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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통의 하루 Jan 30. 2023

05_어른 금쪽이는 AI가 피해 가는 걸까?

끼리끼리 모인 댓글창



우울증, 성인 ADHD, 반사회적 인격장애 등 마음 질환에 있어서 가히 전성기라 할 정도로 관심이 많은 요즘이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정신과 학술용어와 자극적인 사회현상 개념은 대중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 일례로 ‘가스라이팅’은 한때 붐을 일으키며 내 주변 관계에 대해 의심하는 계기가 되었고, 2030에게는 일반 명사화되어 별도로 주석을 달아놓을 필요가 없어졌다.


개인감정에 진심인 요즘 시대에는 많은 스피커들이 있다. 오은영, 김미경, 김지윤, 김창옥, 김경일. 이름만 들어도 짱짱한 그들이 강연을 할 때면 꼭 들고 오는 단골소재가 있다. 가족. 대부분이 가지고 있을 가족은 무엇보다 그 자리에 있는 다수의 청자로 하여금 큰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들이 말하는 가족 간 관계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부모는 남편과 아내로 나뉘고, 딸과 아들, 첫째, 둘째, 셋째 등 가정 내 역할과 위치, 출생 순위와 같은 다양한 기준으로 엮이고 분화한다. 가족 내 여러 관계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관찰력은 소름 끼치게 정확하다.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에 눈치 보며 친한 지인에게 조차 말하기 꺼려졌던 이야기가 영상을 통해 흘러나온다. 터부시 해온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며 자녀인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말을 한다. ‘부모도 부모가 처음이라’ 얘기하며 처음이라는 횟수로 부모의 과실을 정당화하는 대신 ‘부모는 적어도 부모도 자녀도 모두 경험해 보지 않았느냐. 자녀는 자녀만 경험해 보았다’ 말한다. 자녀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느껴본 부모가 오히려 상처를 대물림 하는 행태를 지적한다. 처연한 희생으로 과거 실수를 말없이 덮을 수 있다고 하는 부모의 믿음을 짓밟는다.


영상에 마음이 동한 여느 집 아이들은 너도나도 본인의 아픔을 댓글로 적는다. 생판 모르는 남들에게 개인 사정을 얘기하는 게 부끄럽지도 않냐며 나무라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정말 불화의 당사자인 부모와 얘기해 보지 않았을 것이라 짐작하는 거라면 섣부른 판단이다.




시도는 해보았다. 영상이라던가 책이라던가 하는 곳에서 조금 용기를 얻고, 지금이라도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운을 띄운다. 부드럽게 다가가볼까 하며 부모의 고생을 치성하며 나의 미성숙함을 강조한다. “그런 와중에 나는 이런 마음이 들었다” 하며 아쉬웠고, 참 아팠다 말한다. 나는 이제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 내 속 얘기를 들은 부모는 미안한 내색을 비치며 “이제라도 말해줘서 고맙다.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그런 마음을 지니고 있었구나” 할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짧게 미안하다 한마디면 되었다. 나도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대답할 준비를 하고 온 거니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내 눈앞에 아직도 선한 기억과 그때의 감정들은 거짓이 되었다. 부모에게는 내겐 강렬했던 그 기억이 없었다. 졸지에 낭설을 퍼트린 이야기꾼이 된 나는 당황했다. 할 말을 잃은 내 앞에서 그들은 때론 분개하기도 했고, 자녀의 헛소리를 가증으로 묵시하곤 했다.




그간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들을 봐왔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떼쟁이는 지칠 줄 모르는지. 나는 지난해에도 엄마에게 말했다. 아빠와 연락을 끊으면서 나는 근 2년간 엄마를 비롯한 모든 가족과의 연락을 끊었다. 요즘엔 종종 문자를 하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엄마는 간혹 집에 들어와 편히 쉬라는 말을 한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 사이에, 혼자 힘들게 밖에서 지냈을 날만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며 행복한 집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조금은 들어주려는 것일까, 아빠가 반성하며 미안하다는 언급을 종종 하는 것일까. 일어날일 없는 상상을 하며 참아왔던 서운한 점을 장문으로 하나 보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고, 집이라는 장소가 사무치게 두렵고 다가가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그러나 반전은 없었다. 내 말에 대한 언급은 일절 없이 그저 엄마가 그때 직장에 다니고 공부를 하느라 그랬다. 아빠는 옛날사람이라 원래 성격이 그렇다. 본인의 상황과 감정적인 울부짖음만 가득하다. 마무리하듯. 이제라도 서운한 점을 알면 점점 바뀔 것이라며 엄마가 바라는 가족의 이상향을 다시 어필했다. 이 날 또다시 느꼈다. 아. 서로 다른 얘기를 하고 있구나, 괜한 시도를 반복했구나. 연락을 단절하며 숨통을 조금 트였던 올가미가 다시 목을 조여 오는 듯했다.


거듭된 거절은 마음을 굳히는 재료로 쓰인다. 엄마는 모른다. 시멘트가 굳기 전, 말랑말랑한 진흙 상태였을 때 오히려 차가운 물을 부었음을 말이다. 왜 이제와 망치로 조금씩 깨부수어 가며 본인이 원하는 모양으로 살리면 된다고 하는 걸까? 조각난 나는 어찌 되어도 된다고 느끼는 걸까.


가정폭력 개조모임 = 강연 댓글


자녀의 고해성사에 무시와 분노로 일관하는 부모들은 보통 대답이 비슷하다. 다 이러고 산다. 이만치 키워줬음 됐지 바라는 게 많냐는 거다. 종종 전문가를 비웃으며 부모의 마음을 어찌 제3자가 아느냐 말하기도 한다. 그들이 다른 각도로 문제를 바라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견의 맹점을 바라보지 못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쩌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는 공감 훈련이 되어있지 않은 부모에게 자녀가 갑작스럽게 다가와 본인의 치부를 건들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같은 말이라도 공부하라는 부모의 말은 잔소리가 되듯, 직접적인 자녀의 원망이 공격으로 다가와 이에 적극적으로 방어한 것이다. 이들의 일관적인 방어기제는 ‘금쪽같은 내 새끼’의 어린이 금쪽이와 다름이 없다. 이 어른 금쪽이들은 본인들도 모르게 상대방에게 상해를 준 채 행동을 정당화한다. 과거에 대해 고찰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부모-자식은 철저한 상하관계로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미성숙한 사고가 세월로 인해 고착화되어 버린 어른 금쪽이들은 본인의 사상을 세상의 이치인 양 아이에게 가스라이팅하는 것이다.


부모에 치인 자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유튜브 영상에는 사랑에 굶주린 어린아이들만 득시글하다. 미성년자는 물론이고 이미 성인이 되어 스스로 밥벌이를 하고 다니는 외형만 어른인 아이들까지 다양하다. 상처받은 아이들은 부모가 공감해 주지 않을 아픔을 그들끼리 공유한다.


전쟁고아들처럼 모여있는 그들의 모습이 측은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에게서 내가 보이기 때문에서 일까. 아니면 변화하지 않을 부모가 미워서 그들이 불쌍히 느껴지기 때문일까. 아직 풀리지 않는 답에 의문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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