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슬기로운 직장 생활
올해 초, 퇴사하고 쉬면서 다짐한 것이 있다. 앞으로 회사에 들어가면 '뇌를 빼놓고' 일하겠다는 것. 진심을 담아 내 주장을 펼쳐 봐야 '되바라지고' '말 안 듣는' 직원이 될 뿐이니, 회사에서는 생각이라는 걸 원천 차단하는 것이다. "나는 기계다, 나는 생각이 없다, 나는 자아가 없다" 해야 스트레스 안 받고 오래갈 수 있다.
며칠 전 상사에게 중간 보고할 일이 있었다. 상사의 업무 파일에 빨간색으로 용어를 정정해 둔 것이 화근이었다. 이런 건 그냥 알아서 보면 되지 굳이나 표시를 해 뒀냐며, 누가 너에게 오타 찾기 하라고 했냐며 아무리 봐도 수치심이 많아 왕왕 짖어대는 것으로 방어기제를 삼은 듯한 상사가 과하게 짜증을 냈다.
자신의 실수를 내가 잡아낸 게 짜증 난 것까지는 그렇다 쳐도, 오타 안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용어를 내 마음대로 바꿀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라면 용어를 어떻게 통일할지에 대한 기준을 주고, 그 안에서 바꿀 수 있도록 허용해 주었을 테지만 일하는 방식이야 누구나 다를 테니 기준이고 뭐고 없고 '알아서 내 마음에 들게 해 봐.'라면 그렇게 하는 수밖에.
그날 나도 상당히 불쾌했던 게 사실이다. 기준을 안 준 건 본인이고, 기준이 없는데 문서에 오타를 낸 것도 본인이다. 오타인지 아닌지 알 게 뭐야. 용어는 한 글자 차이로도 의미가 달라지기 때문에 내 마음대로 수정하는 건 위험하다. 이건 어느 회사를 가도 그렇다.
이럴 땐 주문처럼 외운다.
"나는 기계다. 나는 생각이 없다. 들었으면, 잊어버린다."
잘 안 되니까 이렇게라도 하는 것이다. 실수를 싫어하고 말도 안 되는 걸로 지적받는 건 더 싫다. 네가 뭔데 니 기준이 법이야?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회사에서 어디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적응하려면 사람들과도 잘 지내야 한다. 그게 상사라면 말할 것도 없고.
다행히 상사는 뒤끝이 없는 사람인지 짜증 낸 이후에도 바로 농담을 걸며 아무렇지 않게 굴었다. 그도 뇌를 빼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회사에서 자아가 강한 것만큼 스스로를 피곤하게 하고 나아가 직장 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게 없다. 나는 없고 회사에 출근한 A만 남기는 게 좋다. 나는 회사 밖에서 찾아야지. 지금은 충실한 회사원 A로서의 내가 된다.
네, 알겠습니다. 외에는 말도 아끼고 생각도 줄이고 하라는 것만 하면 된다. 하고 싶은 것, 말하고 싶은 것, 즐거운 일들은 회사 밖에서 찾아야지.
회사원 A, 오늘도 뇌 빼고 출근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