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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쿠폰은 약을 사는 데 쓰고

by 래연


한때, 상당 기간, 블로그 세계엔 우울한 이웃들이 많았다.

어느 날 이 생각이 떠오르면서, '우울한 이웃'이란 표현이 온당치 않게 여겨졌다.

(처음부터, 늘, 바탕이), 이런 의미를 품고 있는 것 같아서,

그 앞뒤를 알 수 없는 전체적 존재로서의 사람을 규정하는 느낌이 들었다.


'우울해하는 이웃'으로 바꿔보면, 그 순간을 한시적으로 표현한 것 같아서 조금 마음이 덜 무거워지는 듯도 하였으나,

우울이라는 상태에 '~해하는'이라는 게 어울리기나 하나 싶었다.

침대 밖으로 나와 간단한 일상 동작을 하는 것조차 힘든 상태에 저 어미는 지나치게 동사적인 느낌이고.


아무튼 우울을 표하던 분들의 상당수가 안 보인 지가 꽤 되었다.

다른 이가 우울을 표하는 일들이 대개는 부담스럽지 않았었다.

무언가를 말하고 있다는 것은 어쨌든 다행한 일이라 생각했다.


삶 자체가 어렵고, 지금 현대 사회는 부조리하고.

과거 언제 인류사에 좋은 때가 있었으랴마는, 지금 같은 속도와 경쟁에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이니,

우울은 정도의 차이가 있어 그렇지, 어느 정도 기본값이라 생각한다.


사실, 남들이 볼 때 긍정적이고 생산적이며 행복해 보이는 부분을 전시하게 될 때,

일정 정도의 죄책감이 따라붙는다.

사실, 그런 일들의 뒷면에 도사린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속시원히 까발리고도 싶다.

좋은 일 한 개에 따라붙는 열 개의 그림자와 헤아릴 수 없는 곰팡이들.

이런 것들을 참아가며 이런 것들 해나간다고 줄줄 토하고 싶다.


내가 해나가는 일들을, 무슨 의미 부여 때문이 아니라,

죽을 때까지 무언가는 붙잡고 하고 있는 게,

그래도 순간순간에 집중할 거리가 되기 때문인 이유가 크다고 말하고 싶다.


상대적으로 지금은 주로, 멀쩡한 이야기가 주가 되는 이웃분들이 훨씬 더 보이는데

전체적으로 건강해졌다기보다, 허전함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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