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가 죽음을 극복한 방법
7일 차
산 마르틴 - 아스토르가
오늘 걸은 거리 : 24.8km
걸은 거리 : 115.8km
남은 거리 : 255.3km
레온에 도착한 이후부터 오늘까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 계속되고 있다. 하늘의 색깔이 얼마나 푸른지, '하늘에 파란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이라는 상투적인 표현보다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다. 일기예보를 확인하지는 않았지만, 그저 해맑은 하늘의 표정으로 봐서는 꽤 오랫동안 화창한 날씨가 계속될 것 같다. 지난 순례길에 제대로 된 우의를 갖추지 못해 고생했던 기억을 반면교사 삼아 이번에는 제대로 된 판초 우의를 챙겨가지고 왔다. 몇 년 전 일본의 시마나미 해도 취재를 위해 일주일 동안 500킬로미터 정도를 자전거로 달렸을 때에도 거센 비를 물 셀 틈 없이 막아주었던 유서 깊은(?) 우의였다. ('자전거 타고 소도시 여행 / 인페인터글로벌'에서 확인하실 수 있어요!)
지난 순례길의 경험상 하루 종일 비를 맞고 걷게 되면, 양말을 말리면서 걸을 수도 없고, 질척거려지는 길의 상태 때문에 걸음걸이도 느려진다. 게다가 날씨가 좋을 때는 그렇게 예쁘게 보이던 풍경들이 마치 무채색만 대충 덕지덕지 발라 놓은 듯한 추상화처럼 변해버리는 일 또한 순례길이 주는 즐거움 중 하나를 박탈해가는 느낌마저 든다.
아마 정말 운이 억세게 좋다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물에 빠진 궁상맞은 순례자 꼴이 될 일이 전혀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걷는 동안에 언젠가 어느 순간에 배낭 속 가장 깊은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우의를 급하게 찾아 꺼내 입을 날이 있기를 소망한다. 비에 쫄딱 젖은 채로, 신발과 바지 아랫단이 온통 진흙 투성이가 되어서, 하루 종일 온갖 욕을 속으로 외치다가 기진맥진해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결국 알베르게 문을 열었을 때의 안도와 환희, 구원의 기쁨을 맛보기를 바란다.
"어떤 인간은 스스로에게 고통을 부과한 뒤, 그 고통이 자신을 파괴하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하고자 한다. 그때 경험하는 안도감이 너무나도 달콤하기 때문인데, 그 달콤함을 얻으려면 고통의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여행의 이유> 김영하
어쩌면 순례길의 모든 이들은 이 고통의 시험대에 스스로를 밀어 넣고, 그 나름의 보상이 주는 달콤함에서 그 자신에게만 의미가 있는 무언가를 발견하는 사람들 일지 모르겠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그 시험대에 기꺼이 자원했기에, 그 모든 고통을 결국 사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순례자들은 고통도 기쁨만큼 평등하게 사랑했던 아킬레우스에게 다가간다. 지금의 감정과 현재를 그 누구보다 사랑해서 죽음을 망각한 영웅. 크산토스가 그의 죽음을 예견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전장으로 나간 사람. 긴 삶이 아닌 명예로운 삶을 선택했기에 시대를 넘어 영원한 삶을 얻은 사람. 피조물이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운명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을 행동으로 체득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