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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odoseeker May 09. 2022

다시 산티아고로 - 10일 차

속도보다 방향

10일 차



카카벨로스 - 라 포르텔라 La Portela de Valcarce

오늘 걸은 거리 : 22.5km

걸은 거리 : 205.6km

남은 거리 : 175.6km


호텔 조식이 오전 8시, 조금 늦게 시작되는 편이었으므로 평소보다 꽤 여유롭게 잠에서 깼다. 어제 그렇게 기진맥진한 상태로 도착했으면서도 이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나면 거짓말처럼 다시 걸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 차 출발할 채비를 시작한다. 물론 배낭 속에서 꺼내졌던 온갖 물건들을 다시 정리하고, 접어서 차곡차곡 집어넣는 일은 늘 귀찮은 일이다. 숙소에 들를 때마다, 그것도 매일매일 너무 많은 물건들을 꺼내놓고 다시 집어넣다 보니, 자꾸 무언가 잃어버릴 것 같아 불안하다. 그래서 여행이 길어질수록 알베르게를 떠나는 아침, 가장 효율적으로 물건들을 신속하고 조용히 다시 집어넣을 수 있도록 잠에 들기 전에 만반의 준비를 하는 요령이 늘어간다.

순례자들은 대체로 다들 일찍 출발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적게는 3명, 많게는 8명이 넘게 함께 쓰는 도미토리에서 누군가는 단잠에 빠져 있을 이른 아침에 짐을 싸느라 부스럭, 찌익 하는 소리들을 염치없게 마구 낼 수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나는 잠들기 전 세면도구들을 큰 지퍼백에 몽땅 담아놓아 아침에 한 번에 들고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놓고, 다음날 입을 등산복과 재킷 등도 한꺼번에 집을 수 있도록 쌓아둔다. 그리고 오전 여섯 시쯤 눈을 뜨면, 지퍼백이 뽀시락 거리지 않도록 끄트머리를 조심스럽게 잡고 세면장으로 가 대충 씻고 나서, 알베르게 복도에 그대로 그것들을 내려놓은 뒤, 다시 도미토리로 돌아가 내 물건들을 두세 번에 걸쳐 전부 복도로 갖고 나오고 나서 방의 문을 조용히 닫는다. 그러고 나면 배낭 정리는 복도에서 마무리한다. 침낭 또한 방에서 그대로 정리를 하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기 때문에, 그대로 갖고 나와서 복도에서 말아 넣는다. 다행인 건, 유독 나 혼자 이렇게 남을 배려한답시고 유난 떠는 게 아니라, 일찍 출발하는 거의 모든 순례자가 이렇게 해도 뜨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복도에서 만나 침낭을 말면서 작은 목소리로 "굿모닝"하며 서로 미소를 짓고 소곤거린다는 사실이다. 오늘처럼 혼자 쓰는 호텔방에서 하루를 시작하게 되면, 누군가를 배려하느라 수고스러워지는 일은 없기는 하지만 어쩐지 무척 아쉬운 기분이 든다. 순례자들의 숨소리가 섞인 새벽의 공기 속에서 아침의 안부를 속삭이는 일들 또한 길 위에서 보낸 시간들만큼이나 그립게 되는 이유다.




하루의 대부분을 길 위에서 보내는 요즘, 생각보다 다른 순례자들과 이야기를 하거나 친분을 나눌 특별한 일이 없을 만큼 길에서 순례자들을 많이 본 것 같지도 않은데, 요 이틀간은 알베르게의 자리를 구하는 일이 어려웠다. 그저 내가 운이 없거나, 하루를 지낼 마을의 선택과 도착하는 시간이 부적절했을지도 모른다. 가능하면 알베르게의 침대를 예약하지 않고서 걸을 수 있을 만큼 걷고 머물고 싶은 곳에서 머물 생각이었는데, 어쩌면 호텔을 전전하는 일이 더 많아질 수도 있겠다는 불안한 생각이 든다.


오늘은 카카벨로스로부터 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하지 않아도 되는 등산을 했는데, 이제  초록 잎사귀가 돋아나기 시작한 광대한 포도밭 한가운데에서 헤매다 2킬로미터 정도를 다시 걸어 무사히 순례길로 복귀했다. 때문에 원래 예정했던 마을에   ' 포르텔라' 마을 어귀의 피자 가게가 운영하는 알베르게에 여장을 풀었다. 종일 큰길을 따라 아스팔트 위를 걸은 데다가, 하루가 다르게 높아지는 기온에 걷는 내내 땀을 흘려 무척 지쳐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하는 것은 무리였다.



이 마을은 순례자들이 하루 머물다 가기에는 무척 애매한 위치인 탓에, 침대가 열 개가 넘는 3층 다락방에는 나 혼자 뿐이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여기서 4킬로미터 정도를 더 걸어 '베가 데 발카르세'까지 가서 머물 터였다. 생각해보면, 만약 베가 데 발카르세의 알베르게를 미리 예약했다면 무리해서라도 오늘 내에 그곳에 도달했을 것 같다.

샤워를 마치고 나서, 한바탕 피자를 먹는 손님들이 다녀가고 영업이 끝난 휑한 테라스 테이블에 앉아서 뙤약볕 아래 걸어가는 순례자들에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면서  목적에 쫓겨 스스로에게 가혹했던 나날들로부터 거리를 두기 위해   위로 떠나왔다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삶에서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라고 했던 괴테의 말처럼, 적어도  길을 걷는 오늘은 노란색 화살표의 방향에  집중하기로 한다. 여기서는 혹시나 길을 잃게 되더도, 2킬로미터 정도만  걸으면 모든 일을 바로잡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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