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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직 이직러는 각오해야 합니다

08. 슬기로운 직장 생활

나의 이직은 실패했다.


그 어렵다는 환승 이직에 성공하고 야심 차게 문을 박차고 나왔는데, 글쎄 빌런이라고 말하기도 미안한 정신병 환자를 만난 것이다. 그것도 회사에서!


길게 말해 봐야 아마 믿어지지도 않을 스토리지만 간단하게 브리핑해 보자면 그녀는 거짓말, 험담, 텃세, 따돌림, 업무 배제, 비상식적인 업무 지시, 이간질, 모욕, 화 등을 모두 보여 주었다. 한 달 반 동안 일어난 일이다. 그녀의 타깃이 된 건 나만이 아니었다. 내 전임자까지 포함해서 모두 7명이 1년을 채우지 못하고 회사를 떠났다.


이 정도의 정신병은 티를 안 내려고 해도 안 낼 수가 없을 테니 자연히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좀 '이상한 사람'이라는 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행동이 2년 넘게 지속되는데도 개선하거나 바로잡지 못할 정도로 조직 전체가 정상적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에서 급하게 재이직에 성공했지만, 내가 급했던 만큼 회사도 급했던 게 분명하다. 결국 입사 일주일 만에 나는 '회장에게 몇 번째 팀 해체 경고를 받고 있는 우리 팀'을 기사회생시킬 기가 막힌 보고서를 제출하라는 말 같지도 않은 업무 지시를 받아야 했다.


팀장이 무능한 데다가 뻔뻔하고 인성 나쁜 자라 그런지 그가 뽑은 직원들도 그와 비슷했다. 몰려다니면서 이 얘기 저 얘기 정확하지도 않은 말을 옮기고, 부동산 자랑을 하고, 점심시간에 땀 흘리며 운동하고 돌아와 씻지도 않고 자리에 앉아 '우리는 할 일 다 하고 논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말이라고 하고 다녔다.


그 정도만 했어도 어떻게든 해 보는 척하면서 버텼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의 조급함과는 다르게 지나치게 평온한 내가 불안했는지, 팀장은 나를 불러 '준비된 보고서를 내일 팀에서 발표하세요. 발표하지 않으시면 정리해고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는 조용히 수첩을 덮고, "네, 그렇게 하시지요."라고 했다. 팀은 비상이 걸렸고, 팀장은 자리에 앉지도 서지도 못한 채로 조바심을 숨기지 못했다. 그래, 멍청하니까 위기의 상황에 '일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에게 협박이나 하고 있겠지. 어찌 보면 너의 인생이 애잔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정말 섭섭합니다."라는 말 같지 않은 말을 뒤로하고 그렇게 크리스마스이브에 나는 무직자가 되었다. (그자는 어째서 입만 열면 말 같지 않은 말만 하는 걸까)


두 번째 회사까지 퇴사하고 나니 어안이 벙벙하고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았다.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백수라니, 백수가 되었다니. 전혀 준비하지 않은 채로 이렇게 무직자가 되어 버렸다니, 이를 어쩐담. 두려움과 불안이 밀려왔다. 이 중에서 내 계획 안에 있던 건 단 하나도 없었다.




글로만 봐서는 5인 미만의 영세한 회사가 아닐까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두 회사 모두 업계에서 손꼽히는 중견기업이다. 그러니 더 충격 아니었겠는가. 이 정도 규모의 회사에도 이런 쓰레기들이 다니는데, 그보다 작은 회사라면.. 답이 없어 보였다.


이 두 번의 경험으로 깨달은 건 이직이라는 게 '합격' 통보를 받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합격만 하면 됐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 내가 너무 이직을 쉽게 생각했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이직이 어떤 건지, 새로운 회사에 들어가서 다시 0에서 시작하는 게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지 못했다.


두 번의 뼈아픈 실패로 깨달은 이직이란 사실 이런 것이다.


1. 소외감을 느끼는 상황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기존에 다니던 직원들은 적게는 1년, 많게는 3~5년 이상 함께 일하며 손발을 맞춰 온 사이다. 당연히 서로에 대한 이해도 클 것이고, 나는 모르는 얘기들이 많이 있을 수밖에 없다. 고의적인 게 아니라면, 이런 소외감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에게 쌓인 시간만큼 내게도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나 역시도 이런 시간들이 있다. 프로젝트 진행 중에 입사했기 때문에 더더욱 모르는 이야기들이 많았다. 임박한 마감일만큼이나 긴박한 이야기들이 오고 갔다. 당연히 맥락을 모르는 나는 하나도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이었다. 나라고 왜 소외감을 느끼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그런 복잡한 얘기를 모르는 지금이 천국이다,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었다.


다행히도 나를 고의적으로 소외시키려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거면 됐다. 신규 입사자이기 때문에 겪는 소외감은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2. 이제까지 받아 온 평판, 인프라, 업무 프로세스가 모두 0으로 돌아간다.


내가 회사와 동료들이 낯선 만큼 그들도 내가 낯설 것이다. 이력서에 적힌 몇 개의 히스토리로만 알고 있을 테니(그것도 면접을 본 사람이 아니면 알 수 없는 일) 그다음부터는 모든 걸 스스로 증명해 내야 한다. 솔직히 나나 쟤나 별다를 게 없을 게 뻔한데, 아니 어떤 면에서는 내가 더 경험도 많고 잘하는 일임에도 더 냉정한 잣대를 들이밀기도 한다. 단지 다니고 있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쟤는 나를 평가하고 나는 평가를 받아야만 하는 거지 같은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억울하다고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신규 입사자는 적응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기존 직원들이 받아줘야,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 그뿐만 아니다. 새로운 회사에 들어왔으니 조직 문화와 시스템, 업무 프로세스를 익히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이 시간 동안 어떤 조직은 적응 기간이니 그럴 수 있다며 너그럽게 지켜봐 줄 것이고, 어떤 조직은 경력직이 이것도 제대로 못하냐며 날카롭게 평가할 것이다. 애석하게도 내가 어떤 조직에 들어가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이 때문에 나도 두 번이나 이직에 실패한 것이다.


자꾸만 실패라고 하니 그렇다면 성공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별다른 게 없다. 원래 다니던 사람처럼 다니면, 그게 성공이다.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조직에 스며들었다면 그 이직은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시간이 걸릴 것이다.


3. 빌런을 만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빌런은 예상보다 강력할 수 있다. 뭔가 '가능성'을 열어놓는 듯한 문장인 것은, 만날 수도 있지만 만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나를 매우 허탈하게 만들었는데, 이직한 회사에 빌런이 있을지 없을지 미리 아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나 역시도 업계에서 경력이 적지 않으니 물어물어 확인을 했지만, 정확하게 내가 입사할 팀과 동료, 팀장의 상황까지 세세하게 아는 건 불가능했다. 그럼 모든 것을 운에 맡겨야 한단 말인가!


나의 경우엔 감당이 안 되는 빌런을 만났기 때문에 퇴사라는 초강수를 둔 것이고, 모든 회사에 있을 법한 빌런이라면 바로 퇴사하는 건 보류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어느 회사건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고,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퇴사한다면 아마도 다닐 수 있는 회사는 점점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의 경우에서처럼 '직장 내 괴롭힘' 수준으로 정신 나간 빌런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정말 운이 나빴으니 최대한 빨리 벗어나라는 말 밖에는.



4. 과거는 미화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이직에 실패하고 나니 불안감이 나를 압도하는 것 같았다. 다시는 회사에 들어가지 못할 것 같았다. 한동안 사람들도 만나지 않았다. 부정적인 얘기만 하게 될 게 뻔하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괜한 심술이 났기 때문이다.


불안이 고조되자 이전 회사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때마침 회사에서도 나를 필요로 한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전부터 나를 눈여겨봤던 팀장님 중에 한 분이 내가 돌아올 의사가 있다면 힘을 써(?) 보겠다는 의사를 전해 오기도 했다.


정말 너무 솔깃해서 하마터면 "갈게요!"라고 외칠 뻔했다. 지긋지긋했던 이전 팀도 아니고 새로운 팀에서 나를 받아만 준다면 사람들도 친하고 모든 것이 익숙한 전회사가 백번 낫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불안이 잠잠해지길 기다려 다시 생각해 보니 오래 다닌 회사를 퇴사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사람을 도구로 생각하고, 불공평하게 평가하고, 일하는 사람만 죽어라 일하는 조직에 질려버렸었다. 착하고 성실한 직원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 봐야 승진자 명단에는 소위 '줄을 잘 타는' 아첨꾼들만 있었다.


조직에 희망이 없다고 생각해서 박차고 나왔는데 다시 그 조직으로 돌아가는 게 맞는 걸까? 겨우 용기를 내서 한걸음을 디뎠다면 그게 어디가 됐든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제 와서 다시 후퇴하는 건 영 내키지가 않았다. 무엇보다 '최선을 다했다'라고 하기엔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않았다.


달콤한 제안을 뒤로하고 정말 해 보고 싶었던 프로젝트에 프리랜서로 합류하기로 했다. 4개월짜리 단발성 프로젝트였지만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프로젝트를 무사히 마치고, 프로젝트를 마칠 때즈음 헤드헌터가 연결해 준 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다. 지금 회사 역시 내가 해 보고 싶었던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입사를 결정했다. 늘 좀 더 잘하고 싶고, 아쉬움이 많이 남았던 직무라 이전 회사에 비해 좀 더 깊이 있게 경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매력적이었다.


입사하고 얼마 뒤에 나에게 입사를 제안했던 팀이 해체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해당 사업을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팀원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 모두 권고사직 되었다고 했다. 아찔했다. 그때 회사로 돌아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물론 인생은 정말 알 수 없는 일이라 다른 길이 열렸을지, 그건 모르겠다. 위로금도 두둑이 받았다고 하니 그 돈으로 푹 쉬었을지도 모르지. 지금 회사가 정답이라거나 더 나은 선택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난 아직 1년도 다니지 않은 신규 입사자일 뿐이니까.


그러나 내가 앞으로 나아가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선택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 있는 일이었다. 선택이 어려울 땐 '인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면 이 선택을 후회할 것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회사로 돌아가지 않은 게 후회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해 보고 싶었던 일에 끝까지 도전해 보지 않은 건 후회로 남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 선택은 잘한 선택이다. 설령 이 선택으로 인해 다시 어려운 고비와 풀어야 할 문제를 만난다 해도, 끝까지 해 보고 나면 미련은 남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이직만 하면 꽃길을 걷게 되리란 환상 같은 건 깨진 지 오래고, 또다시 적응하느라 퇴근하자마자 침대에 눕기 바쁜 하루하루지만 이 시간은 또 어떤 경험이 될지 궁금하다. 이제까지 살아오며 느낀 건, 무엇을 겪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경험으로 내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결국 나를 성장시키고 더 나은 삶을 살게 해 준다는 사실이다. 얼마간은 이방인으로 살아야겠지만 물처럼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서 일상과 일이 만나는 지점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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