하는 게 나 역시 민망하지만! 뉴진스 멤버들을 통해 청춘이니 하이틴이니 하는 것들이 소환되는 점을 떠올려보면 시공간을 통해 존재의 의미를 도출하기보다는 존재를 통해 시공간을 재정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와 같은 망상은 <Ditto>의 뮤직비디오가 비록 90-00년대 어드메의 시간대를 지시하고 있지만 그 시간대 속 뉴진스 멤버들은 2022년 이후 현재의 정보값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시공간의 매개를 훌륭히 실천하고 있다는 점에 근거한다. 열화 된 홈비디오카메라 속 멤버들이 빵사즈, 강고양이와 같은 현재 진행형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그리 이해할 수 있는 걸.
이렇게 되면 학원물, 하이틴물, 공포물과 같은 장르와 그 속 인물들 사이의 선행 관계나 인과/상관관계를 다시 돌아보는 것도 가능해진다. 뭐랄까, 장르적 컨벤션을 돌파하는 다른 가능성의 발견이랄까. 깃들 공간이 여의치 않으면 개척해 나가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일 것이니까 말이다. 이러저러한 이론가들의 금과옥조 같은 말귀들 이전에 실천을 통해 돌파하는 예시가 등장을 뉴진스에 있다는 대책없는 맹목적 지지의 문구로 짖던 입을 다물어 본다.
멍멍왕왕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