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슬기로운 직장 생활
직장은 어느 곳보다 가스라이팅하기 좋은 곳이다. 기본적으로 위계가 있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요즘 수평 문화 만들기로 직책 없애기, -님으로 호칭 통일하기 같은 정책을 쓰는 회사들이 많지만, 차장님을 OO님으로 부른다 한들 암묵적으로 저 사람 직급은 '차장'이라는 게 모두의 머릿속에 있으므로 위계가 완전히 사라지긴 어렵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러한 구조가 회사를 돌아가게 만든다고도 생각한다.
일하기 위해 상하가 구분된 조직이라는 것은 그만큼 약자에게 불리한 조직일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직장 내 괴롭힘 판례 몇 개를 보면 회사 내의 이러한 힘의 논리를 인정하는 듯한 내용을 볼 수 있다. 회사에서 부여한 '힘' 또는 '권력'을 가지고 상대적 약자인 부하 직원을 정서적, 신체적으로 압박한다면 그것은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한편, 정당한 업무 피드백도 '가스라이팅'으로 치부해 버리는 사람들도 본다. mz니 뭐니 굳이 세대를 나눌 필요도 없이 그런 사람들은 늘 있어왔다. 최근엔 개선사항에 불복종할 핑계로 '가스라이팅'이라는 그럴듯한 말로 변명하고 있을 뿐, 개인은 물론 조직의 성장을 저해하는 사람들은 낯설지 않다. 이런 핑계가 먹히지 않으려면 상당히 고도화된 피드백 과정을 전사 차원에서 만들고, 모든 구성원이 공감할 수 있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겠지만 (모두 알다시피) 회사란 그렇게 상식적으로 굴러가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이 글은 가스라이팅 당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이트를 주고자 쓰는 것이므로, 무책임한 회피자들에 대한 얘기는 다음에 하기로 한다.
서두가 길었는데, 아무튼 회사란 가스라이팅이 일어나기 쉬운 곳이기도 하고 실제 자주 일어나고 있기도 하다.
나 역시 여러 번의 가스라이팅 경험이 있다. 나를 가스라이팅한 상사들의 공통점은 '무능력했다'는 것이다. 무능력을 만회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스라이팅을 선택한 것일 수 있겠다.
상사 A는 틈만 나면 내가 일하는 방식이 '희한하다'라고 했다. 그가 희한하다고 말한 업무 방식은 이를 테면, 엑셀 파일에서 셀을 '병합'한 후 '크기를 키워' 사용하는 것. 그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는 방식은 알려주지 않은 채 '안 대리는 참 희한하게 엑셀을 쓰네?'라고 했다. 사회 초년생이던 나는, (학력을 인정받아 대리로 입사했지만 실무 경험은 전혀 없었다.) 정말 내가 모르는 직장인들만의 엑셀 쓰는 방법이 있는 줄만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완전히 개소리인 데다가, 워드 파일 하나 만들 줄을 몰라서 부하 직원에게 시키고, 아직도 독수리 타법을 쓴다고 전사에 소문난 그가 할 말은 아니었는데 그때의 나는 그 말을 듣고 휘청거렸다.
잘 몰랐기 때문이다.
1. 가스라이팅이라는 것을 아는 것만 해도 반은 간다.
가스라이팅을 잘 당하는 사람을 보면 보통 어리숙하고 여리고 순수한 사람들이 많다.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은 잘 걸려들지 않는다. 지금의 나라면 그때 그가 하는 말이 완전히 개소리라는 걸 알았을 테고, 그냥 속으로 '저 새끼 또 헛소리하네.'하고 비웃었겠지만 그때의 나는 너무 어리숙하고, 순수했다. 애석하게도 사회에서 순수하다는 건 좋은 의미가 아니다. 순수한 사람은 쉽게 약자로 여겨진다. 가스라이팅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이걸 놓치지 않는다.
저 새끼가 또 헛소리하네,라는 걸 알기만 해도 내면에 방패가 생긴다. 탕탕, 그가 마음껏 쏘아댄 말에 무심하게 반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방패가 없는 취약한 내면은 즉시 상처받는다. 더 심한 경우엔 자책한다. 남들은 다 잘하는데 나만 이렇구나, 자책하고 자기를 비하한다. 사실이 아님에도, 마치 그게 사실인 것처럼 휘청거린다. 한 번은 그럭저럭 넘어가도 이런 경험이 반복되고 쌓이면 내적인 힘은 빠르게 약해지고 결국은 상처받고 만다.
그것은 가스라이팅이다. 즉, 개소리란 말이다. 이걸 알기만 해도 나를 보호할 기초 체력은 있는 것이다. 명심하자, 저 말은 개소리이다.
2. 이전 경험을 기억하자. 내가 그렇게까지 최악인가?
가스라이팅은 대부분 '너 이상해', '나나 되니까 너를 데리고 있어 주지.'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나 역시도 가스라이팅하는 상사 밑에서 오랫동안 그런 평가를 받고 있자니 정말 내가 일을 못하는 무능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후배들도 나를 무시했다. 상사는 밤새도록 일하는 나를 '하는 일도 없는 주제에'라며 후배들에게 험담했다.
쓰레기 같은 인성을 가진, 지금 생각하면 상대할 가치도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런 평가에 오래 노출된 나는, 후배들 앞에서도 주눅 들기 시작했다.
정말 심각하게 퇴사를 고민하던 나는 이 회사에서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억울했다. 이렇게 나가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하는 일이 뭔지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후배 따위의 시선이 무슨 대수랴. 나는 내가 원하는 바, 즉 프로필에 쓸 만한 프로젝트 하나는 마치고 나가겠다는 각오를 했다. 동시에 내가 이제까지 받아왔던 평가를 기억했다.
(이제부터 약간의 자랑과 TMI가 있을 예정이니 흐린 눈 부탁합니다.)
나는 어딜 가든 잘하는 아이였다. 피아노를 처음 시작한 5살부터 대학원에서 연구 조교로 일할 때까지, 늘 우수한 성적에 성실한 아이였다. 대학원에서는 같이 수업 듣는 박사님들까지 공개적으로 나 같은 조교를 만나 행운이라고 말했다. 영어 학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땐 13명의 학생들은 인계받아 48명까지 늘려 놓았다. 원장님은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며 퇴사를 만류했다.
첫회사에서는 회사 설립 이래 최초의 조기 승진자였다. 어느 회사에서 왔냐며 나에게 입사 제안을 한 분들도 있었다. 불과 1년 만에 연봉 앞자리가 바뀌었다. 거기에 자신감을 얻어 이직을 한 것이었다.
이런 내가 '일못러'라니.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는 어떠한 인수인계도 받지 못한 채로, 그야말로 멘땅에 헤딩하듯 업무를 배워 나가고 있었다. 전임자는 물론이고 내 일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퇴사하고 없었다. 그런 자리에서 마치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차장급이면 가능할까? 그렇다면 그들은 차장급을 뽑았어야 했다. 그들이 뽑은 건 고작 대리인 나였다. 상대적으로 값싼 인력을 뽑아서 앉혀 놓고 차장급만큼 일하지 못한다고 험담이나 하는 상사의 말은 가치가 없어 보였다.
나는 가스라이팅에 무너지지 않기로 했다. '그럼 내 손해다. 내가 얻어갈 것만 얻어가고 저런 말 같지도 않은 말은 세게 부는 바람만큼도 내게 영향을 주지 못하게 하겠다'라고 다짐했다.
이제껏 내가 살아온 발자취가 나를 말해 주고 있었다. 나는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가는 곳에서 늘 두각을 나타냈다. 잘 못하는 일이라면 배우려는 사람이었고 기본적으로 일에 호기심도 많았다.
그렇다면 지금의 평가는 틀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 평가가 맞다면 개선해야 할 점이 뭔지를 알려줘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없는 평가는 가스라이팅이다. 비난이다. 모욕이다. 나는 비난받기 위해 직장에 다니는 것이 아니고, 상사는 부하직원이 일을 잘해서 회사가 원하는 결과물을 낼 수 있도록 가르칠 책임이 있다. 그래서 팀장인 것이다. 그러니 그가 하는 말들은 거의 대부분이 '비난' 뿐이었다. 나는 정당한 피드백을 받은 것이 아니다.
3. 정서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면, 탈출하자.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때의 어리숙한 나도 스스로를 보호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이다. 나는 두 가지 옵션, 즉 퇴사 또는 남는 것에 대해 꽤 심각하게 고민했다. 이 옵션이 있다는 것만 알아도 힘이 된다. 이 회사가 나에게 쇠사슬을 매고 어디에도 가지 못하게 할 수 없다는 얘기다. 원한다면 회사, 그리고 상사를 벗어날 수 있다. 너무 괴롭다면 이 옵션을 절대 잊지 말아야 했다.
나는 조금 더 가 보기로, 이대로 그만두기엔 좋은 회사를 떠나 이직한 것이 너무 억울했기에, 프로젝트만 마무리해 보기로 결정했지만 그건 버틸만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떠났을 것이다. 실제로 그때 쓴 일기장엔 온통 이런 글이 가득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을 땐 언제든 떠나도 돼. 너는 이미 최선을 다 했어.
정서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면, 시도 때도 없이 눈물이 난다거나, 출근할 때면 차라리 차에 치이고 싶다고 생각한다거나, 일요일 저녁이면 심장이 뛴다거나, 공황장애와 같은 신체적인 증상까지 나타나기 시작했다면 이 옵션을 꼭 떠올려야 한다.
우리는 탈출할 수 있는 옵션이 있다.
마지막 회사, 가장 최근에 입사했던 회사의 상사는 입사한 지 일주일 된 나에게 매출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사업을 회생시킬 기획안을 내라고 했다. 이게 무슨 또 신박한 개소리일까? 하고 쳐다보는 내게 그는 "왜, 자신 없어?"라고 물었다.
(그에게는) 애석하게도 나는 더 이상 사회 초년생이 아니었으며, 약 10년 간 자타가 공인하는 똥밭에 구르며 일을 배웠기 때문에 그런 말에 주눅 들 상태도 아니었다.
나는 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네, 자신 없어요."라고 했다. 그 말에 눈이 커진 건 그였다. 그는 빠르게 나를 회유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거 별 거 아니잖아. 이렇게 이렇게 해서, 저렇게 저렇게 해서, 임원들 앞에서 근사하게 촤라락 피티 해서, 우리한테 10억만 사업비로 주게 하면 돼. 쉽잖아?"
그렇게 쉬우면 네가 하세요. 너는 왜 여태까지 못했는데요.
그러나 이미 한 번 이직에 실패했던 나는 이 회사에 가능한 1년은 다니고 싶었다. 이런 절박함은 압박이 되어 나를 짓눌렀다. 퇴사하기 직전 불면증에 시달리고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뛰었다. 자려고 누우면 심장 뛰는 소리가 내 귀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퇴사했다.
나는 더 이상 정신과 영혼과 건강을 담보로 일할 생각이 없었다.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렇게 괴롭게 살다 가진 않겠다 생각하니 내가 있어야 할 곳이 명확하게 보였다.
그렇다고 퇴사를 결정하는 게 쉬웠다는 뜻도, 퇴사 후의 내 삶이 꽃밭이었다는 뜻도 전혀 아니다. 오히려 퇴사 후에 생전 처음 소속 없는 1인이 된 것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직이 어려워 울기도 많이 울었다. 그럼에도 퇴사하길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더 이상 심장이 비정상적으로 뛰지 않기 때문이다. 잠도 잘 잔다. 그거면 됐다.
최근에 친한 동료에게 연락이 왔다. 이직한 회사에서 심한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다. 화장실에서 울고 자괴감에 빠진 그녀는, 몇 년 전의 나처럼 자책하고 있었다. 퇴사 후의 삶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공포를 나 역시 겪었기에 쉽게 뭐라 말해 주기가 어려웠다. 그녀가 극단적인 표현을 쓰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나는 부드럽게, 그러나 강하게 사실을 전해 주었다. 명심해야 할 것은 내가 먼저 있어야, 그다음에 회사도 일도 있는 거라는 점이었다.
그녀는 결국 타의로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지만 오히려 평온하다고 했다. 그다음 옵션으로 생각해 두었던 프리랜서 잡을 몇 개 구해 놓았고 구직 활동도 빠르게 시작해 볼 거라고 했다.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문을 열어 주기도 한다. 어디에도 돌파구가 없어 보이는 순간에 갑자기 문을 열어 주면 이전에 가 보지 못했던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이 글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가스라이팅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말해 주고 싶다. 우리의 삶이 회사나 일이나 직장보다 우선되어야 하고, 삶을 중심으로 회사가 돌아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가능성을 많이 모르고 있기도 하다고.
내가 그랬다.
퇴사 후에 나를 바라보니 한없이 초라하기도 했고 의외로 잘하는 부분이 있기도 했다. 관심 있는 분야는 죄다 일 밖에 있었는데, 회사에 다닐 때는 그런 것들에는 시간도 돈도 쓰지 않았다. 그러니 일에 잠식되어 무너져 버린 것이다.
마음의 방공호를 잘 지어 놓길. 누군가 말도 안 되는 말로 나를 후려치고, 조롱하고, 비난하거든 언제든 그곳으로 들어가 나를 보호하길. 그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없으며, 다른 사람의 평가 따위가 나를 규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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