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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짱 Feb 21. 2023

"엄마, 나를 믿어주세요."

아들의 말말말

 전화가 왔다. 아들의 유치원이다. 가끔 아들의 유치원에서 전화가 올 때면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어디가 아픈가, 수업 태도에 문제가 있나...... 통화 버튼을 누르기 전까지 수만 가지 걱정이 뒤섞인다. 얼마 전에는 가장 친한 친구와 떨어진 물건을 잡고 서로 자기의 것이라며 실랑이를 하다가 울음을 보였다는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고 아이가 하원하기를 기다리기까지 얼마나 마음이 복잡했는지 모른다. 어떻게 훈육을 해야 할까,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 유튜브로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육아서를 뒤적이기도 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부모든, 선생이든 매를 들거나 체벌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졌다. 손바닥을 맞거나 책상 위에 올라가 의자를 들고 서 있거나 지각 시에는 오리걸음으로 운동장을 걷거나 단체 기합(!)을 받는 일이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이다.


 그렇게 커온 나와 같은 또래가 엄마가 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가 커온 대로 아이를 키우면 학대다. 그래서 끊임없이 배우고 반성하고 교정해야 한다. tv 프로그램에서든, 육아서든, 결국은 양육자의 태도에서 문제가 기인함을 말하고 있으므로. 늘, 내가 '나쁜 엄마'가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과 죄책감에 오늘도 내 행동을 되짚어 보곤 한다.



 선생님은 아들이 글씨 쓰는 걸 무척이나 싫어한다고 하셨다. 잘 쓰고 못 쓰고는 둘째치고 '쓰기' 자체를 싫어해 시간 내에 끝내지 못하는 날이 많다는 거였다. 심지어 하기 싫다며 책상에 엎드리기까지 한다고. 선생님의 말씀에 제일 먼저 화가 났지만, 아들이 하원할 때까지 '화내지 않고' '감정을 존중'해주되, 필요한 가르침은 할 수 있는, 대화를 해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했다.


 "아들, 쓰기 하는 게 어려워? 아니면 쓰는 것 자체가 지겨워?"

 최대한 따뜻한 말투로 대화를 시작했다.

 "......"

 육아서대로 대화를 하려면, 뭔가 아들의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아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손이 아파요'라고 대답하면, '아, 그래 아직 글씨 쓰는 손 근육이 발달하지 않았구나.' 이렇게 대답해 준다든지...)


 "아들? (아직까지 상냥하지만 조금은 더 단단한 목소리로) 연필 잡을 때 손이 아프니? 그럴 수 있거든."

 "......"

 예상하지 못했던 시나리오다. 말이 많은 아들이 입을 다물다니. 내가 준비한 말을 하나도 하지 못했는데. 그래도 준비한 말을 하자.


 "쓰기 하는 게 어렵고 재미없고 힘들 수 있어. (한 번 쉬고)  글씨를 잘 쓰지 못해도 돼. 하지만 엄마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을 때 그 힘들고 지겨운 과정을 견디는 힘을 배웠으면 하는 거야. (여기까지는 육아서대로 잘 해냈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하기 싫어요', '안 해요'라고 했다며? 아니, 아무리 하기 싫어도 그렇게 하면 돼? 그게 뭐야?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끝까지 해야지. (아, 망했다...) 어? 그리고 너 왜 엄마가 말하는데 대답도 안 해? (급발진....)"


 망.. 했.. 다... 이게 아닌데. 결국에는 엉망진창 대화가 되어버렸다. 상냥한 톤으로 시작한 대화는 어느새 무서운 마녀의 외침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 대답이 없는 아들의 태도에 나는 화가 났고, 나는 그냥 그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애먼 식탁만 닦았다.


 그때 아들이 소파에서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다가온 기척이 느껴졌는데도 나는 아들을 쳐다보지 않았다. 아들은 자신을 보지 않는 엄마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는,

 "엄마!"

라고 불렀다.

 나는 그제야 아들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 내게 아들은 이렇게 말했다.


 "알았어요, 엄마.
나를 믿어주세요."


 나 역시 좋은 부모가 되는 것이 힘들다며, 공부하고 연습하고 다짐해도 매일 이렇게 흔들리는데, 아이에게는 늘 왜 이렇게 조급한 걸까. 무언가에 능숙해지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시간과 연습이 필요한 걸. 아이는 묵묵히 해나가고 있는데, 언제나 나는 불안해했던 것 같다. 아이가 처음부터 잘하길 바라는 건 지나친 욕심이다. 부모로서, 시도하고 실수하고 교정하는 배움의 과정 속에서 응원과 격려를 해주어야 할 텐데.

 나는 아들을 꼭 안아주곤, 차분히 다시 대화를 나눴다. 엄마의 미숙함에 대해 혹시 감정을 다쳤다면 미안하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아이가 엄마 아빠의 기준에 턱없이 못 미친다면, 아이가 서툰 탓도 있지만 엄마 아빠가 조급한 탓도 있어요. 부모님의 역할은 아이의 미숙함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의 미숙함을 '견디는 것'입니다.
                                                                                                       - 윤지영, [엄마의 말 연습], p.72


 아들의 말처럼 아들을 믿어주기로 했다. 그리고 여전히 미숙하기만 한 엄마인 나 역시 믿어보기로 했다. 서로를 위한 이 배움의 과정이 결국 우리를 성장시키고, 우리의 관계를 더 건강하게 만들 테니까. 잘 해낼 거라,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보련다.


여전히 글씨 쓰기를 어려워하지만, 그래도 아들은 오늘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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