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명수 Aug 26. 2020

한지 플릭, 삼고초려 없이 스스로 빛을 발한 영웅

분데스리가-챔피언스리그

[분데스리가-챔피언스리그]한지 플릭, 삼고초려 없이 스스로 빛을 발한 영웅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유비는 가장 강력했던 위나라 조조에 맞서 싸우기 위한 자문을 구하려 산중에 칩거한 천하의 지략가 제갈량을 찾아간다. 유비의 진심에 감동한 제갈량은 유비를 도우기 위해 세상 밖으로 나온다. 제갈량의 보좌에 힘입은 유비는 이때부터 역사적 행보를 내딛기 시작한다. 삼고초려(三顧草廬). 유비가 제갈량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몸소 제갈량의 초가집을 세 번씩이나 찾아갔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야기다.


19-20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팀 역사상 두 번째 트레블을 달성한 바이에른 뮌헨. 그 중심에는 한스 디터 플릭(이하 플릭) 감독이 있었다. 플릭은 2019/20 분데스리가 시즌 초반만 해도 니코 코바치 감독을 보좌하는 수석코치였다. 리그 시작부터 삐걱거리던 뮌헨은 10라운드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의 홈에서 5:1로 대패하며 니코 코바치 감독을 경질하기에 이른다. 뮌헨 이사진의 삼고초려의 기간도 없이 임시로 지휘봉을 건네받은 플릭은 전례 없는 역사를 거침없이 써 내려간다.


플릭은 뮌헨의 감독으로서 첫 경기였던 11라운드 '데어 클라시커'(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의 맞대결을 일컫는 말)에서 4:0 대승을 걷으며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다. 바이어 레버쿠젠과 묀헨글라트바흐와의 13,14 라운드에서 2연패하며 잠시 주춤했지만 이후 21라운드 (vs RB 라이프치히) 무승부를 제외하면 15라운드부터 마지막 34라운드까지 전승을 거두는 무서운 성과를 보였다.


플릭 감독의 뮌헨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더욱 돋보였다. 조별리그를 시작으로 결승까지 치러진 11연전을 모두 승리하는 발군의 실력으로 우승을 거머쥐었다. 게다가 이번 19-20 챔피언스리그는 코로나 사태로 인해 8강부터 결승까지 리스본에 모여 단판 승부로 치러지는 예외의 상황이 연출되었다. 기사회생이 불가한 단판 승부의 난세 속에서 플릭의 판단은 빛을 발했다.

2019/20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차지한 바이에른 뮌헨 [출처]-Bundesliga.com

바르셀로나와의 8강전에서는 선발로 점쳐진 킹슬리 코망 대신 페리시치를 왼쪽 윙으로 선발 투입했다. 페리시치는 뮬러의 선제골 과정에서 정확한 크로스를 올리며 골 찬스에 직접적으로 관여했고, 이어진 알라바의 자책골로 승부가 원점이 된 상황에서는 역전골을 성공시키며 플릭 감독의 선택에 보답했다. 나아가 플릭은 강팀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리드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수비적 태세를 취하기보단 공격에 무게를 더 실었다. 교체 투입된 쿠티뉴가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바르셀로나를 8-2로 완벽하게 제압하는 냉정한 판단력을 보여줬다.


플릭 감독의 지략은 결승전에서도 완벽히 먹혀들었다. 이번엔 8강과 4강 모두 왼쪽 윙으로 선발 출전했던 페리시치 대신 코망을 선발 라인업에 포함시켰다. 후반 58분, 뮌헨의 공격 상황에서 키미히가 올린 크로스를 그대로 코망이 헤딩으로 연결하며 결승골을 만들어냈다. 플릭 감독은 단판 승부가 진행될 때마다 들고 나온 적절한 선발 라인업과 매서운 공격 전술로 바이에른 뮌헨을 우승까지 견인했다.


플릭은 DFB-포칼(FA컵), 분데스리가,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트레블'을 부임 8개월 만에 이뤄냈다. 구단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달성한 업적으로 생각하겠지만 감독대행 당시 뮌헨의 이사진들에게는 그리 탐탁지 않은 적임자로 여겨졌다. 제갈량을 촉나라의 지략가로 품으려던 유비의 삼고초려와는 달리 뮌헨에서는 플릭을 정식 감독으로 앉히는 것에 대해 오히려 의구심을 품었던 것이다.


감독 커리어에서 확실한 증명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TSG 호펜하임(2000~2005)의 감독을 시작으로  RB 잘츠부르크(2006) 수석코치, 곧바로 독일 국가대표팀(2006~2014)의 수석코치를 맡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이후엔 독일 국가대표팀의 스포츠디렉터(2014~2017)로 지내다 2017년부터 1년간 TSG 호펜하임의 단장직을 수행했다. 감독으로 지낸 건 호펜하임 시절이 전부다. 그의 커리어 기간에 따낸 트로피는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독일 국가대표팀의 우승이었는데 그나마도 수석코치로 지낼 때의 이야기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독일 대표팀의 우승 당시 한지 플릭(왼쪽) 수석코치 시절, 요아킴 뢰브(오른쪽) 감독과 함께 [출처]-dfb.de

플릭 감독 부임 이후 8개월간 진행된 35 경기(분데스리가 및 챔피언스리그) 중 32경기에서 승리를 거뒀다. 이는 경기당 평균 승점 2.78에 해당하는 점수로 2013/14 시즌 펩 과르디올라 시절의 경기당 평균 승점 2.6 보다 높으며, 구단 역사상 첫 트레블을 달성했던 유프 하인케스 시절 뮌헨의 2.7보다도 높은 수치다. 또한 플릭 감독의 뮌헨은 '경기당 평균 3득점'이라는 클럽 역사상 최고의 기록을 달성했다. 리버풀 FC의 위르겐 클롭 감독은 "8개월간 이보다 더한 역사를 써 내려가기엔 어렵다"라며 독일 키커(Kicker) 지와의 인터뷰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플릭 감독에 대한 공개적인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플릭을 감독으로 앉히기 위한 뮌헨의 삼고초려 같은 극진한 노력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독일 대표팀 수석코치와 스포츠디렉터로 몸담으며 조용하고 꾸준히 내공을 쌓았던 플릭 감독. 공격력이 한풀 꺾였던 바이에른 뮌헨에 2014 브라질 월드컵 준결승전에서 브라질을 7-1로 대파하던 독일 대표팀의 색을 입히며 전 세계 축구판에 '바이에른 뮌헨 시대'를 알렸다.


유비의 삼고초려가 없었더라면 제갈량의 뛰어난 지략도 재야의 산중에서 그저 한 줌의 지식으로 사라지고 말았을 일이다. 플릭은 뮌헨 이사진의 간절한 요청조차 없었다. 오히려 의구심에 둘러싸였던 감독으로서의 출발이었다. 스스로 빛을 발하며 바이에른 뮌헨을 세계 최강의 자리에 올린 플릭의 이야기가 삼고초려보다 더 깊은 울림을 준다.

작가의 이전글 아버지의 진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