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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 ILLUSTRATOR Mar 13. 2024

빈대와 김밥

해외에서 빈대살이하는 신데렐라

주방에 앉아 알아듣지도 못하는 라디오를 들으며 글을 쓰고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왕자는 5시부터 2분 간격으로 맞춰둔 알람의 5번째에 끄고 일어났다. 옆에서 누가 자든 말든 상관 안 하는 인간이다. 그는 왕자니까.

멍하게 침대에 잠시 누워있다가 왕자가 샤워를 하러 들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이불을 걷어차고 나온다. 바로 바닥으로 쓰러져 스트레칭한답시고 좀 더 누워 몸 좀 뒤척이다가 기상! 매일밤 끼우고 자는 치아교정기를 빼서 흐르는 물에 헹궜다가 제자리에 둔 후 싱크대에서 손 씻으면서 세수까지 한다. 왕자가 화장실을 쓰고 있으니 신데렐라는 여기서 씻어도 된다. 가끔 안 씻기도 하는데 뭐..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하나하나씩 꺼낸다. 마지막으로 꺼낸 지은 밥을 150g 덜어서 작은 유리볼에 담아 1분 데웠다가 참기름, 소금, 깨소금을 잔뜩 뿌려 버무린다. 김발을 쫙 펴고 김을 두고 밥, 계란, 오양맛살, 당근, 오이, 단무지, 우엉, 그리고 오늘은 특별히 햄 대신 참치를 넣었다. 매번 말아도 김밥 마는 건 잘 늘지를 않는다. 김 끝부분을 아래로 향하게 잠시 도마에 올려두고 김끼리 붙는 동안 어질러진 난장판을 한바탕 정리한다. 샤워를 마친 왕자가 자신의 도시락을 싸고 있는 신데렐라의 모습에 뿌듯한 미소를 보낸다. 그 낌새를 알아차린 신데렐라는 더욱 칭찬받고 싶은 마냥 고급스러운 자태로 잘 말아진 김밥을 곱게 썰어 통에 정성스럽게 담는다.


내가 이 짓을 매일같이 하고 있는 이유는 두 가지다. 왕자를 K-Food로 길들이기 위함과 나의 빈대살이를 허락한 왕자에 대한 나의 약소한 보답이다.

빵을 워낙 좋아해서 외국에서 음식으로 걱정할 일 없었던 나는 ’ 진짜음식’이 그리워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가 이번 한국에서 다시 올 때, 김밥을 위한 준비를 좀 해가지고 왔다. 사실 김밥에 대한 나의 계획은 따로 있었다. 요즘 하도 해외, 특히 미국에서 김밥이 인기가 있다길래 이 흐름을 타서 나도 한 번 김밥장사를 해서 돈을 버는 상상을 잠시 했고 나름 필요한 도구를 챙겨 왔다. 일단은 매일 왕자에게 도시락으로 싸주다가 그의 반응을 살피기로 했다. 그는 다행히 김밥을 매우 좋아한다. 맨날 먹어도 맛있다고 해서 정말 매일 싸주고 있는데, 한 번은 네 동료 것도 한 번 싸줄 테니 맛 좀 보여줘라… 로 시작해 나의 김밥팔기계획을 말했다가 욕만 되받았다.


뭐 하나 쉽게 되는 게 없는 이 나라에서 음식을 허가도 받지 않고 판다는 나의 얄팍한 생각에 그도 진저리를 치며 네 그 이상한 비즈니스에 본인을 끼어들지 말고 그런 일에 스트레스받고 싶지 않다며 딱 잘라 거절했다. 거절했다고 표현하는 이유는 솔직히 그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본인의 처지이기에 그렇다. 심지어 회사 동료에게 맛 보여주는 것도 하기 싫단다. 저런 싸가지……


그렇게 김밥장사로 돈을 벌어 나름 행복하게 사는 나의 상상은 단번에 조각나서 사라졌다. 그래도 매일같이 난 김밥을 싼다.

나도 양심이 있지, 남의 집에 이렇게 눌러앉아 살면서 돈 한 푼 안 내고 지내고 있는 게 고마우면서도 우울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다행이다가도 자신에게 화가 났다가도 괜찮다로 마무리 지으며 마음을 가라앉힌다.


이렇게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하루가 길게 느껴지는 게 단점이지만 밤에 일찍 자게 되는 건 좋다. 솔직히 볼만한 시리즈가 없으면 알아듣지도 못하는 티브이를 틀어놓고 소파에 처 누워 껄껄대는 왕자의 얼굴을 보느니 일찍 자버리는 게 낫다. 그는 내 삶을 모른다. 본인이 없는 동안 여기서 하루종일 지내고 있는 신데렐라가 무슨 일을 하고 뭘 먹으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 어쩜 어디서도 똑같이 지내고 있는지 내 삶도 참 웃기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도 웃기다. 어떻게 나처럼 자존심 센 애가 이런 삶을 오래 버티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어쩜 이렇게도 내겐 이런 삶이 계속되는지, 독립적인 내 모습은 언제나 그저 상상에만 있는 건지 이루어지긴 할는지.


요새는 친구가 그토록 잔소리했던 분야를 파보고 있다. 요새 그림 그리는 걸로 먹고사는 일 중에 이모티콘 작가라는 게 있대서 시도해 보고 있다. 사실 1차로 카카오톡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움직이는 게 더 괜찮을 거 같아서 움직이는 이모티콘을 만들고 있다.

제발, 이게 등록이 돼서 통장에 돈이 한 푼이라도 꽂혔으면 좋겠다. 김밥은 물 건너갔고 2차전은 이모티콘이다.

오늘도 힘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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