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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명수 Aug 05. 2020

아버지의 진심

다시 독일로

"미국은 유학생들 다 돌려보낸다더라. 너도 상황이 이래서 독일 갈 수 있겠냐. 한국에 남아서 군대나 다시 들어가는 게 어떻냐" 


눈물이 핑 돌았다. 다 자식 잘 되라고 걱정해서 하는 말씀인 줄은 안다. 그런데 군 복무하면서 독일 다녀오겠다고 돈 모아 1년 6개월간 독일에서 혼자 지내며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떻게 지냈는지는 모두 무시하는 아버지의 발언이었다. 말문이 막혀 방문을 닫고 들어가려다 마음을 가라앉혔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차라리 아버지와 대화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TV를 보시는 아버지 옆에 비스듬히 앉아 말없이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이내 말을 이어갔다.


"요즘 다 힘들다. 코로나도 아마 더 오래갈 것 같은데 정말 괜찮겠냐. 중위로 전역했으니까 부사관으로 다시 들어가도 되지 않느냐"


"아버지 말씀 이해는 하겠는데 대체 어디서, 누구랑 대화하시고 그런 말씀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 저 분명히 ROTC 할 때부터 군인은 평생직업으로 삼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군 복무 잘 마치고 나왔잖아요"


내 마음을 몰라주는 아버지가 미웠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시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날 모르시는 건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사는지 구구절절 이야기하며 예쁘게 포장하고 싶지 않았다. 살아오며 해왔던 일들 아니, 내 인생의 길 위에 찍어왔던 작은 점들을 그저 '아들아, 너는 너만의 길을 가고 있구나' 정도만 알아주시길 바랐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버지가 어릴 때부터 모든 선택을 내 스스로 할 수 있게 하셨다. 딱 한 번, 고3 수능을 보고 난 뒤 재수를 하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때만큼은 아버지가 거절하셨다. 그러나 청개구리처럼 아버지 말씀을 거역했다. "학원 안 갈 테니 혼자 할게요 아버지"라고 말하며 그때에도 결국엔 내가 선택할 수 있게끔 나를 놓아주셨다. 거절하셨던 그때의 아버지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이미 5,6살 터울의 누나들이 연달아 대학에 들어가 가계에 부담이 됐기 때문이다. 


사실 아버지는 누구보다 배움에 목말라 하신 분이다. 초등학교 졸업 후 돈 5,000원이 부족해 중학교 진학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직도 가끔씩 47년 전 중학교 입학통지서를 서랍장에서 꺼내 보여주곤 한다. 아버지가 8살 때 할아버지는 급성폐렴에 걸려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함께 두 명의 동생을 돌보기 위해 15살 때부터 생계를 책임졌다. 16살이 될 무렵 충북 영동에서 혈혈단신 대전으로 건너왔다. 학업도 포기한 채 버스 정비사를 거쳐 버스 운전기사, 개인택시까지 45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운전'이라는 한 직무에서만 평생을 일해 오셨다. 


아버지의 40년 전 군 전역증

"저부터도 걱정이 많고 고민도 많아요 아버지. 독일에서 어학시험 붙고 독일에 계속 있을까도 생각했어요. 근데 현실적인 문제도 있고, 취업부터 다시 할까 해서 돌아왔잖아요. 근데 지금 아니면 다시 못 갈 것 같더라고요. 군대는 아니에요 아버지. 나 하나 평생직장 얻자고 생각해서 가는 곳 아니잖아요. 그곳은 사명감 없으면 못한다고요 더욱이. 군대 얘기는 대체 왜 나온 거예요?"


"아빠가 몰라줘서 미안하다. 말도 이쁘게 못하는 거 잘 아는데, 저번 달 엄마랑 외할머니 모시고 외삼촌 전역식 다녀왔잖아. 외삼촌 군대에서 35년 동안 근무하고 부대원들 앞에서 편지 읽는데 울먹거리더라. 멋지잖아. 한곳에서 그렇게 헌신하면서 일하고 박수받고 떠난다는 게"


아버지의 말을 듣고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버스기사 16년, 개인택시 21년. 얼마 전 원사로 전역한 외삼촌처럼 한 직종에서 경력이 40년 가까이 된다. 모범운전자회에 가입돼 쉬는 날이면 매번 아침마다 거리질서 봉사까지 나가셨다. 5주년 주기로 무사고 상패도 항상 받아오셨다. 아버지는 한곳에서 헌신하며 일한다는 것에 대한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신 분이었다. 


아직 자리 잡지 못한 막내아들이 못내 걱정스러우셨던 모양이다. 운동과 축구가 좋다며 체대에 진학하고, 선수도 아니면서 대학교 동아리 대회를 나가 목숨 걸고 뛰고, 전역하고 나서도 남들 다하는 취업은 미뤄두고 독일 가서 더 공부해보겠다며 난리 치는 게 아버지의 눈에는 한곳으로 향하려는 길로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나를 몰라주는 것 같아 속이 상했지만, 문득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 그간 대화도 하지 않았으면서 아버지가 날 몰라 준다고 속상해하는 것부터가 어불성설이었다. 스물한 살의 1월, 친한 친구 군 입대 배웅을 해준다며 10명의 친구들이 논산으로 향했다. 운전대의 민감함을 알고 계셨던 아버지는 까불지 말고 고속버스를 타고 가라고 일러주셨다. 아버지 말을 듣고 고속버스를 타야 한다며 의견을 제시했지만 나머지 9명은 차량 렌트를 택했다. 우리는 두 개의 차량을 렌트했고 불길한 직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대전-논산 간 고속도로에 진입했을 때 두 개의 차량 중 뒤따라오던 차가 중앙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도로 한복판에 멈춰 섰다. 내가 탄 차량이었다. 이마가 벌어져 앰뷸런스로 병원에 이송됐다. 처음 전화 건 곳은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였다. 


ROTC 2년 차,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중에 기숙사에 살지 않는 동기를 재워 준다며 토요일 저녁 학군단 기숙사에 데려온 적이 있었다. 다음 날 생각지도 못한 문제가 생겼다. 도벽이 있었던 동기는 일요일 아침 모든 방을 돌며 동기들의 지갑에 손을 댔고 그 일로 동기는 학군단에서 퇴출되었다. 나 역시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만으로 기숙사에서 쫓겨났다. 당장 지내며 학교 다닐 곳이 없었다. 그때마저도 아버지가 아닌 누나들에게만 이 사실을 통보했었다. 


2013년 국민대학교 학군단 53기 입단식에서

큰일이 있을 때마다 아버지와의 소통은 뒷전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하소연을 하신 적이 있다. "너 그런 일 있을 때에 얘기도 안 하면 누가 아버지 노릇을 하느냐. 난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도 없이 자랐다 인마. 아버지 노릇 할 수 있게는 해줘야 할 거 아니냐" 소통하려고 하지도 않았으면서 알아 주기만을 바란 내가 한심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빵 우유를 준다며 초등학교 때 들어갔던 육상부. 30년이 넘은 아버지의 습관인 출근 전 매일 같이 운전석에 앉아 정리하는 일기. 주량 소주 3잔 조금 흥이 나면 5잔 반. 16살에 대전으로 넘어와 돈 벌며 동생들 고등학교까지 공부 책임짐. 버스 정비하던 40년 전 넝마주이들이 행패를 부리고 폭력을 휘두를 때같이 정비하던 사람과 버스 안에 웅크리고 몸을 피함. 59년 9월 6일 생이지만 동사무소 직원의 실수로 59년 12월로 주민등록 기재. 초등학교 때부터 쉬는 날이면 아들과 축구를 같이함.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 더. 벼를 팔아 아버지 중학교 진학에 보탤 돈을 갖고 서울로 도망간 작은할아버지를 모시고 아직도 식사를 하고, 시골에 모셔가곤 함. 아직도 원망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어머니는 아직도 작은할아버지를 미워한다. 아직도 아버지에 대해 알아야 할 게 너무나도 많다. 


엊그제는 아버지가 노랗게 잘 익은 큼지막한 바나나 한 송이와 복숭아 한 박스를 퇴근길에 한 아름 사들고 오셨다. 아버지는 눈은 마주치지 않고 TV를 보시며 말했다. 


"아들 많이 먹고 열심히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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