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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각, 교육...?!

누구나 한 번은 고민해봐야 할 우리의 교육 문제, 나도 해봤다.

우리 교육의 문제점은 늘 제기해온대로 주입식, 암기식 교습법이 가장 바꿔야할 과제이다. 

그러나 교육자 스스로가 그런 교육을 받아온터라 쉽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문제의 본질에 접근해야 한다. 

경쟁적 서열화, 걸러내기식의 교육 평가제로는 결코 혁신적인 사회로 거듭날 수 없다. 

이것은 이미 우리 교육의 문제점으로 들어난 해묵은 과제다. 

궁극적으로 우리 사회는 모두다 잘 사는 사회로 가야 한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 피라미드 구조의 사회로 만들기 보다는 다 함께 동반 성장하는 사회로 가야 한다는 지향점을 향해 우리는 함께가는 교육으로 전환해야 한다.   

따라가는 교육, 그것에 발맞추지 못하면, 낙오하는 교육이 아닌, 다 함께 서로 같이 가는 교육으로 말이다. 이미 핀란드에서는 학교에서 내주는 숙제를 가정에서 10분이내로 마칠 수 있는 과제로 선생님이 제한하고 있다. 이는 적절한 자기 관리, 그리고 스스로의 성취감으로 자존감을 높히고, 더 오래 숙제를 해서 버티는 학생들만 누리는 그들만의 리그로 학교를 방치하기 않겠다는 생각이 더 강한 것이다. 뭣이 중한지 아는 것이다. 좀 더 똑똑하고 더 나은 영재를 만드는 교육은 이미 후진적 발상이다. 창조적인 것과 혁신적인 것은 암기나 주입식 교육에서는 절대 나올 수 없다. 빠른 계산, 적응은 이미 컴퓨터의 영역으로, 인간이 할 필요가 없다. 인간은 창조적이고 혁신적이며, 함께 다 같이 잘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앞선 교육의 문제점으로 우리는 엄청난 양극화, 사회 불안정, 천박한 자본주의 시장에서의 도덕적 해이, 비인간적 사고, 묻지마 범죄 등의 부작용을 겪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변화를 욕망했고 그 변화의 중심에 교육이 있으며, 그곳에서부터 우리는 변화해야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러나 늘 이것이 무엇에 좌절되는가? 바로 상대적 우월감, 기득권층, 소위 지도층이라는 세력에 막혀 개선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줄세우기, 걸러내기식 교육의 수혜자로 자신의 후세들도 그렇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을 효과적으로 막고, 이들의 생각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결코 현재의 문제는 한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현실은 그들의 더 진화된 양극화적 사회의 기득권 굳히기 제도에 다가가며, 우리가 바라는 다 함께 잘사는 세상에 역행하고 있다.   

방향성과 지향점은 이제 우리는 걸러내기식이 아닌 함께 나아가는 교육으로 변화해야 함을 알았다. 그렇다면 방법론적인 '어떻게'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답은 너무나도 쉽다. 피라미드 구조의 삼각형을 평등한 사각형으로 만드려면 상층부를 도려내면 된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그런 방법으로 엄청난 대가를 치루었다. 그것이 바로 공산주의 몰락이 가져온 폐해였다. 공산주의는 억지로 지주층의 재산, 기득권을 빼앗았다. 그래서 사회의 분열을 가져왔고, 결국 그 행위자들의 부폐로 몰락했다. 이것은 어떤 누군가가 칼자루를 들고 휘둘러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삼각형을 사각형으로 아니 원으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앞선자들을 뒷쳐진 자들과 함께 하도록 할 수 있을까? 바로 서서히 그러나 올바른 도덕적, 윤리적 방향으로 함께 즐기도록 하면 된다.    

잠시 샛길로 빠져 우리는 도덕적, 윤리적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에게 무조건 잘하고, 그들을 치켜세우는 것, 이타적 행위가 도덕적, 윤리적으로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자본주의가 가져온 또다른 병폐이다. 가진 자에게 굽신거려 낙수효과를 보게하는 것이 어찌 올바른 방향인가?! 이것은 비위를 맞추는 것일 뿐, 결코 사회에 보탬이 되거나 나에게 있어서도 절대 득이 될 수 없다. 나의 자존감과 감정을 지폐로 바꿀 수 있다고 착각하고, 그것으로 보상이 될 수 있을거라는 발상이 바로 천박한 자본주의 발상의 병폐이다. 감정노동자라는 말은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된다. 인간의 존엄성과 감정은 고유한 것이고 보호받고 서로 존중해줘야 한다. 그 어떤 보상으로도 대신할 수 없다. 이것이 무시되기에 묻지마 범죄, 욱범죄, 생명경시 풍조로 드러나는 것이다. 손님은 왕이다라는 이런 쓰레기 말부터 없애야 한다. 정당한 서비스와 적절한 보상이 평행하고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이 거래이고 경제활동이지, 가진자에게 비위를 맞춰 보상받는 것이 노동이고 경제활동이 아니다.   

다시 앞선 화제로 돌아와서, 즉 먼저 뛰어가는 이가 있으면 좀 천천히 뛰어가도록 만들고, 천천히 걷는 이가 있으면 좀 빨리 걷도록 하면 된다. 이것에 보상이 있을 수 없고, 약탈이 필요가 없다. 그냥 서로가 좀 더 그 간극을 좁히려고 노력하면 된다. 그러려면, 목표점에 대한 지향점을 더 나은 지식, 성과, 숫자가 아닌 사람이 중심인 목표점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성경에도 나오고 칸트의 정언명령에도 나온 것처럼, 사람은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이용되서는 안된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사람은 목적이 되어야지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런 사고에서 출발해야, 피라미드의 불평등, 양극화 구조가 점차 평등하고 공정하며, 다 같이 행복해지는 과정으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교육에서는 선행교육을 막고, 치열한 경쟁주의적 평가, 교육현실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 모두가 공부로 치부되는 학습을 멀리하고, 경험을 많이 하면 된다. 

최소한의 도덕적, 윤리적 사회 규범만을 학습하고, 나머지 삶의 있어서 우리가 흥미롭고 몰입도 있는 각자의 관심사에 경험치를 높혀주는 것으로 교육현장을 바꾸는 것이다. 그 경험도 결코 기존의 선행된 경험자, 노하우를 지닌 현재 기득권층이 이끄는 현장에서가 아닌 그들만의 도구와 방법으로 진행되도록 방치해야한다. 우리는 최소한의 안전망만 제공하면 된다.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속에서 이미 우리가 경험한 세상과 후세들이 경험할 세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해결에 마주하는 그들의 사고나 접근이 완벽하게 다를 수 밖에 없기에, 그들의 자연적 경험 사고를 통해 문제 해결방안을 모색토록 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혁신적인 새로운 아이디어 발상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No.1이 아닌 Only 1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쳇바퀴돌듯 전혀 현실에서 써먹지도 못하는 교육내용을 모두가 획일적으로 배우고, 그들을 성적으로 줄세우는 방식으로는 절대 다함께 행복한 사회로 거듭날 수 없음을 직시하고, 기존의 사고방식의 패러다임을 벗어나 놀면서도 충분히 다같이 잘 살 수 있음을 인식하고, 그 놀이에 집중해야 한다. 그 놀이가 쾌락이 아닌 도덕적, 윤리적 방향성만 잃지 않는다면, 우리 모두는 즐겁게 행복한 삶을 다같이 함께 누릴 수 있는 사회로 만들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두서없는 나의 생각에 이견도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지향점엔 이견이 없었으면 한다. 다 같이 잘 살자~라는 것에 이견이 있다면 너무 슬픈 일이 아닌가?!  

-끝-

<사진, 글, 모두 JackL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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