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 ILLUSTRATOR Mar 26. 2024

외국남자와는 다를 줄 알았다.

굴레

갈등의 시작은 늘 작은 걸로 시작한다.

오해는 덮어두면 쌓이기 마련이고 그걸 풀려면 과감한 용기가 필요하다. 말로 풀고 나면 별거 아니지만 그전까지 나의 상상 속에서 늘 그 결과는 이상하게 부풀어졌다. 이상하면 그런대로 그냥 내버려 두고 입 다물고 그 사람과 거리를 두고 지내기를 난 지난 결혼생활에서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정말 다른 사람은 겪지 않았으면 하는 의미 없고도 스스로를 더욱 동굴에 가두게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지난 나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일찌감치 불화가 찾아왔고 아픈 가족이 있었기에 내 한을 풀기가 어려운 상황이라 모든 걸 단념하고 마음을 닫고 살았다. 대화 없는 부부의 일상은 처참하다 못해 꼴불견이다. 그 짓을 10년을 하고 절대 다시는 그런 상황을 안 만들려고 했는데 다시 찾아왔다.

저주에 걸린 것처럼.


독일어를 하는 남자와 지내는 나는 도대체 이 사람과의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 걸 체감하면서 내 몸은 자연스럽게 예전의 버릇처럼 그와 슬슬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그건 그쪽도 마찬가지였다. 과거의 경험에서 비롯해 다신 비슷한 상황을 격지 않으려고 만들었던 철칙에 충분히 부합했기에 난 이 어려운 관계를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었다. 결혼이란 제도를 벗어난 관계일 것. 으레 짐작하는 걸 방지하기 위해 아예 전혀 모르는 문화의 사람과 만날 것. 외국사람이 딱이라 생각했다. 말도 안 되게 그걸 이루고 이곳에 왔건만 난 변하지 않았고 그걸 깨닫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이 사람을 그렇게 만든 건지 원래 이 사람도 그런 사람이었던 건지 지금 이 관계는 내 전 상황과 많이 닮았다.


일생을 약속하기로 한 사람과 사랑 없이 사는 건 지옥이다. 우리 상황이 힘들어져 내가 토라졌을지언정 내 남자는 그래도 나를 사랑으로 받아주기를 솔직히 바랬었다. 손을 잡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정도인 상태에서도, 늘 불만을 가진 나면서도 그래도 한 번은 남편이 먼저 다가와주길 자주 바랬었다. 그런데 마음을 닫은 남자의 행동은 서리가 돋는 얼음보다도 차갑다.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다. 성적인 매력이 끌리지 않는 걸 넘어서 꼴도 보기 싫은 눈빛을 읽었을 땐 나 자신이 많이 초라해진다.


여기, 지구 반바퀴를 돌아온 이곳에서,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음을 감지했다. 마주 보고 앉지만 시선을 딴 데 두고 흐리멍덩한 그 눈빛을 난 아주 잘 기억한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몸이 곧 부들부들 떨릴 게 느껴지면 나도 곧 그 자리를 일어서곤 했다. 그 시절 날 잡아두었던 건 나의 작은 아들이었다. 이번에 나의 발목을 붙잡는 건 나의 눈수술이다.


“우리가 왜 만났을까?”


“네 눈수술 때문이겠지.”


며칠 후에 난 각막이식 수술을 하기로 되어있다. 이 남자에게서 사랑이 옅어지고 있는 걸 알았지만 내가 여기 온 이유는 내 눈 수술이 있었다. 그를 이용해서 눈 수술이라도 받으면 반은 한 거다라고 계산하고 있었다. 그 남자 입에서 그 말이 나왔을 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을 그저 도우려고 날 여기에 들였을까. 이 사람은 이상한 영웅심리를 가지고 있는 걸까.


여태 안 보이는 대로 불편하지만 어찌어찌 살고 있었는데 이걸 빌미 삼아 원하지도 않는 사람과 그의 도움을 받으며 수술 후 한동안은 여기서 계속 지내는 게 맞는 걸까. 그게 오직 이유라면 난 수술을 받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말했더니 그가 입을 뗐다. 그럼 우리가 여태 보낸 시간과 노력이 다 헛수고가 될 거라고. 다른 대답이 더 나올까 잠시 기다렸지만 그게 다였다. 그를 떠보고 싶어 물었다.


“우리 사이에 그래도 희망이 있긴 한 거 같아?”

내 조잡한 자존심을 깨부술 그의 남자다운 진정 영웅다운 대답을 내심 기대했는데 그의 대답은 매우 냉철하고도 확고했다. 우리의 지난 시간을 돌아봤을 때 이 관계에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다고.


이건 굴레다. 내가 그 굴레를 여기까지 끌고 온 걸까. 아님 재수가 없어 또 이런 사람을 만난 걸까. 사람은 경험에서 배우고 같은 실수를 번복하지 않는 게 나이 듦의 진정한 가치가 스며있다고 생각했는데 왜 난 또 시험에 든 걸까.



내가 바뀌어야 한다. 내가 똑같은 상황에서 다른 판단을 하고 다르게 노력을 해야 한다. 상처받기 싫고 자존심 상하기 싫어 거리를 두었던 그 습관을 고쳐야 한다. 이 사람이 먼저 다가와주길 기다리지 말고 내가 다가가야 한다. 어차피 한 번인 목숨, 한 여자에게 충성하지 못한 자신을 후회할 거라 여겼던 남자의 가슴을 내가 가져봐야겠다. 같은 남자지만 아들은 모자란 게 보여서 다 내주고, 도를 닦아도 그게 당연한데 왜 내 동반자에겐 그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어렵다.


“널 알게 되었을 때 난 내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어. 내가 사랑하고 또 사랑받을 수 있는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걸 누구에게도 탓할 수는 없잖아?”


알아 안다 이놈아 나도 안다고.




다음화엔 이 남자의 사랑에 대해 쓰려고 한다. 미리 예고하자면 그 여자는 지금 세상을 떠났고 그는 아직 그녀를 못 잊었으며 나는 그런 그를 보면서 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