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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하루 Jun 01. 2023

안되는 되는 날

끊었을때 이어지는 것

무엇을 해도 뭔가 되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대체 뭐가 되는 일이 없는 날이요. 생각해보면 그런 날이 꽤 많았습니다. 출근 직후 적어둔 to-do 리스트가 무색하게, 예고없이 날아든 일이 제게 닥쳐올 때면 귀신같이 급하고 중요한 일이 연달아 터집니다. 연차내고 놀러가기로 한 날에는 비가오고, 그간 벼뤄왔던 식당에 갈때면 하필 오늘 문을 닫았거나 하는 운 없는 상황은 보통 여느 하루에 밀려 벌어집니다.


마땅찮은 현실 속에서 취업과 이직을 위해 면접을 보러 가는 날이면, 미처 확인하지 못한 날씨에 갑작스런 비가 쏟아집니다. 아차, 하필 오늘 날씨를 확인하지 않았네요. 매일 체크하는 게 일과인데. 1분 자기소개를 중얼거리느라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집을 나설때 오는지 마는지 애매했던 빗줄기는 눈에 보일정도로 굵어졌고, 금방 멈추겠지 하던 희망이 무색해져갑니다. 평소엔 발에 채일 정도로 많았던 편의점은 눈에 보이지 않고, 15분은 더 걸려서 걸어온 편의점엔 가장 비싼 장우산만 남았네요. 오랫만에 신은 구두에 발은 쓰려옵니다. 어찌저찌 도착한 면접장에서는 비 한 방울 맞지 않은 것 같은 뽀송한 경쟁자들을 보고 나도 모르게 바짝 움츠려들고, 바로 화장실로 향하지만 반곱슬 머리가 여김없이 풀어헤쳐진걸 이제야 확인합니다. 아침 내내 신경썼던 내 시간이 아쉬워 이내 짧은 절망에 빠집니다. 시작이 좋지 않은 하루는 기어코 좋지 않은 결과를 맞이합니다. 병풍에 지나지 않은 나는 이번에도 탈락하리란걸 누구보다 빠르게 직감합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밖에 없는 이 길에서 나지막하게 외칩니다. "오늘 정말 되는 일이 없네"


그런 날이 하루 이틀 이어지면 내 삶 전체에 의문이 들곤 합니다. 얼기설기 포장한 나의 가치가 끝내 까발려진 취업 준비생들은 서면으로도 대면으로도 이런 경험을 자주 마주합니다. 돈이라도 벌고있지 않냐며 자기위로라도 하고 싶습니다. 나름 선별하여 선택한 회사와 산업군이 잘못된 것일까. 애초에 나에게 맞지 않는 것일까. 내가 어필하는 경험이 내가 원하는 회사에 부적절한 것일까. 아님 '나'자체가 결함있는 인간인 걸까. 안되는 날은 늘어나고, 왠지 겹쳐서 일어나는 불행과 사건들은 내 인생이 틀렸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습니다. 왜 매번 이런일만 일어나는 걸까. 내 인생에 행운은 없을까. 지하 저 아래 심연까지 줄지어 내려가다 정신을 차리면. 내가 자리한 이 공간이 왠지 어색해집니다. 경험으로 불행의 실재를 확인한 나는 또다시 나에 대한 혐오감만 쌓아갑니다.


어린 시절부터 차근 차근 쌓아올린 자기 부정은 어느새 영글어 어른이 되었을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합니다. 밖에서 가져온 불행의 씨앗은 집에서 물과 비료로 점차 자리 잡아갑니다. 되려 집에서 만들어 밖에서 키워 돌아오기도 합니다. 집 안팍 다양한 출처에서 나온 불행들은 이제야 빛을 발합니다. 씨앗의 발육을 막을 타이밍이 분명이 있었을텐데. 나는 왜 키워만 온걸까. 조그맣게 날리는 홀씨조차 허공에 손발짓하며 매섭게 잡아들던 저였습니다. 더이상 자리없는 내 마음의 양분에 굳이 끼워넣은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래야만 했을까. 고민을 해보았습니다.


그간의 삶을 회고 해보았습니다. 실패에 두려워 움츠려들고, 취미인척 그저 아르바이트인척 말하는 나의 도전은 가족과 주위 사람들에게 비아냥 받습니다. 학업도, 말재주도, 외모도 인정받아본 적이 거의 없던 것 같아요. 초등학생때는 지나가던 중학생 커플에게 얼굴이 저러고도 살 수 있는지 의문이 든다며 키득거리는 소리를 들었고, 이제막 2차 성징을하던 저에게 엄마와 언니는 가슴이 작다며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습니다. 중학교 무렵 종합학원을 다니며 그동안 포기해 온 수학 점수가 확연히 올라 엄마에게 자랑할때면 그 옆에 컴퓨터를 하던 아빠는 성적표를 낚아챘고, 엄마가 보지 못하게 손으로 애써 가려놓은 수학 옆 과학 점수로 일장 연설을 늘여놓으며 인생을 호되게 지탄했습니다. 뺑뺑이로 가게된 2지망 고등학교를 아빠에게 알려줄때엔, 공부 못하는 학교에 갔냐며 주말내내 눈에 밟힐때마다 들으라고 내뱉는 한숨 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생각하고, 분노하고, 머리아픈 기억을 떠올리다보니 가족에 대한 회상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추억이라기 보단 과거. 내 안의 자격지심과 불안감은 어쩌면 가족과의 과거때문이 아닐까, 탓을 해봅니다. 애초에 집이란게 있었던 것일까요? 나를 양분삼아 갉아먹어 크게 자란 불행의 과육이 내 밖으로 터져나옵니다. 오랜 투병으로 빈약해진 면역력에 미처 대처하지 못한채 커져버린 암덩어리 마냥 말이죠. 가족력과 놓인 환경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보았을때 더욱 비슷하겠네요.


그런데 최근 신기한 경험을 했습니다. 분명 안되는 날인데, 앞에서 열거한 불행의 씨앗이 이내 무르익지 않은 경험이요. 자기계발서 속 마인드 이야기가 아닙니다. 비가 많이 오던 지난 주말, 편의점으로 향하던 중 달려오는 차에 흙 웅덩이를 흠뻑 뒤집어 썼습니다만, 그것마저 즐거웠던 날이었습니다. 그저 '긍정적인 마음'을 품어야지 하며 쇄뇌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웃음이 터져나왔습니다. 조금 더 불행이 있어도 될 것도 같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편의점은 리모델링을 위해 문을 닫은 상태였고 혹시나 하는 일이 일어났다고 낄낄거리며 10분거리에 있는 또 다른 편의점으로 향했습니다. 가면서도, 집에 이내 와서도 그저 웃었습니다. 단 10여분 전에 일어났던 일이지만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 날 저녁에도, 그 다음주 주말에도 같은 길을 걸을때면 그때가 생각나냐며 동행자에게 질문합니다.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고 말이죠. 으아 소리를 내며 고개를 떨구곤 너무 힘들었다고 말하지만 딱히 진심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미안하다거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보단 맞장구로 응수할 생각에 신이 납니다.


차이가 무엇일까요? 누군가 그립다 말하는 옛날 어린시절 이야기는 나에게 과거일 뿐이고, 어젯밤 고생담은 언제라도 다시 말할 추억이 되었습니다. 그때와 다른건 함께한 사람 뿐입니다. 매몰된 과거 기억에 현재과 미래를 저버리는 선택을 하던 나였지만 끝없는 심연 밖으로 나올 힘은 또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한 심오한 내면까지 끌어내어 평가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존재만으로 행복해 머지않는 사람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랑보다 맥없이 그저 하는 사랑은 오히려 큰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 이 사실을 잊어버리기도하고, 비로소 깨닫기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하기도 합니다. 조건없는 사랑을 처음 깨닫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겁니다. 그게 부모라면 더욱이요. 말을 토해도 털끝 하나도 움직이지 않으며 어쩌면 내가 말하는 동안, 적당히 체면 세울 수있는 말을 어떻게 할지 생각하느라 머리 아픈사람이 다름아닌 부모인 경우말이죠. 변화가 가능한 사람이면 얼마나 좋았겠냐만, 그들과의 혈연 관계와, 세월 속에 과장된 금전적인 끈이 면죄부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끝끝내 이 사실을 다시한번 확인한 저는 오래전 가족과의 연락을 끊었습니다. 그리고 내 삶을 살게 하는 사람과 인연을 이어가는데 집중했습니다. 비록 내 안의 과실이 터져 내상을 입혔지만, 5년가량의 시간이 지난 지금은 조금 회복되었나 봅니다. 이제야 몸소 깨달았지만 늦지는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절연이라는 좋은 회피도구를 또 하나의 생존기술로 써 본 결과, 꽤 추천할 만합니다. 누군가 끊어지지 않는 인연에 힘이 든다면 한 번쯤 시도해 봐도 좋습니다. 후회와 마음의 상처는 있겠지만, 모두를 잃어왔던 지금보다는 나을거에요. 미뤄만왔던 내 안의 '나'를 마주하고, 귀중한 사람에게 소중한 마음을 돌려주는데 남은 세월과 여력을 쏟아보시길. 혹여나 집으로 가져온 세상 커다란 씨앗이라고하더라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주는 사람은 반드시 내게 찾아옵니다. 그 희망을 잃지 않는 용기가 그리고 그 인연을 옆에 둘 노력이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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