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의 사랑
어제는 내 치과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미히(전, 왕자님)의 친구가 운영하는 치과였다. 차가 없는 미히는 항상 이 친구에게 차를 빌린다. 정작 본인은 택시를 타고 가더라도 군말 없이 차를 내어주는 그런 친구다. 무튼,,, 이 친구의 병원 직원들과 미히는 잘 아는 사이라 내가 대기석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는 그들과 한창 수다를 떨고 있었다. 평소에 못 보던 얼굴이 있어 미히에게 슬쩍 누구냐고 물었다.
“아, 너 처음보나? 치과 테크니션이야, 여기서 일하기 전부터 알던 사람이야. 우테랑 같은 회사에서 일했었어. 아 그리고 로버트, 우테의 전 남편과 지금도 같이 일하는 동료야.”
자세한 건 몰라도 된다. ‘우테’라는 이름만 크게 들릴뿐이다. 이제 그는 나에게 그녀의 이름을 편하게 꺼낸다. 한동안 꺼내지 않았던 그 이름, 우테.
지금은 세상에 없지만 나를 질투하게 만들었던 그 사람, 그의 전 여자친구, 사랑이다.
오스트리아 땅에 처음 땅을 밟았던 날, 미히와 그의 엄마, 조카까지 공항으로 마중 나왔다. 그 엄마의 차를 타고 우리는 미히가 혼자 사는 작은 아파트에 도착했다. 안내해 주는 방에 캐리어를 두고 다들 모여있는 부엌 쪽으로 가는데, 순간 신발장 거울에 꽂혀있는 한 여자의 웃고 있는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여자구나!
그 뒤 그 집에서 한동안 지내는데, 미히가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나 혼자 그 집에서 있어야 했다. 침실 벽 한쪽에 그림이 한 장 걸려 있었는데 난 한동안 그걸 눈여겨보지 않다가 어느 날 깨달았다. 아. 미히와 우테의 얼굴이구나. 우테가 그린 그림이었다. 집 안 곳곳에 누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녀의 흔적이 곳곳에 발길이 닿는 곳마다 여전히 그렇게 놓여 있었다. 그럼 안 되는데, 그러면 안되는데 마음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녀와 그의 공간에 내가 침입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또다시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씨발.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런 데에 날 데려왔다는 사실, 아니 내가 올 거란 걸 알고서도 그 모든 물건을 치우지 않았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외국인의 정서는 다를까 봐 괜히 이걸로 쪼잔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그래서 모른척하려고 했지만, 자꾸 너무 가까운 곳에 그녀의 손길이 느껴지는 걸 나보고 어쩌라는 말이냐고.
힘든 마음을 그에게 티 내지 않으려 노력했고, 이를 혼자 풀어내려고 친구에게 통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그 친구 또한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보낸 경험이 있고, 새로 만난 남자와 이걸로 자주 다투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난 그 남자가 왜 이미 죽고 없는 사람을 마치 뭐랄까,,, 질투하는 것 같아서 너무 이해가 안 됐거든? 그런데 너도 그런 느낌이 든 단 말이야? 근데 너 이거 그냥 넘어가서는 안 돼. 그 남자한테 얘기하고 정리를 해야 돼. 안 그러면 괜히 오해만 쌓일 거야.”
그렇게 난 오스트리아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한국으로 돌아가고픈 두려움을 떨쳐내고 그를 붙잡아 이 어려운 얘기를 꺼냈다. 내가 미친것같이 들리겠지만 그 여자의 흔적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사실. 그 여자와 너의 공간에 내가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이다. 그날 우리는 힘겨운 대화를 오갔고 결국 그녀의 물건을 같이 정리하기로 했다. 그리고 침실에 걸려있던 그림을 두고 미히가 내게 물었다.
“저것까지 치워야 해? 저건 우테가 본인이 죽더라도 간직해 달라고 했던 거야.”
“솔직히 나는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아무렇지 않을 수 없어, 하지만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잠시 머뭇거리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사실, 심리상담가도 우테의 물건을 최대한 빨리 다 없애는 게 나한테 좋을 거라곤 했었어, 다만 용기가 안 나서 못하고 있었는데 네덕에 이번 기회에 치워야겠다.”
그렇게 모든 짐을 정리한 것 같았지만 난 너무나 잘 느낄 수 있었다. 아직도 그가 그녀를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말이다. 그리고 점점 두려워졌다. 내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곳에 와 있는 느낌. 외모적으로도 둘은 너무 잘 어울리고 난 그와 하나도 매치되는 게 없는 것 같았다. 다 정리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그녀의 사진과 물건들을 볼 때마다 난 그냥 계속 자존감이 떨어짐을 느꼈다.
그리고 어느 날 내가 물었다.
“혹시 너 아직도 우테를 사랑해? “
그는 돌연 화를 내듯 차갑게 말했다. “난 한 번도 그녀를 떠나보낸 적 없어. 그녀가 그냥 갑자기 죽었다고. 내가 그녀를 사랑하면 왜 안되는데?”
“그래? 그럼 넌 아직 준비가 안 돼있네. 다른 사람을 만날 준비가 안되어있는 상태인데 재수 없게 내가 걸린 거야.”
나도 순간 화가 나서 질렀다.
맞는 말이다. 본인이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는데, 아직도 둘의 모든 게 남아있는 작은 공간 안에 그걸 받아들이라고 누군가를 툭 던져놓은셈이다. 그리고 나머진 그 누군가가 알아서 감당하라고, 그게 슬픔이든 질투는 무슨 짓을 하더라도 남들이 보기에 그 누군가만 속좁고 이상한 사람이 될 테니 자기와는 상관없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지금 ‘나 ’다.
그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우린 서로를 탐색하기 위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본인의 지난 과거를 먼저 꺼낸 사람을 그쪽이었다. 사랑하던 사람과 5년을 함께했는데 만난 지 일 년이 지났을 때 암판정을 받았고 그는 그녀의 곁을 4년 동안 지켰다. 그리고 2년 전 그녀가 세상을 떠났고 본인은 꽤 힘든 시간을 보내다가 너무 힘들어서 긴 휴가를 내서 발리에 왔다고. 거기서 모든 걸 다시 회복 중이라고 말이다. 그녀에겐 전 남편과의 자식이 둘 있었고, 내 아들과 비슷한 또래였다.
“그래, 네 얘기는 뭔데? 이제 네 얘기를 털어놓을 차례야.”
그 모든 걸 감당해 낸 그 사람에게 난 내 과거를 자연스럽게 꺼낼 수 있었다. 그는 왠지 나를 다 이해하는 것 같았다. 본인은 정작 아이가 없고, 결혼을 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람, 그들은 가족이었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그의 결정에 상관없이 떠나보냈다. 그리고 난 이런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책임감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 남자가 그 여자를 지켰던 것처럼, 나도 지켜줄 거라 믿었다. 항상 외롭고 시렸던 내 삶이 따뜻하게 데워질 거라 기대했다. 그 기대를 많이 했었다.
상처를 받은 사람들끼리 서로를 이해하고 다독이며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그 상처를 견뎠다는 건, 그 기간 동안 에너지를 뺏겼다는 거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지키려는 보호본능이 커져 오히려 본인의 감정표현을 스스로에게도 허락하지 않는 상황이 온다. 이건 미히쪽이다.
나는 한 번 상처받은 후 그게 해결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았을 때 시간만이 답이라는 걸 깨닫고 마음을 닫고 혼자 지내는 법을 몸에 익힌 사람이다. 함께 나누는 게 아니라 그의 삶을 방관자로서 바라보는 삶을 10년 동안 지속했었다. 그리고 이 남자와는 그런 삶을 당연히 상상도 안 했는데, 지금 그렇게 되었다.
상처받은 사람끼리는 함께하는 게 아니다. 우울한 사람끼리는 같이 살면 안 된다. 혼자 살아남는 법을 이미 깨달은 사람끼리는 거리를 두고 지내게 된다. 같이 있어도 외로운 그 삶은 혼자일 때보다 더 외롭다. 다시 ‘버텨야’ 한다는 사실에 또 지치지만 어떡하나, 그래야지. 그래도 이 주어진 삶을 잘 살아야지. 다시 태어나면 물로 태어나고 싶다.
난 그냥 물처럼 살래.
난 물이야.