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념의 방패를 든 두 손에 힘을 주고,
12일 차
트리아카스텔라-아 라셰(A laxe)
오늘 걸은 거리 : 42.5km
걸은 거리 : 283.5km
남은 거리 : 98.1km
"살면서 오로지 내가 잘못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을 지거나 욕먹는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하겠죠." 그녀는 잠시 말을 끊고 조금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 "사실 우리는 내가 잘못하지도 않은 일들로 인해 더 고통받고 갈등하잖아요."
길을 떠난 지 일곱 번째 날에 레온에서 산 마르틴으로 가는 길에 우연히 마주친 H는 꽤 오래 다니던 안정적인 직장을 그만두고 생장부터 산티아고까지 800km를 걸으며 그동안 너무 바쁘기만 해서 고민해보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해보고 싶어서 순례길을 시작했다고 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또래의 한국인이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걷는 속도가 달라 산 마르틴에서 금방 헤어졌지만, 아스토르가의 공립 알베르게에서 다시 마주쳤고, 무슨 대화를 하던 와중에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준 것이었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오로지 혼자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하는 무인도의 조난자의 입장이 되지 않는 이상, 복잡한 인과가 뒤섞인 인간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벌어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이고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개인적인 책임의 범위를 벗어나는 데다가, 어떻게 손 쓸 틈도 없이 일어나는 수많은 부정적인 일들. 그 가장 큰 비극 중의 하나는 전쟁일 터다.
이후 쭉 혼자 걷는 내내 틈이 날 때마다 유독 그녀의 이야기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불과 몇 개월 전인 작년, 내가 가장 오랫동안 고민하고 갈등했던 문제들이며, 여전히 아직까지도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었는데, 아스토르가에서 들었던 그녀의 그 몇 문장으로 모든 게 말끔하게 정리됐기 때문이다.
작년 한 해 동안에는 무척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저 늘 그래 왔던 것처럼 그림을 그려왔을 뿐인 나는 어떤 이들에게는 어느새 미술계를 어지럽히는 못생긴 작가가 되어있었다. 누군가는 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취향이 구려서, 우리나라 미술 애호가들의 수준이 이 정도라는 데에 유감이라고도 했다. 일면식이 전혀 없는 어느 갤러리 대표가 내 인스타그램에 사기꾼이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했고, 그런 비슷한 일들을 지겹게 겪는 동안 고작 몇 자의 댓글 때문에 사람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어떤 커뮤니티에서는 내가 사는 곳, 내가 타는 차를 비롯한 여러 내 사생활과 작품에 대한 근거 없는 추측들이 사실인 양 생산되고, 확산됐다. 해명할 수도, 그렇다고 해명하는 것도 웃긴 그런 수많은 일들에 줄곧 상심하는 나를 두고는, 멘탈이 약하다고들 했다. 상담을 받을지 말지 일 년 내내 고민하다가, 정말로 상담을 받기로 결심하는 순간 어쩐지 그들을 인정하는 꼴이 될 것만 같아서 그대로 삼키고 괜찮은 척했다. 이제는 애써 괜찮은 척을 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단단해졌다고 스스로 생각은 해 왔지만, 어쩌면 이 길 위로 스스로를 떠나게 만든 이유 중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걸으면서도 줄곧 곱씹었지만 아스토르가에서 H가 해준 이야기 덕분에, 이제는 그 묵은 기억을 털어버리고 조금 더 스스로를 위해 용기 낼 수 있게 될 것 같다. 너무나 당연해서 그 누구도 책임질 수 없고, 반박할 수 없는 세상의 현상이 그 창의 방향을 이쪽으로 돌려 나를 부정하기 시작할 때는, 오히려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그와 마주 보며 신념의 방패를 들어 올린 두 손에 더욱 힘을 주는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인간의 정신은 이렇게 지당한 사실들을 인정하는 과정 속에서 단련되어 가는지 모른다.
"그 부정론은 내 작품 자체보다 작품이 대중에게 받아들여지는 현상에만 집착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만난 적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써대는 것이라 결국은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작품 전부가 모든 사람에게 받아들여지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중략)
확실하게 존재하는 관중에게 예술이란 행위로 자신을 드러내는 것, 거기에 관중을 우롱하는 불손한 태도가 섞여서는 안 되었다. (...) 그래서 더욱이 지금도 그리고 있고, 내일도 그릴 것이다. 아무튼 계속해서 그리는 것, 그리는 행위가 지속되지 않는다면 이미 나란 존재는 의미가 없으니까."
<작은 별 통신, 요시토모 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