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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monnamegirl Dec 09. 2020

사라진 봉선화 물 같은 유년의 기억

영화 <우리들> 리뷰




지난여름, 내가 외국 여행을 떠나 있었을 때 부모님의 가게에 내 손님이 방문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만나 내 저학년 시절을 늘 함께 했던 친구였다. 그 아이는 3학년 여름방학 때 캐나다로 유학을 떠났고 그 후로 연락이 끊겨 내게는 이제 기억 속에만 남은 옛 친구였다. 부모님은 13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그 애에게 정지된 내 휴대전화 번호를 알려주었고, 연락을 받을 수 없었던 나는 인터넷으로 수소문했지만 그녀를 찾는 데 실패했다. 결국 우리는 안부 한번 묻지 못하고 서로를 다시 추억에 묻어야 했다.


한국에 돌아와 나는 엄마에게 이러한 아련한 후일담을 말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걔가 캐나다에 간 뒤에 애들 편지 다 무시하고 연락 딱 끊었잖아. 걔네 엄마가 너도 못 만나게 했고." 나는 엄마의 말에 이제껏 미화되어 있던 그 친구와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그날 내 경험처럼 영화 <우리들>은 관객들로 하여금 시간에 의해 미화되었던 날 것의 유년 시절을 꺼내 들게 한다. 성인이 연출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방식으로 우리를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끌어당긴다. 선이는 한 때 친했던 보라의 주도로 반에서 왕따를 당한다. 초등학교 4학년 여름 방학식날, 선이는 전학생 지아와 우연히 마주친다. 우연에 친구를 만들고 싶다는 서로의 의지가 더해져 둘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이가 지아를 일주일 간 집에서 재워줄 정도로 각별한 사이가 된다. 지아는 선이에게 함부로 말하는 문방구 아저씨로부터 색연필을 훔쳐주고, 기분이 안 좋은 지아에게 선이는 손톱에 봉선화 물을 들여준다. 가끔 서로에게 토라지기도 하지만 얼굴을 마주하면 순식간에 앙금이 풀린다. 그랬던 그들의 관계는 개학과 동시에 무너진다. 지아가 더 이상 선이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는다. 지아가 그런 태도를 취하기까지 둘 사이에는 선이가 모르는 몇몇 암묵적인 균열이 있었다. 엄마와 만나지 못하는 지아가 선이가 엄마와 화목한 모습을 목격했다던가, 지아와 친해진 보라가 이간질을 했다던가 하는 일들이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지아가 전학 오기 전 학교에서 왕따를 당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새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는 선이와 어울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따돌림에도 무디게 반응하는 선이와 달리 감정적인 성격에 이미 같은 상황을 경험한 지아는 어떻게 행동해야 왕따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를 학습했다. 지아는 선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들을 하며 온몸으로 선이에게 상처를 주고 떼어낸다. 이야기는 상처를 받은 선이가 지아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보라에게 지아에 관한 이야기를 흘리면서 고조된다.


보라에게 지아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비밀스럽게 털어놓았을 선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자신에 대한 모함을 하고 친해졌던 지아와 보라처럼 지아에 대한 험담을 통해 자신도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에 대한 순수한 관심과 호의로 스며들었던 봉선화 물 같은 관계와 달리 이간질로 입혀졌던 매니큐어 같은 관계는 일그러진 형체를 만들며 떨어지기 마련이다. 지아의 소문을 수습하려는 선에게 보라는 "너 왜 혼자 착한 척이야? 네가 먼저 말해놓고 왜 나한테 뭐라고 해."라고 말한다.


선은 멀어지는 지아를 보며 엄마에게 휴대전화를 사달라고 조른다. 하지만 선이 다른 아이들에게 따돌림당한 이유는 휴대전화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지아가 따돌림을 당하기 시작할 때부터 나던 '냄새'와 비슷한 핑계였을 것이다. 그 누구도 휴대전화를 지니지 않았던 나의 유년시절 때도 관계의 알력은 언제나 존재했다. 이유는 다양했다. 뚱뚱해서, 말라서, 못생겨서, 말을 이상하게 해서, 남을 따라 하기만 해서. 그전에 왕따였기 때문에 왕따인 경우도 있었다.

왕따의 역사는 어린아이들의 생태계에서 생각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다. 지아가 과거 왕따 경험을 숨기려 했고, 선이가 최후의 순간까지 이것만큼은 숨겼던 이유는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왕따의 역사가 새롭게 시작하는 아이 조차 왕따로 만들 수 있는 시기가 <우리들> 속의 시기다. 많은 이들이 이유 같지 않은 이유를 통해 학급의 서열관계에서 뒤처지지 않으려 했던 시기이다.


한편 이러한 정서는 시대는 물론이고 문화의 차원도 초월하는 듯하다. 리얼리즘의 거장 닐스 맬로스가 연출한 <지혜의 나무>(1981)에는 덴마크 아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질투와 따돌림, 가정이 아이의 교우관계에 미치는 영향이 섬세하게 묘사되었다.


"내가 뭘 어쨌는데."

"그럼 나는 뭘 어쨌는데?"

절정에서 이루어지는 두 아이의 대사다. 23년 간 수많은 갈등을 겪었던 나의 시각에서는 잘잘못이 명확히 보이지만 저 아이들의 시각에서는 다르다. 말로는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상처와 응어리를 가슴에 품고 관계를 해결해야 한다. "요즘 애들 다 그래요."라는 선 엄마의 대사가 귀에 익숙한 이유는 어른들이 모르는 아이들의 세계가 늘 주변에 만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저마다 숨겨진 상처와 고민이 있다.


"계속 때리면 언제 놀아?" 하는 동생 윤이의 말에 선은 무언가를 깨닫지만 정작 관객인 나는 '왜 너희는 맞기만 해야 하니?'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감독의 의도는 이해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두 아이의 투샷을 보이며 끝날 수 있는 이유는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때문이다. 아픈 아버지 주위를 맴돌면서 얼굴 한번 비추지 않는 선의 아빠처럼 여전히 우리는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 관계 속에 살고 있다. 그 관계는 친구일 수도 있고, 가족일 수도 있고, 연인일 수도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우리는 상처를 주고받는 일로 인해 고통스러워했고, 이제는 다 깨우친 척 하지만 실은 여전히 관계 속에서 고통을 받는다. 그런 우리에게 감독은 맞고 때렸으면, 다시 때리지 말고 손을 내밀어 함께 놀아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이 메시지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관객의 몫에 달려있다.



*개봉 당시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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