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CANGGU_day11
마지막 날 아침이다. 아침부터 엄청난 피로감에 새벽에 한번, 이른 아침에 한 번을 깼다가 다시 잠드는 바람에 몸 상태가 좋지 않다. 왠지 배도 싸르르 아픈 것 같고.(제발 기분 탓이길)
근처에 약국이 문을 열었길래 인터넷에서 봐 둔 인도네시아 장염약 두 개를 사서 해변가에 앉았다. 아파지기 전에 먹어두는 게 좋겠다.
마지막날이라고 생각하니 조금 울적한 기분 반, 얼른 집에 가서 내 침대에서, 뽀송뽀송하고 내가 좋아하는 향이 나는 내 방(정확히는 집주인의 방)에서 푹 자고 싶다는 생각 반이다. 어제까지 고민하던 짱구에 과연 라브리사 하나 때문에 가는 게 맞는 건가. 차라리 숙소에 캐리어를 맡기고 여유롭게 사누르를 즐기다가 공항에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다 보니 마지막 풍경 다 놓치고 있다.
이왕 결정한 거 가자. 이 시간도 중요한데 머릿속에 고민들로 놓치기엔 너무 아쉽잖아.
사누르의 고요함과 잘 어울리는 아침이다. 이곳에는 노인들이 많은데, 은퇴한 호주인들이 이곳에서 노후를 보낸다더니 그 때문인가 싶다.
각자 커피를 사서 나눠 먹는 노부부, 좁은 골목길을 손잡고 걸어가는 부부, 서로 놀리고 놀림당하며 웃는 그들을 보니 기분이 좋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다정하게 말을 걸어준 것도 모두 그들이다. 골목에서 큰 개가 너무 짖어서 무서워하는 내게 괜찮아,라고 말하며 달래 주던 할아버지도 그렇고 하나같이 다정하고 스위트하다. 정정, 대부분 다정하고 스위트하다. 그들 중에도 누가 말거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서로 인사하는 분위기에도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하고 ‘누구든 건드리기만 해 봐.’하는 표정으로 지나간다. 물론 나도 그런 기분일 때가 있기 때문에 이해한다.
이주가 되어가니 슬슬 몸에 무리가 오는 건지 피곤이 쌓여있다. 아침 시간에 조식도 간단히 먹고 해변으로 나오길 잘했다. 고요하고 좋다. 그나저나 어제오늘 이 동네 개들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몰려다니면서 너무 짖네. 니들 양아취니?
숙소 앞 가정집에 개조심 그림과 문구가 있기에 한국이나 발리나 개조심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웃었다. ‘그림만 요란하지 알고 보면 귀여운 강아지가 있는 거 아냐?’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보니 진심 저렇게 생긴 산만한 개를 산책시키고 있었다. 무섭다고요.. 왜 그렇게 크냐고요.. 누가 개조심 팻말에 진짜랑 똑같이 그리랬냐고요 엉엉.
짱구에 갈 거면 조금이라도 빨리 넘어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방으로 돌아와서 어제 싸 둔 캐리어를 정리하고 그랩을 불렀다. 짱구가 제발 좋아야 할 텐데.
차에 앉아 반은 뜬눈으로 졸다 보니 짱구란다. 여기서 포르셰를 봤다. 제법 부자들이 사는 동네인가 분위기가 우붓, 사누르와는 또 다르다. 발리는 도대체 어떤 곳인 거야.
짐만 보관하려고 잡은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43,000원짜리 방인데 이건 재앙이다. 여기서 하룻밤을 자지 않아도 되는 게 다행이라 해야 할까.) 캐리어만 놓고 바로 라 브리사로 향했다. 여기 가려고 짱구까지 넘어왔으니 아주 뽕빠지게 있어 보자 하고 들어선 순간 우아, 이게 무슨 일이야.
일찌감치 와서 그런지(12시가 채 안 됨) 예약 없는 워크인으로도 자리가 충분해 보였다. 늘어지게 있고 싶어서 누울 수 있는 자리를 물어봤더니 미니멈차지가 너무 비싸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앞에 누워 있는 사람들 부럽다. 자본주의에 지고 말았다.
내가 앉은 자리는 미니멈 차지 600k만 채우면 바다를 코앞에서 보며 마음껏 쉴 수 있다. 돈으로 뷰를 샀달까. 미니멈 차지가 없는 자리도 있었지만 오늘은 여행의 마지막날이니까.(이래서 여행지 바가지가 기승을 부리는 모양) 더 편한 자리는 더 비싸고 저렴할수록 불편해지는 것. 이곳은 편리함을 돈으로 산다. 좋은 뷰도 포함해서. 그렇다면 나는 어느 지점쯤에 있는 고객일까. 600k이니 중간 정도 될 것이다. 언제나 중간이었던 삶답다.
사누르에서 넘어왔더니 짱구는 훨씬 액티브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바다에는 서퍼들이 있고 파도는 거세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비록 돈을 많이 쓰긴 했지만 오길 잘했다.
까다롭지 않은 입맛에는 음식도, 칵테일도 나쁘지 않은데 모든 자리가(아마도) 스모킹이 가능하다는 게 흠이다. 내 앞자리엔 정말 천사가 아닐까 싶을 만큼 예쁜 아기와 가족이 있는데 그 옆자리에서도 담배를 피운다. 끝도 없이 피워대는 담배를 보자니 아기가 걱정된다. (오지랖 멈춰)
그러고 보니 이곳에도 아기를 데리고 온 젊은 부부가 제법 있다. 취향과 가치관이 맞다면 저런 삶도 좋을 것 같다. 그러기 쉽지 않은 게 문제지만 평생의 친구 같은 배우자와 인생을 함께 탐험하는 것도 좋겠지.
주변에 결혼을 강추하는 사람들은 없고 나를 부러워하는 사람은 많다. 발리에 혼자 간다고 하니 제일 부럽다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물론 그들 또한 일상에선 내가 겪어 보지 못한 크고 작은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 부족함 없고 충만하다. 누구와 함께여도 좋고 혼자라도 좋은 삶이라 더할 나위가 없다. 무엇보다 나는 지금 짱구 해변가에 비치클럽의 전망 좋은 자리를 돈으로 산 걸. 뭐가 더 필요해.
2주를 꽉 채울까 하다가 2일을 남겨두고 귀국하기로 한 것은 좋은 결정이었다. 돌아가서 충분히 쉴 수 있을 테니 마음을 잘 정리하고 앞으로 1년 간 또 열심히 일해 보자. 다시 일하기로 결정한 후에 어디에 소속됐다는 느낌보다는 프리랜서로 일할 때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프로젝트 하나를 완성하는 것을 목표로 일하기로 했다. 평생직장이라거나, 절대로 그만 두면 안 된다는 식으로 나를 옭아매지 말아야지. 인생을 크게 보고 계획하되 하루하루를 가볍게 사는 건 늘 내게 필요한 태도이다.
멀리 서핑하고 수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거 완전 그건데, 탑건 매버릭 그건데. 있지도 않았던 미국에서의 청춘이 막 그리워지는 풍경. 끝내준다.
점심때 들어와서 저녁까지 반나절을 있으면서 600k를 채우자니 그것도 곤욕이라 중간중간 해변에도 나갔다 오고 옥수수도 먹고 왔다. 오후가 되니 온갖 서퍼들 다 나와서 신나게 서핑하는데 정말 잘한다. 영화에서나 보던 화려한 턴 이런 걸 눈앞에서 보자니 신기하고 멋있다.
등산 모자를 쓰고 앉아서 잘도 여유를 만끽하며 대부분의 시간이 좋았는데 내 앞자리 엘프 부부가 떠난 후가 문제였다. 앞에서 피우는 담배 연기를 맡으며 코리안 비비큐 윙을 썰어 먹자니 깊은 현타. 담배 같이 피우는 줄 알았다 이 새퀴야.
라 브리사 다 좋은데 금연이 아닌 게 아쉽다. 금연으로 하면 손님이 많이 줄어들려나.
칵테일 3잔, 빈땅 1병, 카페라테, 피자 1판, 코리안 스타일 윙까지 해서 694,500Rp를 내고 보니 이건 음식 값이라기보다는 자릿값이 맞겠다 싶었다.
다음에 간다면 라 브리사 앞 해변가에 타월 깔고 자리 잡아 석양보고 숙소로 돌아오겠다. 라 브리사는 한 번이면 됐다.
일찌감치 석양까지 봤겠다 저물어가는 해가 심상치 않아서 계산을 마치고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해는 졌고 어두워진 거리에 혼자 있는 게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고젝 바이크가 안 잡혔다. 라 브리사 근처 어디를 찍어도 고젝 바이크를 운행하지 않는 지역이라며 잡히질 않았다. 점점 번화가를 지나는 느낌인데 짱구 시내는 전혀 모르고 오로지 라 브리사만 보러 온 거니 낯선 곳에서 갑자기 공포가 몰려왔다.
구글 지도상에서 숙소까지는 걸어서 30분, 그마저도 라 브리사 올 때 봤던 기억으로는 상당히 외진 곳이라 겁 많은 내가 걸어가는 건 무리였다. 이미 길이 점점 어두운 쪽으로 가고 있었다.
최대한 고젝이 잡히는 곳까지 걸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상점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포인트로 잡고 고젝을 시도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라 브리사로부터도 한참을 걸어왔는데도 잡히지 않았다. 이걸 어쩐담. 길거리에서 자기들끼리 얘기하는 데도 사람들이 모여 있으면 너무 무서워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더구나 좀 일찍 나오긴 했지만 나는 오늘 발리를 떠나야 한다.
마침 할머니 몇 분이 지나가고 계셔서(호주분인지 미국분인지 모르겠다) 붙잡고 말을 걸어 봤다. 너무 당황스러우니 영어도 뒤죽박죽.
고젝.. 고젝이 안 잡혀요. 이거, 애플리케이션이거든요. 고젝 애플리케이션. 그나저나 고젝 아세요? 저 집에 가야 하거든요. 고젝이요.
아마도 잔뜩 겁에 질린 동양 여자 아이(그들은 동양인을 어리게 본다)가 울먹거리며 뒤죽박죽 얘기하니 상황이 심상치 않다고 느꼈나 보다. 그들은 멈춰 서서 천천히 다시 말해 보라며 내가 정리가 될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나는 다시,
고젝 바이크가 잡히지 않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항상 앱에서 잡았었는데 어딜 찍어도 이 근처에서는 고젝을 이용할 수 없다고 나와요.
그러자 상황을 알겠다는 듯, 셋이 모여서 의논하더니 본인들이 나를 고젝 기사에게 데려다주겠단다. 네? 고젝 기사가 어디에 있는데 저를 데려다주나요.
내가 많이 불안해 보였는지 숙소는 얼마나 걸리냐, 바이크로는 몇 분이냐, 걸어서는 얼마나 걸리냐 물으며 한참을 걸어가니 정말로 고젝 바이크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맙소사. 이게 뭐죠? 나는 정말 울 것 같은 표정, 정말로 울 것 같았다,으로 고맙다고 인사했다. 정말 고마워요. 당신들은 천사가 아닌가요?
그러자 한 분이 그들을 가로막아 서서는 자신이 말하는 것이 들리지 않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아마 30,000루피아를 부를 텐데 20,000루피아 이상은 주지 마. 그건 너무 비싸니까. 헬멧을 안 주면 달라고 해. 짱구에서는 이렇게 잡아서 타기도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그리고는 정말 쿨하게 떠나갔다. 나 혼자 뒤에다 대고 땡큐, 땡큐를 연발했다. 어렵게 바이크를 타고도 한참은 긴장 상태였다. 숙소를 너무 외진 곳에 잡은 것이다. 밤에 이동할 것을 고려했어야 했는데 갑자기 계획을 정하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바이크 타고도 외진 곳으로 한참을 가면서, 이 사람이 나를 어디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두고 지갑만 갖고 가도 별 도리가 없지 않나, 어째서 이런 위험한 계획을 한 거지, 자책했다. 제발 이 사람이 여태까지 내가 만난 인도네시아 사람들과 같이 선한 사람이길.
마침내 익숙한 식당이 보이고 숙소의 팻말이 보였다. 오 신이여. 감사합니다. 이 청년에게도 감사를. 이미 라 브리사 갈 때 가격을 알았기 때문에 그 값만 줘도 됐겠지만 나는 좀 더 더해서 비용을 주었다. 그러자 두 배를 부르는 드라이버. 노노, 아무리 그래도 선은 넘지 마요. “나 이미 가격을 알아요.”하고 단호하게, 그러나 웃으며 말하니 그도 쿨하게 간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 아까 할머니들께 좀 더 고마운 표현을 했어야 했는데 너무 당황해서 경황없이 보낸 것이 미안하다. 어디서든 축복이 함께하길.
쿵쾅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방에 앉아 만약 다음에 발리에 온다면 절대로 가성비 숙소는 잡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특히 혼자 올 때는 더더욱. 무조건 4성급 이상 호텔로만 잡아야지. 그리고 이 방을 4만 원이나 받는 건 정말 너무했다는 생각을 다시 했다. 위치도 컨디션도 최악이다.
마지막까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던 우당탕탕 발리 여행이 정말로 끝이 났다. 너무 오랜만에 해외여행인 데다가 출국 당일까지 면접보고 연봉 협상하느라 정신없이 떠난 것치곤 나름 즐겁게 보냈다. 2주(정확히는 12일)나 있었더니 적당히 아쉽고 적당히 집이 그리워질 때쯤 돌아가는 것도 좋다.
이제 7시간을 날아서 다시 나의 일상으로 간다. 또다시 여행자가 될 날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여행이 꿀맛같은 휴가가 되도록 일상을 밀도 있게 잘 살아야지.
그럼 여기까지, 발리에서 안 AHN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