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
레온 - 산 마르틴 델 카미노 (san martin del camino)
걸은 거리 : 25km
남은 거리 : 314km
팜플로나만큼 더 큰 대도시인 레온에서 다시 걷기를 시작했다. 9년 전 기억으로는, 레온에서 출발하던 날 비가 사정없이 쏟아붓는 통에 얇은 비닐 우의에 의지해 걷다가 결국 그 날씨에 이기지 못하고 목적한 곳에 다다르지 못하고 가다가 물에 젖은 생쥐꼴로 온 몸에서 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어느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었던 게 생각났다.
오늘의 목적지는 산 마르틴 델 카미노. 순례자 여권을 만들 때 순례자 사무소에서는 각 마을 간 거리와 경사의 높낮이가 대략적으로 표시된 표를 나누어주는데, 이 표를 보면서 하루마다 얼마나 걸어갈지 대략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 같은 거리를 걷는다고 해도, 경사의 차이에 따라 체감하는 난이도는 하늘과 땅 차이기 때문이다.
레온에서 산 마르틴까지는 도시 외곽의 도로를 따라 대부분 경사가 완만한 평지가 계속 이어졌다. 오늘은 강한 햇볕과 함께 티 없이 맑은 날씨가 하루 종일 계속된 덕분에, 큰 화물차들이 옆으로 쌩쌩 달리는, 그늘이 거의 없는 큰 도로변을 따라 몇몇 작은 마을을 지나치며 일곱 시간을 걸었다. 별로 볼만한 풍경도 없었고, 지평선 너머 끝없이 펼쳐진 비슷한 길을 따라 걷는 일은 꽤 무료했지만, 첫 번째 순례길에서 거센 비에 가려 발견하지 못했던 풍경들로 다시 새로운 기억을 써 내려가는 일은 유쾌했다. 게다가 길을 잃지 않도록 방향지시등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해주는 수많은 노란색 화살표들 발견해나가는 일은 늘 마음을 안도하게 한다.
길을 걷다 보면 삶을 살아가는 데에도 이 순례길에서 처럼, 어느 정도의 굴곡이 예비될지 알려주는 표라던지, 내가 선택한 길의 방향이 정말 맞는지 끊임없이 알려주는 노란색 화살표들이 있다면 갈등으로 가득 찬 이 삶을 살아내는 일이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하는 헛된 바람을 품게 된다. 9년 전에는 그런 부질없는 희망이 주는 위안을 받고 싶어 떠나왔던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그 길들을 되짚어가며 과거의 나와 화해한다.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고, 비록 그때도 무지했고, 지금도 무지하며, 오로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앞으로도 무지할 것이라는 사실이겠지만 그럼에도 걷는 일은 즐거울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