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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mmonnamegirl Oct 11. 2019

<조커>, 잘 만들었지만 무책임하다

토드 필립스가 미국 코미디에 날린 조소







<조커>를 보았다. 누구는 범죄자 미화 영화라고 하고, 누구는 계급 사회의 부조리를 담아낸 명작이라고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는 상영을 금지한 일부 미국 영화관까지 포함해 그 모든 평가를 존중한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나쁜 수작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영화는 미국 코믹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인 빌런, ‘조커’를 다룬 안티 히어로 드라마다. ‘조커’는 앤소니 홉킨스, 히스 레저, 자레드 레토에 의해 이미 각기 다른 모습이 구현된 바 있다. 이들은 모두 매력적이었고, 캐릭터 속 악의 기원에 대해서 전혀 설명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다크 나이트>에서 조커가 자신의 입이 찢어진 이유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여놓긴 했지만 ‘혼란’ 그 자체인 캐릭터 언행을 보면 아마 그중 사실이 있을 확률은 희박하다. 세 작품이나 캐릭터를 그렇게 설정한 이유는 원작 코믹스에서 조커의 탄생에 대한 서사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설정은 조커를 순수 악 그 자체로 나타내 이 매력적인 캐릭터의 확장성을 보장하고 그의 악행에 대한 해명 거리를 봉쇄했다. 하지만 <조커>는 이런 조커에 대한 관습을 부수고 조커 이전 인물에 대한 드라마를 만들었다. 조커의 설정 중 ‘정신 병원’에서 단서를 잡아 제도의 보호에서 낙오되고 사회에 의해 인격이 유린당한 피해자, 인간 아서 플렉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아서 플렉(와킨 피닉스 역)은 낙후된 고담시에서도 빈민들이 모여사는 끔찍한 아파트에서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시며 살아간다. 당황하거나 감정이 격화되었을 때 웃음이 터져 나오는 틱 증상이 있으며, 마른 체구로 보았을 때 섭식장애도 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무로 지원되는 심리 상담을 받지만 상담사 조차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어린 깡패들에게 폭행  다음 날에 광고판을 망가뜨렸단 이유로 임금 삭감 경고를 받을 정도로 부조리한 환경에 처해있다. 비참한 현실이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서 플렉에게는 코미디언이라는 꿈이 있다. 7개가 넘는 약을 복용하지만 그는 우울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꿈과 어머니 그가 살아가는 이유이자 원동력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서에게 잔인했다. 아서는 전화 한 통으로 해고되고, 어머니가 애타게 답장을 기다리던 고담 시의 거물은 자신을 버린 아버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이것은 후에 어머니의 망상이었던 것으로 밝혀지지만 적어도 이때까지 아서는 그렇게 알았다.) 그리고 또다시 장애를 이유로 범죄의 대상이 된다. 그의 우발적 범죄는 이때 발생하고, 억압된 자아가 방출되자 그는 춤을 추기 시작한다.

첫 번째 범죄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때 잡혔다면 아마 무법 도시의 상징 '조커'가 탄생하는 참사는 막았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살면서 한 번도 관심을 받은 적이 없었다”는 아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듣는 척이라도 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늘여놓는 사람이었다. 아마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고자 하는 것 또한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상담사에게 자신의 폭력적 성향을 드러냈고, 상담이 끊긴 뒤에는 아캄 병원 직원을 붙잡고 자신의 범죄를 고백했다.

하지만 사회는 아서의 악행에 브레이크를 걸기는커녕 가속 엔진을 밟았다. 상담 지원이 끊기고 약을 끊으면서 그는 완전히 부서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사실 망상병 환자에게 입양된 고아로, 어머니로 믿던 페니 플렉에게 학대당한 경험이 있으며, 그로 인한 정신병으로 정신병원 퇴원 후에도 가해자와 함께 살며 그 트라우마와 틱 장애를 안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심리적 아버지로 여겼던 코미디언 머레이 프랭클린(로버트 드 니로 역)은 환자인 그를 개그 소재 삼아 전시하고 희화화한다.

아서가 자신의 무대를 코미디쇼가 아닌 뉴스로 옮기기 전에 사회 장치가 하나라도 제대로 작동했다면 어땠을까. 상담 지원이 끊기지 않아 약이 그의 악화를 막았다면? 어릴 적 자신을 학대했던 엄마에게 돌아가지 않았다면? 망상병 환자인 페니 플렉이 어린 아서를 입양하지 못했다면? 토마스 웨인이 하녀 페니 플렉에게 의미심장한 글귀를 보내지 않았다면? 모든 가정과 경우의 수를 제치고 영화는 사회로부터 짓밟힌 최악의 결과를 보여준다.


와킨 피닉스는 일평생 무시당해온 이 불안한 피해자가 그릇된 자존감을 얻으면서 세기의 빌런으로 변하는 과정을 처절하게 표현했다.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한 그의 몸은 웃음인지 울음인지 알 수 없는 표정 연기에 묻혀 언급조차 잘 되지 않았다. 영화에서 아서 플렉의 정신이 불안하다는 설정은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동일하다. 하지만 한 없이 왜소하고 별 볼 일 없던 아서 플렉과 사회적 존재감과 자존감을 얻은 빌런 조커의 모습은 확연히 다르다. 경찰 두 명에 쫓겨 지하철에 탑승한 아서 플렉은 긴 지하철을 채운 자신의 추종자들을 지나고 터널을 통과하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조커로 탈바꿈한다. 스크린으로 보이는 와킨 피닉스에게는 아서 플렉의 잔상이 남아있지만, 뷰 파인더을 통해 보이는 능숙한 춤사위로 살인을 벌이는 범죄자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세기의 빌런, 조커의 모습이다.

​한편, 감독은 범죄자로 전락하는 피해자의 메시지를 담기 위해 사운드를 최대치로 활용했다. 전작들에서 이미 증명했듯 토드 필립스는 장면 구성에 뛰어난 감독이다. <행오버>에서 훔친 아버지 자동차로 라스베이거스로 떠나던 장면은 개인적으로 재능 낭비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재능을 지닌 감독이 <조커>에서 필살기로 사운드를 더했다. TV나 라디오에서 들리는 방청객 웃음소리를 불안감을 조성하는 OST로 덮어 비참한 아서 플렉을 심리를 대변하는가 하면, 황홀한 망상 시퀀스의 재즈 음악과 혼란스러운 고담의 배경 소리가 디졸브를 이뤄 망상과 현실을 절묘하게 섞었다. 또, 아서 플렉이 페니 플렉을 살해한 뒤 홀로 프로그램 리허설을 하는 변화의 순간에는 직접 방청객 소리를 활용해 쇼 프로그램 코미디언 ‘해피’가 현실 속 ‘조커’로 변모하는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잘 만든 작품은 어느 정도 보았다. 가슴 아파 두 번은 볼 수 없는 <판의 미로>나 <나쁜 교육>, 일부 불쾌한 요소들을 고려해도 잊히지 않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혹은 <박하사탕>. 하지만 불편한 수작이 아니라 나쁜 수작이라고 표현하고 싶은 영화는 처음이었다.


영화 해석은 다양할 수 있다. 수용자의 경험과 배경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영화가 갖는 어두운 휴머니즘과 사회 장치에 대한 비판에 공감한다. 어떤 친구는 마치 '이 영화를 보고 우울감이 나았습니다'처럼 아서 플렉을 보며 상대적으로 본인이 낫다는 생각에 위안을 받았다고 했다. 반면 옆 자리 관객으로부터 영화 도중 뛰쳐나갈 뻔했다고 하는 말이 들렸고, 미국에서는 다크 나이트 때 총기 난사 사건을 이유로 상영 자체를 반대하는 의견도 넘친다. 이 영화는 어쨌든 누군가에게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였다.


하지만 스크린 밖에서 개별 관객, 나아가 사회에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 효과에 대한 이야기는 이 영화가 얼마나 잘 만들어진 영화인지에 대한 찬사와 다른 문제다. 한국에 와서 뜨끈한 국물 한 사발 먹어보라는 농담이 인터넷을 떠도는 것도 재밌는 소감이지만 미국인 아서 플렉의 상황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돈이 사람을 나누는 자본주의의 나라, 항정신약을 복용하는 도시 빈민이 넘쳐나고 총기 사용이 가능한 나라. 스크린 밖 개인이 영화 관람 도중에도 참사가 벌일 수 있는 곳이 미국이다.


와킨 피닉스는 한 인터뷰에서 이런 악영향에 관한 우려의 질문을 받은 뒤, 화가 난 상태로 현장을 떠났다. 그리고 제작사의 설득으로 돌아와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고민’이라고 대답했다. 와킨 피닉스가 발 딛고 살고 있는 곳은 마음을 녹여줄 뜨끈한 국물이 있고 총기가 규제된 한국이 아니라 사회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도시 빈민이 약물에 의존해 살아가는 미국이다. 그 정도 고민도 않고 제작에 참여했다면 나쁘다고 표현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아니, 무책임하다고 해야 할까.








여기서부터는 영화 밖 이야기를 끌어온 나의 주관적 해석이다. <조커>를 고안해내고 워너 브라더스에 제안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기에 앞서 감독 토드 필립스는 더 이상 코미디 영화를 만들지 않겠노라 다짐했다고 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은 담패설이 난무하는  코미디 대표 감독인데, 그가 느끼기에 세상은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하는 문화(‘Woke culture’)로 인해 코미디가 먹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코미디란 원래 부적절한 것인데, 그걸 만드느라 트위터에서 삼천만 명과 싸우기는 너무 힘든 일이라는 것이었다. 이후 ‘코미디 대신 부적절한 걸 만드는 법’을 고민하던 그가 발견한 것이 코믹스 영화였고, 거기서 시작된 작품이 <조커>다. 참고로 해당 인터뷰가 포함된 기사를 <토르3>의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이 트위터에 인용한 뒤 ‘He Funny’라고 조소를 보내 화제가 됐다.

​타이카 와이티티 감독의 팬인 내가 이 인터뷰를 영화 보기 전 본 게 문제였을까? 나는 이 영화에 숨겨진 메시지가 감독 토드 필립스의 미국 코미디계 비판으로 느껴졌다. ‘그저 남들을 웃기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경멸의 시선을 받고 주류 코미디언들에게 희화화되는 아서 플렉은 저질 농담과 욕, 섹슈얼한 농담으로 경멸당하는 토드 필립스의 페르소나였다. 욕설과 저질농담은 안된다는 머레이에게 조커는 자신의 살인에 대해 떠들며 “코미디는 주관적이야.”라고 말한다. 그가 <조커>를 통해 할리우드에 하고 싶은 궁극적 메시지



코미디는 주관적이지만 사회와의 상호작용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토드 필립스가 비판하는 미국 코미디를 좋아한다. 사회 약자 및 소수자를 개그의 주체로 포함시키고, 그들을 선량하지 않게 그리되 인종 차별, 젠더 차별, 노인 차별 등의 문제를 꼬집는 점이 좋다. 이런 내 호감은 코미디 드라마에서 비롯됐지만 상업 영화계도 크게 다르지 않다. 토드 필립스가 말한 대로 상업 영화는 더 이상 타인을 공격하는 부적절한 코미디를 원하지 않지만, 그게 정말 Woke Culture 때문일까? 나는 영화계를 뒤흔든 성 추문의 영향이 크다고 본다. 혹은 웃기고 말고를 넘어 이젠 돈이 안 될 정도로 할리우드에 널린 남성 서사의 상품 가치 하락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은 변하고 있다. 이걸 거부하는 토드 필립스가 내 눈에는 라떼충 같다. “라떼는 말이야~ 섹스 코미디는 무조건 먹혔다고~”


토드 필립스 감독은 아서 플렉에 대해 ‘실수로 상징이 되어버린, 자아를 찾는 남자’라고 언급하며 그의 진정한 목적은 사람들을 웃기고 세상에 기쁨을 가져다주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코미디에서 도망치듯 떠나 만든 문제작으로 황금사자상을 탄 이 시점에서, <조커>든 안티 히어로 드라마의 상징적 작품이 되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어쨌든 부적절한 소재로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던 감독의 목적은 이룬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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