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당신은 더 이상 그때의 안 과장이 아니다.

09. 슬기로운 직장 생활

퇴사를 지를 때만 해도 내가 위너인 줄 알았다.


'이 멍청이들아, 나는 간다. 너네는 여기서 천년만년 그저 그렇게 살아라!'


요즘 같은 불경기에 천년만년 다닐 수만 있다면 그 회사야 말로 기꺼이 충성해야 할 회사가 아닌가 싶지만 그땐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속에서 천불이 날 것만 같았다.


업무가 상당히 짜치긴 해도 배울 점이 꽤 있었다. 프로젝트 하나를 통째로 맡아서 관리-운영할 정도면 나름의 인맥과 경험도 필요했기 때문에 나는 매번 구조조정 대상자에서 제외되는 필수 인력이었다.


그러나 이직은 그동안의 평판과 커리어를 0, 아니 0에 가깝게 만드는 결정이기도 하다. 물론 이전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직도 못했을 테니 영 쓸모없는 경험은 아니지만 새로운 회사는 나를 잘 모른다. 다시 나를 증명해야만 하는 것이다. 억울하게도 경력직 이직자를 향한 평가의 잣대는 더욱 냉혹한 편이다. 누가 봐도 쟤네보다는 잘하는 일임에도 나는 그렇다는 걸 증명해야 하고, 그들은 제법 큰 실수도 그러려니 하게 되니까 말이다.


억울하다고 해 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이 선택 또한 내가 했으니.


얼마 전 후배 하나가 연락을 해 왔다. 그녀 또한 오래 다닌 직장을 그만두고 소위 '환승 이직'에 성공했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직장 내 괴롭힘에 가까운 상사의 텃세를 견디다 못해 3개월 만에 다시 퇴사하고 현재 구직 중에 있다. 구직 생활이 얼마나 지옥 같은지는 나도 잘 안다. 해 봤으니까. 이력서를 하도 많이 내서 더 이상 낼 곳도 없어져 버린 어느 날엔 두려움으로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그녀는 갑자기 그때의 내가 너무 대단하다며 말끝을 흐렸다. 자신이었다면 이직에 성공한 사람과 만나지 못했을 거라며 비슷한 상황이 되어 보니 여간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했다. 영영 취업을 못하게 되는 건 아닐까 두렵다며 눈물을 삼켰다.


왜 아니겠는가. 호기로웠던 퇴사는 혹독한 현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내가 어떤 사람인데 나에게 이런 대접이야?'라고 해 봐야, 회사는 '꼬우면 관둬'라고 한다. 회사를 나온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장 오래 근무했던 전 직장(정확히는 전전 전 직장)은 업계에서도 중견으로 손꼽히는 회사였다. 대기업 계열사였기 때문에 그 혜택도 많이 받고 있었고 무엇보다 누구에게 말해도 모두 아는 회사였다. 그건 곧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나는 삼성맨들이 입사하고 얼마간 파란 뽕에 취하는 것을 이해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간 거래처 직원들이나 타 팀 동료들이 보였던 호의적이고 친절한 태도는 내가 그 회사 소속이기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자,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았다. 물론 환승 이직을 했던 회사는 그보다 더 규모가 큰 회사였기 때문에 나는 내가 '무소속'의 삶을 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이은 이직 실패로 불과 5개월 만에 두 개의 회사를 거쳐 나의 소속은 '무'가 되었다. 비참한 일이었다.


후배의 얘기를 들으며 1년 전의 나를 돌아보았다. 두 번 다시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회사가 아무리 지겹고 혹독하다 해도 회사 안에서 겪는 고통이 나았다. 수입도, 소속도 없이 보내는 하루하루는 무얼 해도 즐겁지 않았다.


조금씩 회사에 소속되지 않은 나의 삶을 그려 보게 된다. 지금은 운 좋게(!) 회사에 소속되어 있지만 내가 퇴사한 후에 전전전직장은 대대적으로 구조조정을 감행하여 내가 속했던 팀이 해체되는 불운을 맞았다. 당연히 전원 권고사직이었다. 프리랜서로 일하다 입사 제안을 받기 직전에 있었던 모 대기업 역시 구조조정으로 계약직 직원을 전원 해고했다. 최근에 들은 얘기로는 다음 대상은 연차 높은 정직원이었다.


어떻게든 회사에 속해야 한다고 아등바등 대며 회사에 들어왔지만 다시 회사 밖에 홀로 서게 되는 일이 생기지 말라는 법이 없다. 후배는 간절히 회사 안으로 들어오고 싶어 했지만 나는 속으로 '막상 회사에 들어와도 또다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사기업 직원의 삶으로의 귀환이야. 좀 더 크게 보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물론 현재 무소속인 그녀에겐 들리지 않을 조언이니 말을 삼켰지만 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경력직 이직러는 각오해야 합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