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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May 05. 2022

다시 산티아고로 - 5일 차

길이라는 학교로



팜플로나에서는 하루를 온전히 보냈다. 이곳에서 하루 쉬어갈 계획은 예정에 없었지만, 팜플로나에 도착한 날에는 레온으로 향하는 기차표가 모두 매진된 상태였다. 일단 다음날 기차표를 예매해놓고, 혹시나 입석이 가능할까 싶어서 구글 번역기로 '입석'이라는 스페인어 단어를 찾아가지고 직접 기차역에 가서 알아보았지만, 입석 같은 건 없다며 내일 다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렇게  이상 알베르게에 여장을  이유가 없어졌기에, 혼자서 하루 편하게 지내기에 부담스럽지 않은 가격의 호텔을 바로 예약해서 짐을 풀었다.


랄라소냐를 떠나던 날 이후로 비는 오지 않았지만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씨가 계속되었고, 기온은 11도에서 13도 사이를 오갔다. 챙겨간 일상복은 면바지 한 벌, 반팔 티셔츠, 맨투맨 셔츠 한 벌이 다였기 때문에 해가 나지 않는 날 걷지 않을 때에는 금방 으슬으슬 해지곤 했다. 그럼에도 온종일 햇볕 아래서 걸었던 둘째 날에는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팔과 손이 빨갛게 익었다. 맑은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의 기온차만큼이나 기분의 온도차도 또한 오락가락했다. 팜플로나로 향하던 날에는 기차를 알아보기 위해 마음이 급해 너무 일찍 나온 탓에 도착할 때까지 순례자와 단 한 명도 마주칠 일이 없었고, 사람들과 자동차들로 북적거리는 대도시의 분위기가 야기하는 외로움은 어두운 날씨로 인해 그 그림자를 더 짙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며칠 만에 완전히 혼자가 되어 '나만의 화장실'에서 기다리는 사람 신경 쓸 일 없이 오랫동안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10시에 맞춰 소등되는 일 없이 조금 더 책을 읽다가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껏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잠들기 등 사소하지만 오랜만이어서 너무 반가운 행복들을 맛보았다. 좁은 통로에 배낭을 펴 놓는 일이 번잡스러워서 미뤄뒀던 짐 정리도 다시 하고, 약국에 들러 소독제와 이부프로펜, 종합비타민과 바르는 진통제를 구입했다. 예상대로 약사는 영어를 전혀 못했고, 미리 정보를 찾아 약사에게 보여준 덕분에 어렵지 않게 일을 마칠 수 있었다.




레온까지는 기차로 4시간. 출발 시간은 13시 24분이었으므로 오늘은 기차를 타고 레온까지 이동하여 알베르게에 짐을 풀면 하루가 끝날 것이다. 내가 탄 기차는 그대로 타고만 있으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달릴 터다. 그러나 레온까지 가는 만큼만 기차로 몇 시간 더 가면 도달할 거리를 이제 나는 2주에 가까운 시간을 들여 조금씩 줄여나갈 것이다. 어쩐지 생장에 처음 도착하던 날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다시 여행을 떠난다.


어쩌면 지난 4일은  몸에게 조금 가혹했을 수 있다. 그러나 레온으로 향하는 지금, 한시라도 빨리 다시 길을 걷고 싶어 근질근질한 느낌이  정도로 팜플로나에서의 휴식은 멀리 앞서가는 마음을 몸이 따라잡을  있도록 해 준 균형추가 되어준 것 같다.




이제 레온에서는 완전히 새로운 순례자들과 만나고 헤어지게 될 것이다. 어쩐지 두려움과 설렘 속에서 낯선 지역으로 전학을 가는 학생이 된 기분마저 든다. 찰나의 휴식을 마치고, 나는 다시 길이라는 학교로 떠난다.


2022년 5월 3일, 레온행 기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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