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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 아닌 불치병

by 래연




꿈에 오디션 경연이 있었다.

나는 참가자는 아니었고, 그중 어떤 3인조 밴드가 혁혁했다.

멤버 중에는 한 천재적인 기타 소년이 있었다.


그가 우리 집에 들렀다.

집은 묘하게 부모님의 집과 지금의 내 공간이 겹쳐 있었고, 돌아가신 아버지도 계셨다.


소년은 내 방에서, 아무도 하지 않는 방식으로, 기타줄을 몇 개 묶은 채로 튕겨 새로운 음을 냈다.


나는 주방과 방을 오가다, 수납하는 서랍과 벽장의 칸들이 바뀌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물들의 위치가 다 바뀌어 용도와 질서가 뒤죽박죽이었다.

그 낯선 질서 속에서도 소년의 연주는 또렷했다.


눈을 뜨고 나서, 비문증이 시작된 날짜를 적어봤다.

2025.10.25.5시.

숫자 ‘5’가 겹친다. 5라는 수가 이렇게 많다니. 5는 갑작스러운 변화를 의미하지.

연월일 모두 더한 숫자와, 월일만 더한 숫자를 내면 8-8이 나온다.


비문증은 산책 중, 공원에서 공원으로 이어지는 다리를 건너다 발견되었다.

처음엔 바닥의 무늬를 보고 난 다음의 잔영이라 여겼다.

이날 산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다른 날과 다름없어 보이는 여정에, 이렇게 삶의 조건이 바뀌어 이전으로 돌아가지지 않는 일이 생길 줄을 짐작이나 하였을까.

이게 비문증임이 확실해지면서, 그것의 발견 직전의 시간이 통째로 영롱하게 여겨졌다.


몸에 에너지가 워낙 없기 때문에, 조금씩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체력을 비축한다 해도, 어떤 경로로 소모가 일어나 방전되면 꽝이기 때문에, 이제는 꼭 신경 쓰지 않아도 될 일에 에너지가 몰리지 않도록 온갖 일에 심리적 거리를 두려 하고, 체력과 심력이 감당되는 한에서만 사람을 만나고, 인간관계 유지고 뭐고 내가 축나는 느낌 드는 일들을 어떤 당위로라도 거부하고, 뭐 이런 모드로 맞춰가며 평화가 오려던 참인데, 이 비문증이란 마치 내 안의 적(혹은 friend) 하나가 난데없이 등장해, 말 그대로 사사건건 시야를 가로막는 것만 같다. 당분간 눈앞에서 사라지지 않는 이 형상과 지내야 하고 그러다 보면 대화조차 가능해지고야 말겠지.


세상의 엄청난 고통들에 비하면 이런 건 얼마나 사소한가. 그런데 사소한 것들은 또 얼마나 간지럽고 걸리적거리는가.

이젠 뭐, 이런 삶에 웃음이 나올 뿐이지. 점점 견디는 법을 업그레이드시켜주는 프로그램인가 하며.


사는 일이란, 남에게 일어나던 일들이 내게도 일어나는 일들의 연쇄 사슬 같기도 하고.



근사한 일몰을 볼 때면, 꼭 저 앞에는 누군가가 일몰을 찍고 있고, 그러면 나는, 저이는 내가 보고 있는 걸 알까? 하는 생각이 들며, 연고 없는 저 사람을 감싸는 기분이 된다. 그러면서, 나도 모르는 모든 순간에 나를 바라보는 누구 혹은 무언가가 있다 싶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세계가 첩첩이 순하게 겹쳐져 멈출 때 신은 비스킷들을 뒤집어 오븐에 넣지. 비스킷에게 먹일 비스킷을.


어떤 날을 기념한 기억이 없고, 그래서 이참에, 영구 다이어리(매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시간 관계없이 쓰는 정보 기록장) 맨 뒷면을 열어, 5가 그득한 비문증 시작일을 적어 넣는다. 벌써 오늘 너랑 3일째야.


내친김에, 무언가가 극적으로 바뀐 날을 제대로 기록하고 살았나 잠시 돌아보다, 그럼 개명 승인 난 날을 알고는 있었나 싶어지며 문자 메시지들을 돌려봤더니, 마침 지우지 않은 정보가 나온다.

2020. 9. 22.

여기는 2투성이었구나. 역시 더하면 8-13. 13은 대변화의 수.





이제 딱 3일 남은 10월. 귀국하여 하루도 빠짐없이 악몽을 꾸었더랬지. 꿈속에서 난 번번이 다른 상황에서 똑같이 난감했고, 이상하게도 깨어난 후에도 꿈 전체의 얼개가 쉬 휘발되지 않았다. 이 흐름은 끝내 10월 말일까지 가려나? 그럼 정말 살면서 예외적인 10월이 될 텐데. 이미 그렇다.


10월은 11월로 가지 말고, 날짜들은 각각의 깊이로 함몰되고, 그다음 숫자로 건너가거나 그 누구도 추격하지 말지어다. 램프가 하나씩 도달하듯 하루가 오고, 그날들이 모여 어깨를 가로로 흔들며 서로의 즉흥으로 노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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