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트, 연필부터 어플까지.
나는 툴에 엄청나게 집착하고, 까다로우며, 약간의 강박증까지 갖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한다. 이 집착은 내가 글을 얼마나 많이 쓰는가 와는 상관없다. 조금이라도 쓰면 어쨌든 신경이 쓰이고 > 신경 쓰는 과정에서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며 > 더 좋은 툴을 찾는 탐색의 과정을 괴롭지만 한편으로 즐기기 때문에 고민이 끝나지 않는 악순환을 가져온다. 어느 순간부터 이 모든 게 너무 힘들어 ‘거슬리지 않는’, ‘나한테 딱 맞는’ 하나를 정해놓고 생각 없이 쓰고 싶었다.
⊹ 노트
노트는 너무나 당연하고 뻔하게 몰스킨이다. 종이의 질이 객관적으로 좋다고는 말하기 힘들지만 부드럽게 잘 써진다. 대학 때부터 쓴 총 11권의 노트 중 4권이 몰스킨이었고, 그전까지는 포켓 사이즈를 주로 썼는데 일을 하면서 한꺼번에 빨리 적어야 하는 일이 많아 라지 사이즈를 선호하게 됐다. 하드커버-포켓 사이즈는 정말 쓰기가 힘들고(작은 데다가 딱딱하기까지 하니 손이 아프다) 소프트 커버가 쓰기 좋았다. 현재는 하드커버-라지-블랙을 쓰고 있으며, 다 쓰고 나면 유럽에서 조금 싼 가격에 사 온 소프트커버-라지-블랙을 쓰려고 한다. 정착하기 전까지—툴 고민의 90%는 더 싸지만 괜찮은 제품이 있지 않을까 하는 헛된 망상에서 비롯되므로—가격대가 낮은 대체품을 구하기 위해 11권 중 7권뿐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노트들을 사보고 써봤으나, 역시 사람들이 많이 쓰는 것엔 그 이유가 있다. 이제 아무 생각 없이 이것만 계속 쓰고 싶다.
⊹ 연필
연필은 2년 전 엄청나게 넓은 알파 문방구를 한시간 넘게 구경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Faber-castell의 TK 9400 홀더심 샤프를 구매해서 지금까지 만족스럽게 쓰고 있다. 두꺼운 연필은 많이 도전해봤던 반면 홀더심 샤프는 처음이었는데 단번에 성공해서 매우 기뻤다. 일단 아름답다! 2mm 심이 들어가는 만큼 날카롭게 깎으면 얇은 선을, 눕혀서 그리면 두꺼운 선을 그릴 수 있고, 일반 샤프와 달리 샤프 끝에 클립이 없다. 이 부분이 이 샤프에서 굉장히 중요한데, 이로 인해 손에 거슬리지 않고 책상 위에 고민 없이 놔둘 수 있다. (글 쓸 때 샤프 클립의 위치나, 책상 위에 놨을 때 클립 때문에 위태롭지 않게 잘 놓을 수 있는지까지 고민하다니 이 부분은 나도 지금 쓰면서 처음 깨달았는데 정말… 스스로가 싫어진다…) 보통 그림을 그릴 땐 연필을 돌려가며 쓰니까 그림 그리는 사람들에게도 좋다고 해서 엄마(그림책 작가)에게 선물했는데 엄마 역시 매우 만족해했다. 가격은 8000원이라 저렴한 편. 샤프 모양에 비해 심의 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아 같은 브랜드에서 3B 심을 구매해 사용 중이다.
⊹ 볼펜
볼펜의 경우 별 고민 없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제트 스트림 0.7을 사용한다. 예전에는 얇은 펜촉을 선호했으나(0.25~3mm 얇기가 좋았다) 신경 쓴 노트 필기가 아니라 힘 안 들이고 빨리 쓱쓱 써야 하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부드러운 굵은 심을 선호하게 됐다.
⊹ 만년필
가끔 쓰는 만년필도 펜과 마찬가지로 얇은 펜촉인 Preppy 0.3을 많이 쓰다가(3000원으로 가격이 아주 싼 대신 촉의 복불복이 좀 있다) 요즘은 선물로 받은 Kakuno를 주로 쓴다. 카쿠노는 가격이 싼 데 비해 펜촉의 질이 아주 좋은 편이다. 파이롯트에서 만드는 게 한몫하는 듯하다. 라미 사파리도 써봤는데 펜 끝 마름이 너무 심해 쓰기가 힘들었다.
⊹ 형광펜
형광펜은 자주 안 쓰기 때문에 학생 때 사놨던 마일드 라이너를 계속 쓰다가 최근에 뚱뚱한 Stabilo boss를 구매해봤다. 살구색이 매우 아름답다✨
길고 긴 필기구 설명을 뒤로하고 내가 최근에 고민한 글쓰기 어플에 대해 써보겠다. 나는 맥과 아이폰을 연동해 쓰고 있다. 오래 고민한 만큼 여러 프로그램을 사용해보고 세세하게 분석해서 글이 매우 길다. 끝부분에 요약이 있으니 너무 길다면 요약만 봐도 좋다.
들어가기에 앞서 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요소는 아래와 같다.
1. 디자인
2. 편집과 스타일의 자유도
3. 기기간 연동
4. 지속성(해당 어플 구독을 멈춰도 글을 계속 보관할 수 있는지)
5. 핸드폰 뷰 지원
내가 글을 쓰고 보관하는 목적은,
1. 책 읽고 좋은 부분들을 발췌해 기록하고 다시 들춰보기 (대부분이 이 경우이다)
2. 블로그 글 쓰고 한 곳에 모아놓기
3. 인터넷에 올라온 (학술적) 글을 밑줄 치거나 생각(댓글) 덧붙이면서 읽기
정도이다. 여기서 말하는 글은 메모가 아닌 페이지가 2장 이상에 스타일이 덧붙여져야 하는 글을 이야기한다. (메모는 애플 기본 어플을 쓰고 있다.)
얼마 전까지 계속 애플 기본 앱인 페이지를 썼는데 페이지는 내가 원하는 대부분의 항목을 매우 훌륭히 충족한다. 애플의 메모나 캘린더보다 상대적으로 사용 빈도가 낮은 페이지의 좋은 점이라면 글자 스타일을 마음대로 지정 / 생성할 수 있고, 스타일 변환을 키보드 단축키로 저장해놓을 수 있어서 손쉽게 편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는데, 바로 핸드폰 뷰를 지원하지 않는다는 것. (프레젠테이션 모드라는 게 있긴 한데 정말… 쓸 수가 없는 기능이다. 일단 모든 스타일이 없어지고 글자가 30pt 정도로 커지며 글이 길 경우—페이지에 쓰는 대부분의 글이 길다—특정 부분을 찾기도 힘들다) 핸드폰에서 글을 보고 싶을 때 파일을 열면 폰트가 A4용지 기준 글자 크기 12pt 비율로 엄청나게 작게 보인다. 픽스된 페이지 디자인이 핸드폰에서 본다고 바뀌면 안 되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지만, 치명적인 단점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핸드폰 상에서 편집이야 당연히 (할 수 있어도) 안 하고, 사람들과 말하면서 혹은 전시를 보면서 내가 읽었던 텍스트를 참고해서 생각하거나 말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나 혼자 보는 거면 어찌 참아보겠으나 내가 쓴 부분을 상대방한테 보여주기는 상대방한테도 미안했다. 페이지를 벗어나 볼까 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며 여러 프로그램들을 다운로드하여봤다. (익숙한 굴레의 시작…)
에버노트는 유저가 많은 만큼 가장 먼저 도전한 앱이었는데, 1번 디자인에서부터 탈락이다. 일단 글자 스타일 지정이 너무 힘들고 안 예뻐서 어플에 자연스럽게 들어가지 않게 됐다. (아마 가장 많이 쓰는 툴일 텐데 안 예쁘단 이유만으로 단번에 탈락...)
MS 기반 노트 앱. 글, 그림, 사진을 자유롭게 편집할 수 있는 포맷이다. 아마 아이패드용으로 많이 사용할 듯. 나 역시 아이패드 용으로 다운받았었다. 그러나 못생겼다! 그리고 텍스트 박스가 아무 데나 생겨서 줄이 딱딱 맞지 않아 산만하고 굉장히 눈에 거슬린다. 최대 단점은 동기화가 매우 느리다는 것.
하이랜드는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지 않는 것 같은데, 꽤 좋은 툴이다. (이제 와 보니) 율리시스와 상당 부분 유사하다. 마크다운 기반에 하이랜드만의 마크다운 규칙이 있다. 베어와 율리시스가 애플 메모처럼 여러 가지 글들이 쭉 나오고 하나씩 클릭해가며 바로 볼 수 있다면 하이랜드는 워드처럼 글을 보려면 파일을 열어야 한다. 하이랜드의 가장 좋은 점은 # 태그를 이용해 쓴 제목들(h1~h2)과 내가 덧붙인 코멘트 등이 옆에 바로 보인다는 것. 누르면 그 문장의 위치로 이동한다. 이 기능을 숨겨놓지 않고 계속 보여주는 툴은 내가 알기로 하이랜드뿐이다.
특히나 하이랜드는 대본 쓰는 데 특화되어있다. 가장 감명 깊었던 기능은 Gender Analysis! 이름(영문)에 따라 성별을 정하고 성별의 비율과 그 성별이 말하는 비중을 보여준다(감동적…).
대본에 특화된 만큼, 캐릭터 별로 하이라이팅이 가능하다. 메모, 글쓰기 목표 설정 등의 기능도 포함되어있다. (PDF 전환, 스타일 등의 제약이 있는) 무료로 계속 쓸 수 있으며 유료 전환은 금액을 한 번만 내면 된다. 단점은 핸드폰 앱이 없다는 것. 마크다운 형식으로 저장할 수 있지만 문법이 일반적이지 않아 다른 앱과 호환이 힘들다.
율리시스를 다운 받기 전에 스크리브너를 시험 삼아 다운받아봤다. 엄청나게 긴 한글 설명서를 읽어본 결과, ‘난 이렇게까지는 필요 없겠다’가 결론이었다. 내 목적은 블로그 글이나 책 발췌 이므로 그렇게까지 긴 글을 요구하지 않아서이다.
기본적으로는 여러 개의 조각 글을 이어 붙여 하나의 긴 글을 완성하는 형태고, 아이디어 내는 과정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글을 빌드해나갈 수 있겠다는 인상을 받았다. 디자인은 애플의 페이지와 꽤나 유사하지만 기능이 많은 만큼 아무래도 툴바가 번잡하다. 논문을 쓰거나 글을 전문적으로 방대하게 쓰는 사람에게는 잘 맞을 듯하다. (다른 어플에서 종종 발생하는 글이 길면 느려지는 오류가 없다고 한다). ios 앱이 있으므로 핸드폰에서도 보는 게 가능하고, 무료로 한 달간 사용해볼 수 있다.
마크다운 기반 글쓰기 툴. 베어만의 자체 마크다운 문법을 갖고 있다. 디자인은 정말 만족스럽다. 베어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다른 어플에는 없는 노트 간 링크라고 생각한다. TOOL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다른 글에서 베어 마크다운을 이용해 [[TOOL]]이라고 쓰면 그 글이 연동된다. 최근 헤더(header) 문단 링크 생성 기능도 생겨서 글에서 글로 다양하게 연결접속이 가능해졌다.
보통 여러 개의 글을 정리할 때 폴더를 이용하는데, 베어는 폴더가 아닌 태그를 이용해 글을 나눈다. 아까 예시로 든 <TOOL> 글의 태그가 #blog #write 두 가지 태그를 갖고 있다면 두 태그 그룹에서 보이게 된다. 태그를 적극 이용하는 만큼 복수 단어 이용 등 여러 방식으로 활용 가능하다. 여타 앱과 다른 점은 이 태그가 본문 안쪽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개인적으로 본문에는 본문만 들어있는 걸 선호한다).
또한 웹 클리핑 기능이 꽤나 강력하고, 유료로 전환하면 여러 가지 형식(텍스트, PDF, HTML, DOCS, ePUB 등)으로 내보내기가 가능하다. pdf 내보내기 기능이 궁금해서 한 달 시험 사용을 해봤는데, 베어 편집 화면과 거의 흡사한 스타일로 만들어진다. 수정은 안돼도 건드릴 필요 없이 디자인이 괜찮다. 베어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기 때문에 오류 피드백이 지속적으로 이뤄진다(최근에 한글 태그 자모 분리 오류를 해결했다). 그리고 당연하지만 핸드폰에서 보기 편하다.
단점은 위의 장점들이 상당히 가변적이고 유연한 만큼 고정적이지 않다는 것. 그리고 한글과 이미지를 섞어 쓰면 눈에 띌 정도로 느려진다는 것. 자유도가 떨어지고, 내가 스타일을 상세하게 변환하기가 힘들다는 점도 있다. 베어에 정착하자고 마음먹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베어의 속성이 ‘메모’ 어플이라, 기존 pages에 있던 글을 옮기기엔 상대적으로 가볍고 단순하게—비유하자면 해상도가 낮게—느껴졌다.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메모나 코멘트, 책갈피 기능이 없다)
메모 앱 베어(bear)의 상위 버전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다운받기 전에 가격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는데, 베어와 마찬가지로 구독 방식이면서 가격이 보통 어플을 하나 사는 가격이기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기 때문이다. 스크리브너를 한번 써보고, 페이지를 다시 핸드폰에서 켜 보고, 이걸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다운받아봤다. 일단 14일 동안 평가판을 쓸 수 있다. 사용법은 스크리브너보다는 간단하면서 베어보다 복잡해서 자유도가 조금 높았다.
텍스트 파일은 베어처럼 한 곳에 모아져 있어 (사진에 보이듯 왼쪽 패널에서)새 파일을 열지 않고 클릭으로 글을 바꿔가며 볼 수 있다. 그러면서도 스크리브너처럼 여러 글을 모아서 하나의 글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조각 글을 모을 수도 있다. 글이 길어지면 느려진다는 후기를 본 적 있는데, 지금 쓰고 있는 페이지가 만 자가 조금 넘는데도 느려지는 건 못 느끼겠다. 글이 많이 길다면 위의 설명대로 조각 글로 쪼개서 접합 가능하다. 베어에서 이미지를 넣었을 때 급격하게 느려지는 걸 생각해보면 이미지를 작게 보여주거나 아예 안 보여준다는 점이 큰 이유인 듯하다.
율리시스는 하이랜드를 설명하면서 장점이라고 설명했던 헤더 미리보기가 가능한데, 차이점이라면 계속 보이는 게 아니라 단축키나 클릭을 이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문단 번호를 더블 클릭하면 책갈피를 생성할 수 있고, 헤더와 책갈피 모두 클릭하면 해당 문단으로 이동 가능하다. 메모, 태그, 글쓰기 목표 설정 등의 기능이 들어있다.
지속성을 살펴보자면 파일 저장은 아이클라우드를 이용해 앱 안에 저장되고, 구독을 해지해도 앱을 이용해 계속 읽거나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내보내기가 가능하다. 핸드폰 버전도 잘 지원된다. 많은 사람들이 장점으로 ‘집중 모드’(쓰고 있는 문장에 집중하도록 깔끔하게 보이는 뷰)를 꼽는데, 나한테 중요한 기능은 아니었다. (앱 디자인만 괜찮으면 집중되는 사람... 디자인이 별로면 아무것도 못하는 사람...) 며칠 써 본 결과, 무엇보다도 책 내용을 정리할 때 제격이다. 중요 문장을 표시하고 주석과 메모, 코멘트로 자유롭게 본문에 의견을 쓸 수 있었다. 다양한 종류의 위계가 있는 만큼 다양하게 의견을 표시 가능하다. 불편했던 건 대괄호[]가 (앞에 \기호를 쓰지 않으면) 무조건 링크로 변환된다는 점이다. 책에는 대괄호가 꽤 자주 쓰이기 때문에, 링크화되지 않게 처리해주어야 했다.
evernote와 one note를 제외하고 기능을 위주로 표를 만들었다
다 적어놓고 보니 조금 미친 사람 같다. 사실 이 글을 이렇게까지 길게 쓸 생각은 아니었는데(…) 툴을 고르면서 했던 —너무나 사소하지만 그만큼 중요한—고민들을 모두 쓰다 보니 길어졌다. 나의 집착과 강박을 모두 드러내 보이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그래도 쓰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뿐해졌다. 율리시스를 구독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아직 베어와 율리시스 중 뭘 사용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둘 모두 시험 사용 중이다. 기간이 끝날 때 즘 하나에 정착할 것이다(반드시!). 기간이 끝나더라도 베어는 웹 클리핑용으로 종종 쓸 것 같다. 어딘가 나만큼 이상한 사람이 있어서 이 정보들이 유용하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이 글은 [내가 일할 때 쓰는 모든 툴]로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