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UN ILLUSTRATOR May 16. 2024

40에 새 직장을 얻었다.

꿈과 현실 사이

돈을 벌기 위해서 난 비엔나에 와서 두 달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걸 시도했다. 새로운 걸 시작했다는 건 그동안 내가 했던 걸 접었다는 의미이다. 내 프로필 이름처럼 나는 일러스트레이터다, 였다. 2년 동안만 그랬다. 이혼하고 제주도에서 혼자 사는 동안 동화책에 들어갈 그림을 그렸다. 다이소에서 일하고, 길에 잡초를 뽑는 일을 하고, 반찬가게, 청소일을 하면서도 항상 집에 돌아오면 그림을 그렸다. 일이 없는 날에는 밥 먹고 자는 시간 빼고 거의 의자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가장 시간을 잡아먹는, 생계로 뛰고 있는 일은 내 사이드 잡이라 여겼고 내 진짜 직업은 ‘일러스트레이터’라고 믿었다. 당장 수입이 생기지 않아 다른 생계수단이 필요했기에 어떤 일이라도 거부감 없이, 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했다. 책이 출간되고 나면 인세를 평생 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버틸 수 있었다. 내가 죽으면 아들이 그걸 받게 되리라 생각하니 더없이 가치 있는 투자라 생각했다.


책이 출판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한 카페에서 나도 모르게 짧은 환호를 질렀다. 뜨거운 눈물이 뺨에 흘러내렸고, 그 기쁨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엄마에게 전화해 얼마나 자랑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린 그 그림들을 수십 번도 넘게 보면서도 매번 가슴이 벅차올랐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난 돈을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책은 아직도 아마존에서 판매 중이지만 난 인세를 받지 못하고 있고 출판사는 2022년 9월 이후 연락이 끊겼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질문이 당연히 떠오르겠지만, 이 바닥에 그런 일이 공공연히 일어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고 그나마 4권 그림을 다 보내지 않은걸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3,4권의 그림은 빛을 보지 못한 채 내 폴더에만 남겨져 있다.


내 그림을 좋아해 준 남자 친구가 고마웠다. 그래서 그에게 끌렸었다. 이번에 비엔나로 돌아오기 전 한국에서 포트폴리오를 피 튀기게 준비했고 예술 대학 두 곳에 지원했지만 떨어졌다. 1년이 유효한 비자가 나왔고 2월에 비엔나에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이렇게 마음먹었다.


‘예술가라는 꿈이 나를 잡아먹었으니 이제 그걸 버리자, 나를 힘겹게 하는 건 더 이상 꿈이 아니다. 돈을 벌자 ‘


언어도 안되고, 한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 내가 어디서 일한다는 건 너무 막막했기에 온라인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을 시도했다.


1) 맨 처음 시도한 건 ‘이모티콘’이었다. 내 가까운 친구 하나가 예전부터 했던 조언이었다. 그림을 그릴 수 있으니까 너도 이런 거 해 봐.라고 했을 때 왠지 당기지가 않았다. 내 꿈과는 전혀 관계가 없고 나조차 이모티콘을 사서 쓰는 사람이 아니기에 그에 대한 호감이 제로였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 만큼 재고 따지지 않기로 했다.

‘카카오톡 이모티콘’을 목표로 정하고 지원했다가 한 번 떨어진 후 움직이는 걸 만드는 게 낫겠다 싶어 2주 동안 애니메이트 프로그램을 익히고 이모티콘을 만들었다. 그리고 6가지 플랫폼에 지원했다. 그중 세 군데에 승인이 되었다.


2) 그다음 시도한 건 ‘컬러링북’이었다. 어느 날 유튜버가 소개하는 부업을 보고 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그래도 따라 해서 아마존에 컬러링북 두 개를 등록했다.


3) 세 번째는 머그컵 디자인이었다. 관련 동영상을 보고, 따라 하고 다시 뒤지고 또 따라 하고 시도했다. 마침내 미국 온라인샵에 제품을 등록했다.


지금까지 내 통장에 들어온 수입은 0이다. 빵이다. 제로.


남자 친구와 관계정리를 하기 하루 전, 한인 커뮤니티에 올라온 구인란을 보고 한식 레스토랑에 지원을 했다. 다음 날 남자 친구와 싸우고 한바탕 울고 있는데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 레스토랑이었다. 하늘이 무너질 것 같던 찰나에 실낱같은 희망이 스며든 순간이었다. 온몸이 전율했고 울상이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 친구에게 말했다.


“거봐, 마냥 힘들기만 한 게 아닐 수 있잖아.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내가 일을 시작하게 되면 난 돈을 벌 수 있을 거고 그럼 너에게 의지하는 부분이 상당 줄어들 거야. 그럼 너도 부담을 덜 느끼겠지. 매일 너 오기만을 기다리는 멍청이가 더 이상 아닐 수 있다고!”


첫날 9시간 서빙을 하고 75유로를 받아 뒷주머니에 꽂고 밤늦게 한 시간을 걸어 집에 가는 동안 정말이지 만감이 교차했다. 오랜만에 긴 시간 동안 서서 일했더니 다리가 너무 아팠고 눈은 이미 몇 시간 전부터 풀려있었다. 걸어오는 동안 두세 번 뒷주머니에 꽂힌 현금을 만지작 거리자 나오는 웃음은 너무 달콤했다. 그 늦은 시각에도 여전히 붐비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말 오랜만에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내 옆을 스치는 평범한 사람들의 무난한 일상을 난 아이러니하게도 오랫동안 갈망해 왔다. 실패를 거듭하면서 꿈과 현실 사이의 갭이 점점 커질수록, 별일 없이 지루하게 산다는 사람들의 그 삶이 너무 갖고 싶었다.


첫 월급을 받으면 남자 친구에게 저녁을 살 거다. 옷과 가방, 선글라스를 살 거다. 독일어 학원도 등록할 거고, 가끔 커피를 마시러도 갈 거다.

 






작가의 이전글 죽은사람을 질투한 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