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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일을 잘하려고 다니는 곳이 아니야

04. 슬기로운 직장 생활

프로젝트를 마치고 발리에서 여행하며 글 쓰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두 번째 월급을 받았다. 통장에 들어온 내 몫의 월급을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불과 두 달 전에는 여행비 아끼려고 홈스테이만 골라 다니던 나 아니던가.


직장이란 이런 거구나, 싶으니 '돈' 이상의 가치를 기대하는 것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간 나는 직장을 자아실현의 장으로 착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직장은 단지 '돈'을 버는 곳인데, 거기에 약간의 보람, 약간의 동료애, 약간의 애사심 정도면 충분한 것을 이곳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고, 꿈을 찾고, 자아를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힘들었다.


새로운 회사는 편한 듯 불편한 듯 알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허물없이 나를 대하지만 10년 넘게 함께 지내온 그들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런 기대는 하지 않기로 한다. 그러고 싶지도 않고.


몇 개 마음에 걸리는 말들이 있었지만 잊어버렸다. 아니, 잊어버리려고 노력했다. 나는 잊는 게 잘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이런 사소한(?) 일들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이전의 실패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태도일 것이다.


1년 전에 있었던 두 번의 이직 실패로 인해 현재는 회사에 대한 기대가 0에 가깝다. 두 회사 모두 중견 이상의 업계 1, 2위를 다투는 회사였고, 그런 회사에 이런 사람이 존재할 줄은 상상도 못 한 질 낮은 상사와 직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경험은 '회사가 다 똑같지.'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고, 그 이후로 두 가지 원칙 1. 월급을 밀리지 않는다. 2. 나를 대놓고 괴롭히지 않는다. 만 지켜진다면 그럭저럭 다닐 만한 회사로 분류하고 있다.


기대가 없어진다는 것은 실망할 일도 없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기준에서) 헛소리를 잘도 하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놀라지 않는다. 회사에는 늘 그런 사람들이 존재하니까. 회사는 원래 그런 곳이다. 무슨 말을 하건 '응, 네가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노관심.' 해 버린다. '네 생각이 진리야? 법이야?' 이 회사에 오래 다녔으니 당연히 알 법한 일로 잘난 체하는 사람들을 보면 멍청한 건지 순진한 건지 그저 우스울 뿐이다. 그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고 싶어 하는 거니까 맞춰 주면 그만이다.


상사가 나를 불러 도무지 어떤 업무 지시를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말을 3시간씩 늘어놓아도 그러려니 한다. 상사는 원래 그런 존재이다. 10년이 넘는 직장 생활 동안 본받고 싶을 만큼 역량이 높고 인성까지 갖춘 상사는 단 한 명이었다. 내 월급에는 (아마도) 그런 상사의 말을 들어주고, 그가 원하는 것을 눈치껏 보고하는 값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3시간이 넘는 미팅 후에 '아, 오늘도 월급 값 했다.'라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이었다면 ‘의미도 없고 쓸데도 없는 일에 3시간이나 미팅하는 미친 회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뭐, 나는 가만히 앉아서 듣기만 하면 되니 나쁠 것도 없다.


입사 후 '적응 기간' 동안 여간 불편한 일이 많은 것이 아니다. 낯선 사람들과 환경 속에 9시간 가까이 앉아 있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게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원칙. 1. 월급을 밀리지 않는다. 2. 나를 대놓고 괴롭히지 않는다. 만 충족된다면 나머지는 모두 잊기로 한다.


회사란 원래 그런 곳이니까.


회사에 지나친 기대를 갖고, 실체를 알게 된 후에 실망하는 것은 내가 이런 회사의 속성을 몰랐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회사의 본질


1. 이상한 사람들이 멀쩡한 척하면서 일을 한다.

2. 일을 잘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은 의외로 몇 없다.

3. 성과를 생각하고 일하는 사람은 더더욱 적다.

4. 회사는 성향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친구 되라고 있는 곳이 아니다.

5. 상사의 대부분은 일을 못하고, 모르지만 자기 말이 맞다고 우기고, 비위 맞춰 주면 좋아하는 존재이다.

6. 회사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대하는 태도가 늘 진실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이 가식이라고 보는 편이 맞다.

7. 내 월급에는 '일의 결과물' 약간에, 결과물을 내기까지 '상사 비위 맞추기', '동료들과 잘 지내기', '점심 맛있게 먹기', '출퇴근 잘하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8. 회사가 이런 곳이라고 해서 나까지 그렇게 지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도덕적 양심에 거스르지 않는 성실함과 책임감 있는 태도는 결국 나에게 도움이 된다. 회사에서 배우는 건강한 태도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큰 지혜와 힘이 된다.


이다.


회사를 회사로 보고, 회사에서 만난 사람들을 동료 정도로만 본다면 실망하는 일이 있어도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요즘 이게 돼서 너무 신기한데, 아무튼 그렇다.


이제껏 회사가 일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게 어리석었다. 회사가 아니었다면 살면서 만날 일 없는, 성향도 살아온 궤적도 다른 이들이 모여서 동상이몽을 갖고 서로 존중하는

척 알고 보면 제멋대로 일하는 곳. 그게 회사다.


이걸 깨닫고 나니 회사가 몹시 싫지는 않은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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