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을 들을 때마다 나는 아닌데 하고 생각했었다. 죽으면 그만이지 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고 또 남겨야 하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출판을 준비하는 요즘 나야말로 이름을 남기고 싶은 욕구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지난 10년간 산업번역을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이 내 이름이, 아니 내 일에서 내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는 점이 아니었을까 한다. 일은 하는데 얻는 것이 돈밖에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아쉬웠다. 일종의 기계 같달까.
물론 이런 기계 같음에 내가 일조한 부분이 없지는 않다. 번역 일을 시작할 때 집중력을 기르기 위하여 타이머 앱을 처음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최소한 1시간은 딴짓하지 말고 번역에 집중하자는 취지였는데, 그것이 생산성을 따지는 일로 확대되었다. 시간당 이쯤은 벌어야 내 존재감이 유지되는 것처럼 타이머를 꼬박꼬박 돌렸고 그때마다 이 작업은 시간당 얼마, 저 작업은 시간당 얼마 이런 식으로 늘 습관적으로 측정하게 되었다. 이런 사고와 습관이 몸에 밴 상태에서 내 1인 출판의 첫 원고가 될 번역 초고를 완성한 뒤, 그 일에 소요된 시간을 보고는 입이 떡 벌어졌다. 원고지 250매 분량의 짧다면 짧은 이 소설의 초고에 꼬박 47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휴대폰을 보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물을 마시거나 하는 이런 시간을 제외한, 순전히 자판을 두드린 시간이다. 그러면 첫 번째 퇴고에는 얼마가 걸렸을까? 무려 30시간이 걸렸다. 아직도 몇 차례의 퇴고가 남은 가운데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총 77시간이라니. 이 일은 생산성을 따지며 하는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러고는 이 번역 원고 작업에는 더 이상 타이머를 돌리지 않는다.
이 중편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는 이러이러한 사람이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이렇게 저렇게 대처하거나 행동하는구나, 작자가 이런 말을 하고 싶었구나 정도의 감흥을 느꼈다. 그런데 번역을 시작하고 한 문장씩, 한 단어씩 뜯어보며 초고 번역을 하는 과정에서는 '와, 그걸 이렇게 표현한다고?' 하는 단락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내가 작가의 의도를 이렇게 면밀히 파악할 수 있다니.'라는 뿌듯함이 수없이 밀려왔다. 두 번째 퇴고 중인 지금은 번역문을 종이에 출력해서 보고 있는데, 왜 진작 이렇게 해보지 않았는지 살짝 후회가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몇몇 기회를 놓쳤을 것 같아서 말이다. 컴퓨터 화면에서 보는 내 번역과 종이에 출력된 내 번역은 마치 제2의 눈으로 보는 듯 사뭇 달랐다. 손볼 곳이 무수하게 보인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신기하게도 컴퓨터로 작업할 때는 떠오르지 않던 단어가 떠오르고 앞뒤 문맥이 좀 더 깊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타인 혹은 전문가의 몇 차례 교정교열이 필요한 이유가 이 때문이겠지 싶었다. 교정교열을 거친 뒤 편집 디자인 프로그램인 인디자인에 조판된 원고와 책의 모습으로 출력된 원고가 또 다를 터라 기대가 된다.
이 원고를 붙들고 있은 지 아마 85시간째쯤 되는 지금 나는 틀림없이 고난의 길을 가고 있다. 탈고까지는 아직 멀었고, 게다가 나는 원고의 탈고가 고난의 끝이 아닌 1인 출판을 선택했다. 편집 디자인, 제작, 판매, 마케팅 등 배울 일과 할 일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종이에 출력되어 빨간 글씨를 뒤집어쓰고 책상 한 편에 얌전히 있는 저 퇴고 원고가 사랑스러운 것을 보면 내가 이 일을 꽤 즐기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